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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8. 12. 4. 15:22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리 사회는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그 과정에서 물질만능주의와 공동체의 붕괴, 도덕적 해이, 이기주의, 불안, 고독, 신경쇠약, 우울증세 등의 정신적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탐욕과 질투, 끝없는 불만처럼 건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인 문화가 사회 전반과 학교에 만연합니다.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하고 안전을 제공하며 인간의 모든 문제와 사회의 병증을 치유할 것이라는 환상이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최상위 계층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지옥 같은 구조가 된 까닭에 자조적으로 헬조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세월호의 침몰은 참혹한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특히 교육적 관점에서 어떤 사회를 꿈꾸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들이 지옥 같은 사회를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바꿔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루돌프 슈타이너는 100여 년 전에 이미 전통적 사회형태의 붕괴가 임박했으며,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과거의 유산에 의존하는 방식이 아닌, 의식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슈타이너는 수백만의 시체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재난이 닥쳤을까?’ 그는 겉으로 드러난 원인이 아니라 진정한 원인을 찾기 위해 인류사의 흐름을 되짚었습니다. 열강들의 국익이나 자원의 문제도 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국가의 권력 구조가 단일화되고 중앙집권화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권력적으로 하나의 정점에 의해 지도와 지시를 받는 관계, 다시 말해 단일 권력이 사회의 모든 구조를 지배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에 원인이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이 잘못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것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이렇게 분석을 하면서 슈타이너는 사회유기체의 삼지성(Dreigliederung)’을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각주:1]

 

슈타이너가 바라본 사회는 인간의 신체와 같은 하나의 유기체였습니다. 이는 괴테의 영향이 큰데, 슈타이너 역시 괴테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이며, 사회 역시 하나의 유기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회를 일종의 유기적 생명체로 보는 관점이 괴테나 슈타이너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콩트나 스펜서, 뒤르케임 같은 사회학자들도 그 당시 발전한 생물학을 접목시켜 사회 구조를 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사회유기체설이라고 칭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회는 거대한 유기체와 같아서 그에 속한 개인들은 세포에 해당하며, 각각의 세포가 서로 분업하고 협력하여 전체 사회가 원활하게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는 부분보다 우선합니다. 이러한 사회유기체설은 전체보다 부분을 중시했던 사회계약설을 비판하며 등장합니다.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독특한 인간학과 연관시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지학적 인간학에서 인간의 신체는 머리 영역과 사지 영역, 그리고 가슴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머리가 있기에 사고를 할 수 있고, 사지를 이용해 의지를 표출하며, 가슴으로 느끼고 감정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셋으로 분화되어 있지만 각각의 영역은 하나의 전체로 통합됩니다. 이처럼 유기체는 분절된 동시에 통일성을 갖습니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로, 슈타이너에 따르면 사회는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영역과 경제적인 영역, 그리고 정치적이고 국가적이며 법률적인 영역으로 삼분되어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사회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나누어 분석한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물질적 기반을 형성하는 경제 영역이 하부 구조라면, 교사나 예술가, 과학자가 활동하는 정신-문화 영역과 정치-법률 영역은 상부 구조에 속합니다. 정치-법률 영역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계약과 관련된 영역입니다.[각주:2]

 

과학, 교육, 예술, 종교, 언론 등을 포함하는 문화 영역

정치, 법률, 권리, 국가 영역

경제 영역

 

슈타이너는 사회가 조화롭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세 영역이 모두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며, ‘발달하는 과정에서 서로 수정할 수 있도록세 영역에 충분한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가기관이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로 삼권 분립되어 있듯이 사회 전체도 문화 영역과 정치 영역, 경제 영역으로 삼분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앙집권화된 단일 권력 구조는 독재적 지배 형태를 낳으며 사회적 재난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가 보여 주었던 퇴행은 정확히 권력의 비정상적 지배 구조에 기인합니다. 대통령 1인에게 제왕적 권력이 주어지는 현재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고질적인 권력형 비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100년 전 세계는 그러한 이유로 인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슈타이너의 개혁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와 문화생활의 분리

정부가 문화를 통제할 수 없도록 한다. 사람들의 사고와 교육, 신앙에 대해서 국가가 간섭할 수 없다. 특정 종교나 이념이 국가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교육과 문화생활의 이상은 자유와 다원주의이다. 어린이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다양한 철학의 학교를 폭넓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와 문화생활의 분리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어야 하는 것처럼 도서관과 박물관 같은 문화시설은 누구든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에서 연구 결과는 상업적 이해관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며, 누구든 가족의 경제적 형편에 상관없이 유치원부터 고등교육기관까지 무상으로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국가와 경제생활의 분리

특정 인물이나 기업이 돈으로 정치인을 매수하고 법질서를 왜곡하는 행위를 막아야 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이용해 기업가에게 호의적인 일을 하고 그로 인해 부를 얻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개인을 경제 활동에 흡수시켜 단순한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인간은 상품이 아니며 자본의 노예로 전락할 수 없다.

 

슈타이너는 프랑스 혁명의 표어인 자유, 평등, 박애가 사회적 삶의 세 영역에서 각기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습니다.

 

문화생활에서의 자유

민주주의 정치생활에서의 평등

경제생활에서의 연대의식(박애)

 

가축의 분뇨를 퇴비장에 묻으면 거름이 되지만 강물에 버리면 독이 되는 것처럼, 자유와 평등, 박애의 가치도 사회적 삶의 각 영역에서 올바로 적용될 때 힘을 발휘합니다. 세 영역에서 독립성과 자주권이 증가한다고 해서 상호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건강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세 영역이 독립적으로 분리될수록 어느 하나가 다른 두 영역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의 영역이 다른 생활 영역들을 지배하게 되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일부 이슬람국가에서는 아직도 신권정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 극단적인 경우로 IS(Islamic State) 같은 이슬람 테러 집단에서는 종교를 이유로 대중을 암살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하기도 합니다. 이는 정신-문화 영역이 경제와 정치 영역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정치-국가 영역이 다른 두 영역을 지배한 사례로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국가 원수였던 과거의 소련(공산주의)과 나치 독일(국가사회주의)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경제 영역의 독재는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만능주의로 나타납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경제 영역의 독재를 뜻합니다.[각주:3]

 

의식혼의 사고방식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슈타이너는 말합니다. 기성세대는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방식을 포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젊은 세대가 새롭고 살아 움직이는 사고, 다시 말해 해결해야 할 미래의 과제에 대해 열려 있는 사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시대적 사고를 강요하는 교육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해 인간이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소질이 인간 내부에 담겨 있는가? 그 인간 내부로부터 무엇을 계발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서 학교는 여전히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국가주의 교육에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교육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슈타이너는 기존 학교의 모습을 보면서 교사들이 권력자들의 지시에 따르면서도 통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무감각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익숙해 있는 것은 우리의 사회가 너무나 오랫동안 국가 권력에 의해 지시와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권위적인 국가 질서에 길들여진 사람의 사고방식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는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려 하거나 획일적으로 다루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사안들에 대해 다양한 관점이 허용되어야 하며, 유연하면서도 독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교육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과학은 여전히 기계론적 유물론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적 사고방식이란 생명이 없는 물질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사고는 물체에 작용하는 물리적 힘을 파악하고 화학적인 변화를 분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고가 요구됩니다. 죽어 있는 물질을 이해하기 위한 사고방식과 생명을 이해하기 위한 사고방식은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대할 때는 또 다른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급박하게 변화하고 긴급한 과제가 새롭게 발생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실제적이며 실용적인(practical) 사고입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올바로 사고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학교 역시 사회와 직접적 연관이 있기 때문에 사회삼원론에 대한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실질적 사고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아이들의 발달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수업을 합니다. 7년 주기 발달론에 따르면 0세에 엄마로부터 독립한 아이들의 물질적 몸은 이갈이를 하는 7세까지 급격하게 성장합니다. 몸 안의 생명력이 오로지 신체기관을 형성하는 데에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로 손발을 이용해 세상을 탐색하고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은 이 시기에 의지의 힘을 키우는 데 주력합니다. 생명력은 머리에서 시작해 발끝까지 신체기관을 형성하고, 우리 몸 중 가장 단단한 치아를 변화시키며 일단락을 짓습니다.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오기 시작하면 첫 번째 7년 주기는 마무리가 됩니다.

 

7세가 된 아이들에게 큰 변화는 이갈이와 함께 생명력 중 일부가 몸으로부터 독립하여 사고 작용에 쓰이는 것입니다. 물론 엄마 뱃속에서 아기가 아빠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발길질을 하는 것처럼, 7세 이전에도 아이들은 사고를 하고 기억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학습이 시작되는 것은 이갈이 이후입니다. 아이들의 감정생활이 독립하고 2차성징이 뚜렷해지는 14세까지 교육은 아이들의 정서적 발달에 방점이 찍힙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와 다양한 예술 활동이 수업 활동에 많이 쓰이는 이유입니다. 청소년기인 14세부터의 교육적 과제는 판단과 사고의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자아가 독립하는 21세까지 부모의 보호와 교사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발도르프 교육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21세 이후에는 자기가 자기를 교육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계획하여 실행하고 시행착오도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지학에 따르면 21세 이후에도 인간의 발달은 계속 이어집니다. 여전히 7년 주기에 따라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21세부터 42세까지를 영혼이 발달하는 시기라고 한다면, 42세부터 63세까지는 정신 발달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기입니다. 슈타이너는 인간의 영혼을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감각혼, 지성혼, 의식혼이 그것입니다. 21세부터 28세까지는 감각혼의 시기로 이때의 특징은 호감과 반감에 따라 사고가 굉장히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호감과 반감의 기준으로 대한다는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좋고 싫음이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호감을 가진 일은 적극적으로 하겠지만 반감을 갖는 일은 거부합니다. 호감을 갖는 사람에게는 친절하지만 반감을 갖는 사람은 배척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강하게 남아 있는 이 시기에 반감은 어떤 일에 대해 거리를 두고 분리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계발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감각혼의 시기가 지나면 지성혼의 시기가 옵니다. 대략 28세에서 35세 사이인 이 시기에는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성혼은 판단하고 분석하며 반성할 수 있는 사고의 힘입니다. 대상의 외형적인 특성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어떤 현상의 법칙성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지성혼입니다. 이 시기에는 옳고 그름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서 시시비비를 곧잘 따집니다. 인류의 역사는 지성혼의 시기까지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감각혼 수준에 놓여 있긴 하지만 과학이 종교와 철학을 밀어내고 가장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등장하여 대중화되었고, 민주주의 또한 확산되었습니다. 인류는 세계대전을 겪은 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국제연합(UN)을 설립했고, 인권을 증진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진정으로 평화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발달단계를 겪어야 합니다.

 

지성혼이 늘 외형적이고 대상화된 시각으로 사고를 하려 든다면, 의식혼은 대상의 내면에서 일어난 것을 자기 안으로 가져와 하나가 되려 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낯선 대상이 거기 있지만 그것과 내가 하나가 되고, 나는 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장미꽃이 한 송이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외형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관찰을 할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사고나 상상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고와 상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선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것을 떠올려 봅니다. 흙과 햇빛, 바람과 빗줄기, 구름과 같은 주변의 자연과 연관하여 바라봅니다. 씨앗은 물질적인 작용에 의해 싹이 트고 뿌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점점 줄기가 자라고 잎사귀가 생기면서 꽃봉오리가 만들어집니다. 봉오리는 점점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로 결실을 맺습니다. 꽃이 시들 때 식물은 죽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지 않습니다. 열매 속 씨앗들은 땅에 떨어져 더욱 번성하여 살아갑니다.

 

의식혼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이 꽃의 본질을 쫓아가면서 우리가 사고를 형성했듯이, 대상의 본질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형성하는 것, 즉 대상에 대한 정신적인 상을 내면에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형성되는 상은 사랑을 통해 상대방 내면에 있는 것을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식혼적 사고는 대상을 꿰뚫어보는 것이며,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감이나 반감을 뛰어넘은 공감(empathy)의 차원을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의식혼의 시기는 35세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사고를 유기적으로 형상화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슈타이너는 현시대의 인류가 의식혼 단계에 올라섰기 때문에 누구든 노력을 하면 의식혼 차원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사고가 의식혼의 차원에서 행해질 때 개인적인 호오나 시비는 그 의미를 잃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참된지, 거짓된지가 중요합니다.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 가치인지를 묻게 되고, 단순히 옳고 그름을 떠나 진정으로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게 됩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법이자, 대화법인 비폭력대화나 회복적 대화모임 등은 이러한 의식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회삼원론 역시 의식혼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의 구조이자, 구성 원리입니다. 새로운 사회의 비전은 이처럼 실제적인 사고로부터 나옵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발도르프 학교를 만든 것입니다. 발도르프 학교는 사회삼원론의 실천이자, 의식혼의 교육학을 실현하는 공간입니다.

 

발도르프 학교와 사회삼원론에 따른 운영 원리

 

사회삼원론은 인간의 삼지성(머리·가슴·사지 또는 신체·영혼·정신)처럼 사회를 실제적이고 실용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갖게 되는 관점입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실상 삶의 모든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옷을 만들고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주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생존조차 불가능한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사회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본래 경쟁적인 구조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관계, 다시 말해 서로를 도와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협력적 관계입니다. 학교라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박애의 정신입니다.[각주:4]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발도르프 학교에서 교사들이 받는 급여는 수업을 해서 받는 대가가 아닙니다. 슈타이너는 교사가 하는 일이 결코 돈의 가치로 평가될 수 없고, 대가를 지불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교사의 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돈과 노동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일을 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은 한 사람의 내적 본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자기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해 일을 할 때 그것을 시간 단위로 계산해서 그 가치를 돈으로 부여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은 오로지 노동의 생산물과만 교환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예산 지원이 없는 발도르프 학교에서 학비는 교사들과 학생들의 교육적 활동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돕는 후원에 가깝습니다. 교사들은 생활급여를 받습니다. 저마다의 조건에 따라 급여가 달라질 수 있지만 교사의 능력이나 하는 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사들은 학부모들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해 수업을 하고 학교를 운영해 갑니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권력에 반하는 의사표명을 했을 때 공권력의 폭력에 노출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돈에 의해 통제됩니다. 공립학교의 경우 교사를 통제하기 위해 급여를 차등으로 지급하는 성과급제가 도입된 상황입니다. 돈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발상은 물질주의의 극단에서나 나올 수 있습니다. 적은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사실 합리적인 발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그러한 원리를 도입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은 사람들을 경쟁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돈을 사용합니다. 인간의 이기주의를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를 진정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정신-문화 영역에서 경쟁과 돈은 통용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슈타이너는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기주의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키며, 사회를 파편화시킵니다. 저마다 자신이 분리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고독과 우울은 병적 상태가 되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교육적 시도입니다.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하고,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의사소통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기적으로 연결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사회의 참된 실상을 인식한다면 분리된 것들 속에서 일체를 이룰 수 있고, 여기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발도르프 학교의 목표는 아이들이 이러한 온전함 속에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에게도 이런 학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회삼원론에 대해 배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욕구를 가진 존재입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욕구를 서로가 채워 주며 살아갑니다. 물론 욕구와 욕구가 부딪히면 갈등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욕구와 능력은 별개의 영역입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더 많은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거나, 능력이 없다고 해서 아무런 욕구도 채울 수 없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에게는 욕구와 능력 이외에 책임이라는 또 다른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가 독립한 성인으로서 성숙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이며, 자신의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인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맺어진 약속을 책임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욕구 : 우리는 욕구를 가진 존재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능력 :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한다.

책임 : 우리는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학비는 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여 교사와 학생이 배움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돈이란 누군가의 능력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우리의 기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사가 학교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또는 국어교사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그림만 그리게 한다면 어느 영역에서 문제가 생긴 걸까요? 세 번째 영역인 책임의 문제, 다시 말해 계약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이고 책임 있는 존재로서 학교 공동체에 참여합니다. 교사와 학부모는 각자 해야 할 일들을 약속했습니다. 만약 어떤 교사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계약 관계는 파기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의무를 다해야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교사가 있을 때 교사회나 이사회가 당신은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나가시오라고 명령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교사 스스로 나는 능력이 된다고 생각해서 왔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계속할 수 없겠습니다. 이제 이 약속(계약)을 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이 교사는 앞으로 어떻게 기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물론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기본 욕구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계약 관계에 상관없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슈타이너는 혁명적인 사고를 하였습니다.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영역과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영역은 다르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 국가에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과 미래의 삶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 능력을 팔아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글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도 모자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포기하고 잠자는 시간마저 줄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녹록치 않은 게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주 어린 학생 시절부터 경쟁에 시달리며 살기 때문에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비현실적인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시간이 갈수록 그 중요성이 강조될 것입니다. 얼마 전 인공지능 컴퓨터인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서양식 장기인 체스와 달리 바둑은 복잡성이 크고 학습도 어렵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결론은 인간의 완패였습니다. 이세돌 9단은 단 한 번만 승기를 잡았을 뿐 다섯 대국 중 네 번을 패했습니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급격하게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파고의 활약으로 확인했습니다. 실제로 자율주행차는 상용화 단계에 와 있으며, 로봇의 발달로 제조업 공장에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거의 필요 없어진 상황입니다. 많은 회사에서 생산직원을 감축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앞으로는 택시나 버스, 화물차의 운전기사들도 사라질 것이고, 신문기자나 법률가, 의사 같은 직종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능력을 팔고 싶어도 팔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수많은 영화와 소설은 암울한 미래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인공지능에 지배를 받아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말까요? 지금처럼 이기주의를 토대로 한 사회 시스템이 유지된다면 극소수의 자본계급을 제외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개·돼지의 취급을 받으며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인간의 권리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과 천민의 계급질서가 타파되었고,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으로 존중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으며,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었습니다.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과 같은 약자를 위한 복지가 확대된 것도 민주주의의 발전에서 중요한 업적이었습니다. 이제는 정치적 민주화보다 경제 민주화가 민주주의의 주요한 의제가 된 상황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능력이 없거나 일을 못하는 상황이더라도 사회는 개인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이라고 한다면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 주어질 수 있는 재화가 충분히 있습니다. 문제는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재화의 편중과 그에 따른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앞으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재화를 분배하여 누구도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회삼원론에 따르면 기본 욕구는 경제생활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안정된 경제생활을 기반으로 자유롭게 문화생활에 힘을 쏟을 수 있습니다. 문화생활의 발달은 다시 경제생활의 발달을 이끌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활동, 즉 정치생활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은 필수 조건입니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아무도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사회는 타락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 편히 사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삶일까요? 우리는 일을 할 때, 더 정확히는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인간은 저마다 고유한 존재이고 자기만의 취향과 능력을 지닙니다. 편하게 안주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겠지만 자기 능력을 계발하고 공동체에 기여하고 싶은 욕구 또한 갖고 있습니다. 직업은 자아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기본소득제가 이뤄진다면 오히려 돈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병든 사회의 치유에 대해 고민하고, 실제적인 사고를 통해 자기 삶의 과제를 인식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회삼원론의 진정한 실천은 우리가 의식혼의 차원으로 성장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관점의 전환, 즉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것, 그리고 각자 삶의 현장에서 작은 실천을 쌓아가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됩니다.

 

사회적 주요 법칙

 

더불어 일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대가를 적게 요구할수록

, 자기보다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게 할수록

전체의 영성이 자라난다.

또한 각자가 바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노력에 의해 채워지게 할수록

공동체의 영성은 더욱 커진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욕구가 서로의 관심에 의한

사랑의 힘으로 채워질수록

서로가 평등함을 바탕으로 모두의 뜻이 모아질수록

자유롭게 서로가 서로를 돕고 유지될수록

사회삼원론의 질서는 더욱 잘 이루어진다.

하지만 서로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면

사회삼원론의 정신은 사라지게 된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모임들의 모든 욕구가

조합의 차원에서 민주적이고 협조적으로 이루어지고 지켜질수록

사회삼원론의 구조는 더욱 집중적으로 발달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모임들이 서로를 소외시키는 결정을 하고

이익과 효율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수록

이 사회는 획일적인 중앙집권체제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출처 : 김훈태, <교실 갈등, 대화로 풀다>, 교육공동체벗, 2017]

  1. [루돌프 슈타이너, 사회 문제의 핵심, 최혜경 옮김, 밝은누리, 2010] 참고. [본문으로]
  2. 닐 도널드 월쉬, 의식의 변화를 꿈꾸는 미래 인간 선언문, 이선미 옮김, 판미동, 2014 : 260-263. [본문으로]
  3. [Nicanor Perlas(2003), Shaping Globalization: Civil Society, Cultural Power and Threefolding, New Society Publishers] 참고. [본문으로]
  4. [한스 요하임 젠녹, 사회삼원론과 발도르프 교육 – 제1회 교사연합연수 강연집, 한국발도르프학교교사연합, 2010]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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