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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비상계엄 사태로 본 우리 교육의 심각한 실패 - 이혁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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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비상계엄 사태로 본 우리 교육의 심각한 실패 - 이혁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12. 11. 16:20

윤석열의 비상계엄 사태로 본 우리 교육의 심각한 실패

 

이혁규 청주교대 교수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는 다양한 생각과 사상이 공존한다. 그 속에는 한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극좌적이거나 극우적인 생각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사상까지 포용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의 건강성이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사람이 일정한 수를 넘어서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들이 소수를 넘어 사회의 주류로 부상하고, 더 나아가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다면 이는 민주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심각하게 오작동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두고 성찰해야 한다. 비정상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우리 사회의 법,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재점검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나는 교육자로서 우리 교육의 실패를 문제 삼고자 한다. 교육은 인간의 마음을 형성하는 일에 관여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가장 심층적인 해부와 수술을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성찰과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 교육이 그동안 어떠하였기에 윤석열이라는 존재가 탄생하였을까? 그가 평범한 개인에 불과하다면, 격리와 정신 치료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국가의 대통령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 사회의 망가진 시스템을 표상하며, 우리 교육의 참담한 실패를 드러낸다. 나는 2년 반이 넘는 기간 윤석열의 통치 행위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비상계엄 사태는 그동안 주술이라는 풍문을 동원해야 겨우 해석할 수 있던 그의 정신세계를 명징(明徵)하게 드러내 주었다. 비상계엄 담화 내용과 포고령은 윤석열의 정신세계를 활자화(活字化)한 것이다. 여기에는 ‘피를 토하는 심정’, ‘결연한 구국의 의지’, ‘대통령으로서의 절박함’과 같은 표현이 담겨 있다. 전시 상황에서나 접할 수 있는 비장함이다. 그런데 이 말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놀랍다. 민주공화국 민의(民意)의 심장인 국회가 표적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대변하는 언론이다.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가 처단 대상이다. 여당 대표까지 체포자 명단에 들어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짧은 담화와 포고령에는 감정 조절의 부족, 소통과 협력 능력의 부족, 공공 윤리의 결여, 민주적 가치의 무시, 비판적 사고의 부재 등이 농축되어 있다. 거기에는 한 개인으로서의, 사회인으로서의, 대통령으로서의 불량품인 윤석열의 존재가 녹아 있다. 윤석열 개인의 결함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을 키워 내고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우리 사회의 교육적 결함의 결과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민주시민교육의 강화를 주장한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민주시민교육은 우리 교육의 최종적인 종착지이고 지향이라고 하더라도 한 개인이 받아야 할 교육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한 인간이 태어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원리와 정치 체제를 이해하는 교육을 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서야 우리는 이런 내용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수준에 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윤석열의 실패로 상징되는 우리 교육의 실패를 좀 더 넓은 생애 교육의 지평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인간 존재의 성장을 시간 축으로 하여 우리 교육의 실패를 말하고자 한다. 내가 그의 실패를 ‘개인’, ‘사회인’, ‘대통령’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홀로 태어난다. 실존주의자들의 언어를 빌면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다. 요람에 던져진 무기력한 유아들이 첫 번째로 수혈받아야 할 교육의 본질이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로서의 자신이 한없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정서와 인식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인간 교육의 첫 단추이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인간 존중 정신을 내재화하는 첫 출발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이 첫걸음부터 비틀거린다. 걸음마를 내딛자마자 우리 사회는 살인적인 경쟁 속으로 등을 떠민다. 오징어 게임으로 상징되는 전쟁터로 말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무수한 비교의 압력을 받으며 과도한 우월감과 심각한 열등감과 같은 뒤틀린 자아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개인으로서의 윤석열은 우리 교육의 이러한 첫 단계에서의 실패를 잘 드러낸다.

 

윤석열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행동거지 곳곳에는 낮은 자존감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다. 그는 사과에 인색하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타자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견뎌 내지 못하고, 이를 폭력으로 응수한다. 이 모든 특성이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의 전형성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낮은 자존감을 보이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시카 조엘 알렉산더가 쓴 《행복을 배우는 덴마크 학교 이야기》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참고로 알렉산더는 덴마크인과 국제 결혼을 한 미국 여성이다. 그녀는 덴마크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인 예스퍼 율(Jesper Juul)의 개념 구분을 바탕으로 “덴마크 교육은 자존감을 기르는 교육인데 미국 교육은 자신감을 기르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존감(self-esteem)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나는 존재 자체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내면의 자기 가치에 기반한다. 이에 비해 자신감(self-confidence)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에 유능하며, 어떤 재능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개념으로, 학위, 상장, 자격증 등 외부적 성취와 관련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덴마크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데 반해, 미국 교육은 성취와 능력을 강조하여 자신감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차이가 교육의 최초 발화점의 철학적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엄청나게 다른 사회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덴마크와 미국 사회의 차이를 길게 부연하지는 않겠다. 민주주의 200년 역사를 지닌 미국 사회의 현재 모습을 보면 그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은 미국보다 더 성취와 업적 지향적이다. 유아기 때부터 아이들을 외부적 성취를 향해 몰아가는 비정상적인 사회이다. 거기서 살아남고 성공한 윤석열은 매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매우 허약한 자존감을 지닌 사람이다. 높은 자신감과 낮은 자존감의 조합은 우리 사회의 성공한 많은 사람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에 대한 적대와 공격으로 때로 표출된다. 이 점에서 윤석열은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데 탄핵을 외치는 열기로 광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순간에도 초등학생 의대 진학반이 대치동에서 시작되어 확산되고 있는 야만적 현실이 공존한다. 존재로서의 자기 존중을 가르쳐야 할 소중한 시기에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야만적 교육은 자신감과 자존감의 심한 괴리로 자신도 괴롭고 타자도 괴롭히는 또 다른 윤석열을 이 시간에도 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존재로서의 자존감을 배우는 다음 단계에 맞이하는 교육적 과업은 사회인으로서 타자와 관계 맺기이다. 여기서 흔히 강조되는 것은 타자를 이해하는 밑거름으로서 공감 능력이다. 윤석열은 이러한 공감 능력의 결핍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좀 더 분석적으로 보면 그의 행동은 공감의 역설이라는 용어에 의해서 더 잘 해석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오랫동안 부족 단위의 소수 공동체에서 살면서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을 구분해 왔다. 자연스럽게 내집단 구성원에게는 강한 공감과 연대 의식을, 외집단 구성원에 대해서는 차별과 배제 및 적대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내집단에 대해서는 공감의 과잉이 발생할 수 있고 외집단에 대해서는 공감의 심각한 결핍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를 공감의 역설이라고 한다. 윤석열은 자신과 가까운 집단에는 극단적으로 공감하는 반면, 반대 집단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의 공감 범위는 아내와 몇몇 측근에 한정되어 있다. 한마디로 석기 시대 부족민인 셈이다. 그의 아내에 대한 끝도 없는 헌신과 추종은 이런 부족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런 태도를 희화화하여 ‘아내를 위해서 계엄까지 해 보았다’라는 말놀이까지 SNS에 유통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그의 과도한 공감 편향은 결국 내집단을 지키기 위한 비상계엄과 같은 극단적 조치로 나타났다.

 

이처럼 협량(狹量)한 공감 능력은 위험하다. 공감이 내집단을 넘어서 타자와 사회 전체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정서적 공감뿐만 아니라, 인지적 공감(cognitive empathy)과 공화주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감정적 연결고리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지적 공감을 통해 타자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공감의 확장을 위해서는 공화주의적 사고가 요구된다. 공화주의적 사고는 ‘나와 너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의 목표를 공유한다’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분을 초월하게 한다. 이것이 있을 때 비로소 공감의 범위는 좁은 범위를 넘어서 사회적 연대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교육은 경쟁과 파편화를 부추기고 협력적 공감과 연대 의식을 길러주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수많은 내집단들의 파편화된 섬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는 갈등 공화국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현실은 우리 교육의 근본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으로서 윤석열의 실패를 생각해 보자. 비상계엄 사건은 민주적 가치와 절차적 다원성을 이해하지 못한 대통령의 리더십 실패를 극명히 보여준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다양한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것이 대통령의 책무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완전히 반대로 갔다. 그는 사회적 갈등을 극단화하고 폭력으로 반대자를 제압하는 비상식적 통치 행위를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만이 아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을 드러낸다. 우리 편이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생각을 우리 사회의 적잖은 시민들이 지니고 있다. 이것이 윤석열을 대통령까지 밀어 올린 집단 의지이다. 따라서 현 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대통령을 내쫓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공의 장에서 살아가는 시민이자 주권자들에게는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가치와 절차를 뼛속 깊이 내면화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동안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 등이 소개되고 강조되어 왔다. 논쟁적 사안은 논쟁적으로 다루어져야 하고, 학생들은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나는 겉으로는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논쟁적인 이슈를 신념과 확신에 기반해서 주장하고 실천하는 경우를 적잖이 목격했다. 이런 의식과 행동의 이중성은 쉽게 간파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심층 모순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종종 극단주의자들에 의해서 포획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와 유사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끼리만 SNS에서 소통하니 이런 현상이 더 강화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원적 가치와 신념의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가 깊게 뿌리내려야 한다. 논쟁적 문제를 논쟁적 문제로 제대로 다루고, 민주적 대화와 절차적 해결을 정착시키고, 다원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협력과 연대와 공존의 길이 열릴 것이다. 대통령 윤석열의 실패는 시민으로서 주권자로서 우리 모두의 실패를 말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시민교육의 일상화를 요구한다.

 

지금까지는 나는 윤석열 대통령을 사례로 하여 우리 교육의 심각한 결함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요람에서 시작하여 사회인으로 그리고 공적 주체로 성장하는 여정과 관련된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교육의 방향은 인간 실존의 기초로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행복감과 내적 안정감을 형성하는 자존감 교육(1단계), 사회적 존재로서 공감과 연대의 범위를 확장하여 내집단-외집단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기르는 공감 교육(2단계), 시민이자 주권자라는 공적 존재로서 자유와 공정의 가치 및 절차적 다원성을 존중하면서 상호 공존하는 사회를 향한 실천적 능력을 배양하는 협의의 민주주의 교육(3단계)로 나눌 수 있다. 넓게 보면 민주시민교육은 이 모든 단계를 포괄한다.

 

교육의 실패와 재구축에 대한 논의는 물론 나의 논의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교육을 통해 윤석열과 같은 대통령의 탄생,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우리 사회의 집단 의지와 욕망을 성찰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새길을 함께 열어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서 시작하여 민주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교육적 실천의 길이다. 경쟁과 파편화된 교육을 넘어 모든 존재가 존중받으며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위한 교육으로 나아가는 기회의 창을 함께 열어 가자.

 

2024년 12월 11일

 

 

[출처 : 교육공동체벗 https://communebut.com/story/?bmode=view&idx=132673539&back_url=&t=board&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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