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루돌프 슈타이너는 누구인가? (7)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

루돌프 슈타이너는 누구인가? (7)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7. 18. 16:53

9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지학이란, 우리가 살면서 정신과 영혼에 대한 자각을 통해 신지학, 곧 최고의 지혜를 에워싸기 위해 나아가는 바로 그곳에서 출발하고, 또 항상 그곳을 포함하는 통로이다. 이런 '인간에 대한 관점'은 슈타이너의 일생에 걸쳐 관련이 있으며, 질적으로 다른 여러 단계에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단계는 그가 문화운동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던 세력의 점진적 발전에 공헌했다.

 

 

1861-1883: 준비

 

슈타이너는 자연과 기술(그의 아버지는 철도회사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가톨릭 성당에 둘러싸여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정신세계의 실재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아홉 살 되던 해에 그는 자살한 먼 친척의, 육체를 떠난 영혼과 조우했다. 이는 지극히 중요한 경험이었다. 기하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을 깊이 공부하면서 그는 사유의 경험을 통해 정신세계의 우위에 대한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 그가 관여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 것은 물질세계였다. 그러나 그가 이를 극복하자마자 '외부의 정신적 영향'은 그에게 새롭고 중요한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첫째,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시간의 개념에 대해 완전한 이해를 얻었다. 이 지식은 내 연구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정신적인 삶에 의해서만 인도된 것이었다. 나는 역행하는, 초자연적인 아스트랄적 진화가 있으며 이것은 순행하는 진화를 간섭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러한 지식은 정신적 통찰력의 전제 조건이 된다.”*

 

* 루돌프 슈타이너, 〈서간 서류집〉(Rudolf Steiner Press, 1988), 9쪽.

 

두 번째로 “M. [Master: 스승]의 대리인과 알게 되었다." 대리인은 늙은 약초수집상 펠릭스 코굿스키(Felix Kogutski)로서, 빈에서 약용 식물을 수집하여 판매하는 남다를 것 없이 평범한 사람이었다. 슈타이너는 그와 정신세계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코굿스키는 정신적 체험을 지닌 사람이었다. 신앙심이 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숨겨진 세계들로부터 나오는 목소리"의 대변인일 뿐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코굿스키는 슈타이너에게 자연의 비밀로 들어가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는 등으로 약초 꾸러미를 져 날랐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자연의 정신에서 얻은 것의 결실들을 운반했다.”

 

세 번째로, 코굿스키와의 만남은 스승과의, 또 다른 좀더 신비로운 조우로 이어졌다. 이 스승에 대해 슈타이너가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종종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의 영으로 이야기된다. 이 스승으로부터 슈타이너는 현대의 '과학적' 의식에서 출발하여 정신적 인식으로 가는 다리를 놓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1884-1900: 철학적, 문화적 기반

 

이 기간 내내 슈타이너는 (다양하게 혼재된) 물질주의자, 실증론자, 그리고 칸트학파로 대변되는 지배적 패러다임에 맞서 철학적 대안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문화적 주류 안에서 활동했다. 이 기간에 이루어진 그의 활동에는 세 가지가 명백한 영향(그리고 한 가지 은밀한 영향)을 끼쳤다.

 

괴테는 세계―대개 주관적이고 내적인 경험과 객관적이고 외적인 실제 경험으로 나뉘는―를 정제되고 선입견 없는 사유를 통해 전체로서 직관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이는 슈타이너 자신의 경험이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사유를 통해 자신이 “정신적 실재로서의 세계 안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경험으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그 첫째는 칸트 학파의 믿음과는 반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인식)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 세계는 물질적이며 물질로부터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정신으로부터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괴테의 해석에 새로운 세계관의 기반을 덧대는 일과, 철학자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괴테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성립될 수 있는 새 방법과 실천에 대해 “온전한 철학적" 설명을 시도하는 일은 사뭇 달랐다. 같은 기간에 슈타이너는 중요한 인식론적 저서 두 권, 〈진리와 과학〉과 〈자유의 철학〉에서 이러한 기획에 착수했다.

 

슈타이너가 스스로 규정한 임무는 그가 말한 대로 “칸트의 불건전한 신념”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칸트는 “우리의 감각과 이성 너머에 놓인 사물의 근본이 ...... 우리의 인식 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인식과 경험의 일반적 형태에 제한돼 있다고 주장했다(그리고 그는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물자체'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는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의식의 틀이 변화하고 이로 인해 온 세상이 바뀌는 체험임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사유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알아내기 위한 사유의 근본적인 조사에 기초를 두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를 〈진리와 인식〉 서문에 아래와 같이 서술한 바 있다.

 

진리는 보통 가정하는 것처럼 실재하는 어떤 것의 이상적인 반영이 아니라,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 창조되는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이 산물은 우리 스스로 창조하지 않았다면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식의 목적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개념적 형태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감각 세계와 결합하여 완전한 실재를 구성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최고의 활동, 그 정신적 창조는 보편적인 세계 과정의 유기적인 부분이다. 세계 과정은 이러한 활동 없이 완전한, 잘 싸여진 총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진화와 관련하여 인간의 참여 없이 일어나는 우주적 사건을 그냥 심상으로 되풀이만 하는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다. 인간은 세계 과정에서 능동적 공동 창조자이며, 인식은 우주라는 유기체 안에서 가장 완벽한 연결고리가 된다.**

 

** 루돌프 슈타이너, <진리와 인식〉(Truth and Knowledge, Steinerbooks, 1963), 11쪽.

 

이러한 견해는 슈타이너가 실재에 대한 인지학적 접근의 기반이자 원천이라 하여 평생을 두고 반복하여 되돌아간 <자유의 철학〉에 아주 충분히 드러나 있다. 슈타이너에게는 이것이 첫 번째 미카엘 책ᅳ그가 1879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한 천사장 미카엘의 새 시대에 관한 첫 책ᅳ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지식 이론에 관한 정보나 단순한 합리적, 논리적인 설명을 담은 책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책이었다. 오늘날의 명상 교과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이것을 두고 명상을 하면 당신은 저자가 했던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신은 사랑 안에서 자유와 참 '나'의 일치를 경험할 것이다. 당신은 세계 진화에 대한 당신의 창조적 참여와 도덕적 책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를 두고, 슈타이너는 역사의 지평에 처음으로 나타난 진실로 독립적이고, 비지성적인 사유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새로운 사유'가 이 시기 그의 연구에 나타난 두 번째 방향이었다.

 

괴테와 철학에 열중하는 것 이외에, 슈타이너는 이 기간에 문화적 아방가르드 생활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젊은 여류시인 마리 오이게니 델레 그라치에(Marie Eugenie delle Grazie)의 객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 속에서 당대 가장 진보적인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젊은 오스트리아 시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도 자주 나갔다. 밤에는 급진적인 '바그너 학파' 사람, 신지학자, 신비주의가와 온갖 파벌의 정치 사상가가 모여 있는 카페들(특히 그리엔슈타이들 카페)에 앉아 연구를 해나갔다. 누군가 그곳 분위기를 묘사했다면 아마도 '니체 철학적'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므로 그가 문화에 기울인 심혈이 괴테적인 면모와 좀더 엄격한 철학적 면모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니체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슈타이너는 바이마르의 괴테 기록보관소에서 연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니체 기록보관소에서 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의 <니체: 자유의 투사〉나 1899년 논고 〈철학 속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에서 이러한 연구의 결실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글들은 슈타이너의 저술 중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이러한 개방적인 삶의 기간을 추단하기에 알맞은 종류들이다.

 

*** 루돌프 슈타이너의 〈철학 속 개인주의>(Individualism in Philosophy, Merculy Press, 1989) 참조.

 

이 기간 내내, 가끔은 열정적으로, 또 가끔은 덜 열정적으로, 슈타이너는 신비주의와 신지학 모임 등에 호의적인 발길을 하였다. 그는 또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심령술, 초(超)심리학, 그리고 최면술의 최근 발달을 주시하였다. 그가 이러한 영역들에 접할 수 있도록 해준 이는 그리엔슈타이들 카페에서 만난 프리드리히 에크슈타인(Friedrich Eckstein)이었다.

 

슈타이너와 같은 나이의 에크슈타인은 바그너 학파였고 채식주의자였으며 상징주의 철학가, 연금술사이자 음악가였다. 그는 신비주의에 관한 한 슈타이너의 첫 번째 외부 스승이었다. 슈타이너는 1890년에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두 가지 사건이 있네. 첫 번째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두 번째는 자네를 알게 된 일이네.” 그들은 비의(秘儀)의 질문들에 대해 논의하고 비교 서적을 함께 탐독했다. 슈타이너가 그 방면에 대한 질문이 생기면 에크슈타인에게 가져갔다. 사실 에크슈타인은 1887년에 블라바츠키 부인을 방문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당연히 슈타이너와 에크슈타인은 특히 신지학적 물음에 대한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실제로 에크슈타인은 자신이 슈타이너에게 <비밀교의 The Secret Doctrine〉를 전수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에크슈타인이 슈타이너에게 신비주의를 전한 일이다.

 

슈타이너는 에크슈타인을 통해 당대를 주도했던 빈의 신비주의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러한 모임은 종종 마리 랑 (Marie Lang)의 객실에서 이루어졌으며, 나중엔 오스트리아 여성운동 지도자 로사 마이레더(Rosa Mayreder, 슈타이너의 또 다른 친구)도 함께하였다. 이 모든 것이 외적으로는 철학자이자 문학자였던 루돌프 슈타이너가 내적으로는 처음부터 분명히 신지학과 인지학의 정신적인 연구를 지향하며 노력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