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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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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련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10. 4. 22:09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리 시대에 가장 만연된 폭력의 형태 중 하나는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이상주의자들이

비폭력적 방식으로 폭력에 굴복하는 것,

즉 행동지상주의와 과로이다.

몰아닥치고 내리누르는 삶의 방식이

우리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그리고 가장 흔한 형태의

삶의 방식일 것이다.

수많은 갈등과 문젯거리에

정신을 잃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

너무 많은 주변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는 것,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프로젝트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것,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을 도우려고 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행동지상주의자의 이러한 광기는

평화를 위한다는 그의 일을 중화시키며

그의 일이 열매 맺지 못하게 한다.

그 광기가,

일을 열매 맺게 하는 내면의 지혜를

그 뿌리부터 죽이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작가이자 성직자로 유명한 토마스 머튼은 위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현대 생활이 주는 분주함과 압박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향한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저 글을 읽었을 때 저는 알 수 없는 감동과 함께 심리적 저항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냐?’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쏟아지고 사건은 무수히 터지는데 일할 사람은 없는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마음이었지요. 하지만 저 말은 죽비와 같이 냉엄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많은 활동가의 내면이 그가 꿈꾸는 이상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하루에 단 10분, 아니 5분이라도 투자하여 고요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위해 일한다는 마음이 과로에 시달려 고요함을 잃을 때 일의 의미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훌륭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해도 과정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것이 세상을 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내가, 우리 각자가 온전히 존재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기주의가 하나의 극단을 향해 있다면 이타주의 역시 반대편의 극단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주함과 압박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대체 누가 그 일을 하는 것일까요?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나 자신을 잘 지켜내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와는 다른 일입니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가리켜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 저마다가 세상에 둘도 없는 고유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이렇게 고유한 나 자신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 살아 있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한 번의 리듬이 우리의 실존이며 인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호흡을 잃는다는 것, 숨이 거칠어지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실에서 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우리는 단 5분이라도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5분의 시간이 짧을 것 같지만 고요하게 앉아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생각과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 동안 벌어졌던 많은 일,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 자기 자신을 꾸짖는 소리, 앞으로의 계획과 아이디어, 온갖 자질구레한 걱정과 근심 등등이 컵에 담긴 흙탕물처럼 가라앉을 줄 모릅니다. 이럴 때는 굳이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끄달려 가기보다 마음 속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편안하게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러한 훈련은 ‘나 자신’과 내가 떠맡고 있는 삶의 짐을 뒤섞는 행위를 멈추고 거리를 두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내적 고요함을 잃을 때 우리는 쉽게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명상은 그러한 양극단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내던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매몰되는 것도 아닌 중도를 찾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잠시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어지러운 우리 의식이 고요하게 가라앉으면 내면의 지성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밝게 비추어주는 것입니다. 훈련이 된다면 걸을 때, 설거지를 할 때, 동료들과 회의를 할 때, 아이들을 돌볼 때도 호흡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거지요. 명상은 그러한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여기에 내가 온전히 살아있도록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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