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혼, 지성혼 그리고 의식혼 (2) - 젠녹
감각혼, 지성혼 그리고 의식혼 (2)
젠녹 선생님 강연
김훈태 정리
어제 질문을 던졌지요. 우리는 어린이들의 삶의 동력을 찾아 줘야 하는데 이것은 곧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동력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아이들의 삶의 동력은 우리를 뛰어넘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옛날 세대인 우리가 아이들의 그러한 작업을 돕는 데에 과연 적합할까요? 이것에 대해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지, 사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있는데요. 여기에 간단한 조언이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그것이 아주 창조적이고 생동감 있는 활동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이해하는 것 자체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이가 스스로 자기의 상태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학령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기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게 교사들의 역할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종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그리고 아주 자세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아주 예술적인 작업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예술적인 형태가 있다면, 거기에서 우리의 의식 활동이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과정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아주 협소한 사고를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고정관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내가 어떤 뜻을 전하고 싶은데 상대방이 전혀 이해를 못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방이 이미 형성된 사고의 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도 마찬가집니다. 상대방이 뭘 전해 주려는데 제가 잘 이해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아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어제 질문했던 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교사로서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태도는 우리의 사고가 항상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슈타이너는 강조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생각을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생각을 관찰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혼의 상태를 발전시킨다면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제 했던 영혼의 상태를 다시 그린다면, 감각혼의 특성은 호감과 반감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우리 영혼의 상태가 이것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가서 오직 호감만 갖고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감을 갖고 있는 친구들과 작업할 수 있을 것이고, 나와는 맞지 않는 아이들과는 작업을 할 수 없겠지요. 슈타이너는 인류사의 전체에서 본다면 감각혼의 시기가 수천 년 동안 유지되면서 발달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감각혼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습니다. 감각혼에 더해 지성혼의 힘이 작용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낯설거나 수수께끼 같은 아이들을 만날 때도요. 우리의 이해를 통해서 아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분석하고 따져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혼은 대상에 대해 분석하고 묘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많은 정보가 있지만 지성혼만 가지고는 그걸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혼의 힘은 외부에서 아이나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외부에 머물러 있는 관점입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이 많은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또 이 아이는 두려움이 많은 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지성혼의 능력은, ‘그렇다면 이 아이의 두려움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전의 경험 속에서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두려움을 갖는 걸 관찰했고, 두려움을 갖는 이유를 관찰했고,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것이 지성혼의 능력입니다. 하나의 관찰은 그 문제의 원인이 되고, 다른 관찰은 결과가 됩니다.
지성혼의 능력은 원인을 제공한 A와 그 결과인 B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A -> B. 오늘날 가장 두드러지는 상태는 바로 이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경험합니다. 호감이 갈 때도 있고, 반감이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지? 아, 원인이 이거니까 해결할 수도 있구나.’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통해 사고하며 살아갑니다.
농업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화학비료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그것을 들여다보면 화학비료란 놀라운 관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물에게 뭐가 필요하고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들에 있는 식물에게 이런 것들을 공급합니다. 수십 년 동안 이런 작업이 이루어질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땅은 병들어 갑니다. 감각혼과 지성혼까지 왔을 때 우리는 많은 걸 이해했다고 보지만 새로운 문제가 노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환경도 살펴봅시다.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잘 키워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키웁니다. 아까와 똑같은 원리로, 아이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교과과정을 만듭니다. 그것을 통해 아이들을 키워 세상에 내보냅니다. 우리는 교사들로서 다 이렇게 했지요. 그런데 삶을 위해 아이들이 잘 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 아이들은 상당히 지쳐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생각하기로는 이 세상과 작업들에 대해 이해하고 관찰했다 여기지만, 사실은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은 항상 개별적이고 분절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분절된 것들을 관찰하여 우리의 의식을 형성합니다.
오늘날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이러한 사고에 의해서 생긴다고 봅니다. 왜냐면 아주 복잡한 문제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절하여 부분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발도르프교사들도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사고의 패턴을 가지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도 새로운 사고를 형성해야 합니다. 아마 선생님들 중에 ‘어제 우리가 다 했는데... 또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이해했어’ 이것 자체는 지성혼의 단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의식혼의 특성을 내면으로 가져와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해바라기를 통해서 관찰했습니다. 지성혼의 단계에서는 항상 외부에서만 관찰합니다. 여러분은 각각의 부분을 자세히 관찰했지만 그 부분들은 하나의 전체이고 전체적으로 작용함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이 된 사진을 보고 거울로 또 내 모습을 봅니다. 사진과 거울의 형상을 비교해 봅니다. 사진의 모습도 나이고, 거울의 모습도 나이며, 다르지만 같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의 모습, 현재의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습도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오로지 현재의 상태만 주목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과거의 사진이나 자료를 통해 과거를 떠올리는 작업을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과거는 이미 동떨어진 것입니다. 한 살 때가 존재했지만 이미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분들이 어디선가 경험을 함께 한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러한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미래에도 존재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미래에 존재할지는 잘 모릅니다. 오로지 현재의 좁은 현실만 있습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존재는 현재만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전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의식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슈타이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얘기했을 때, 과거? 중요하지 않아. 미래? 중요하지 않아. 나에겐 현재만 중요해. 이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발도르프교사의 자격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발도르프교사는 전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불확실하거나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요. 이러한 관심과 태도가 우리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의식과 사고의 형성은 한 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한 아이를 관찰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전체적인 모습을 획득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앞에 있는 특성들을 다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포함하면서 전체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존재의 본질을 우리의 의식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작업이 의식혼의 영역입니다. 이러한 특질이야말로 우리 교사회에서 서로의 의견을 함께 조율해 나가는 능력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교사회에서 아주 뜨거운 주제를 갖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급하게 진행하려는 사람이 있고 격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그 상황에서 우리가 감각혼의 특성만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가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겠지요. 그러면서 자기 편을 만들어서 ‘좋아. 우리는 한 편이 되었어!’라고 합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똑같은 패거리를 만듭니다. 이제는 패거리와 패거리가 충돌합니다.
지성혼의 영역에서는 자기가 왜 정당한지 이유를 찾습니다. 내가 왜 옳은지를 찾습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패거리도 정당한 이유가 있고, 저 패거리도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슈타이너에게도 항상 이런 문제가 교사회에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위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인데, 지금 여러분의 수준은 아주 바닥에 있습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슈타이너가 패거리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옵니다. 당시에는 슈타이너가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권위와 역할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슈타이너를 지금 모셔올 수는 없고, 우리 스스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오늘날은 여러 패거리 중에서 누가 더 정당한 게 아니라 더 강하기 때문에 해결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좀더 강력한 패거리가 이끌어나갑니다. 그렇지만 강력한 패거리라고 해서 정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작은 패거리 또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원하지는 않지만 큰 패거리에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 두 사람 나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다른 지점으로 간다면 전체를 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쪽과 저쪽의 양극단이 아닌 제3의 새로운 지점에서 전체를 바라봤을 때는 양쪽 입장을 다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관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런 작업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사회와 교사회를 치유하면서 통일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고, 이것을 통해 우리의 의식혼을 발달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제부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사에서도 이런 과정을 지니고 있으며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과정의 방향을 본다면 의식혼까지 발달하면서 사랑이라는 원리가 우리 내면을 지배하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이 작업이 아주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한 이유는 단지 여러분들에게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제 본인에게도 얘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작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작업해야 할 내용을 위해서 정확한 도구를 하나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리를 두면서 관조하고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필요합니다.
교사로서 우리는 아이들을 맞이합니다. 빛이 나고 똘망똘망한 아이들이 옵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요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가면 어떨 때는 그러한 행복감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해야 할 일이 책상에 가득 쌓여 있습니다. 밀려 있는 일들이 잔뜩 있지요. ‘이거 나 오늘 못할 것 같아. 나 기운 없어.’ 이러는 중에 동료 교사가 못마땅하게 쳐다봅니다. 아까 묘사한 아이들을 만났을 때는 호감이 작용합니다. 교무실에 올 때는 반감이 작용합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요. 그 다음에는 이유를 찾습니다. 내가 왜 행복감이 들고 반감이 들까? “나는 정말 동료를 이해하고 싶고 얘기를 듣고 싶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이해를 못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감과 불행감이 교차하면서 완전한 만족감을 못 느낍니다. 계속해서 불행한 마음이 이어집니다.
만약에 의식혼의 지점에 오게 된다면, 항상 힘들고 화가 나는 동료가 있다고 해도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나의 의식 상태에서 이 사람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왜 내가 이 사람과 힘들어하는지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를 원하면서 내 의식 안에 얼마만큼 형성되었는지 보면서 사랑의 원리로 돌이켜봅니다. 나의 의식 상태를 보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이 사람이 “당신이 화를 냈다. 당신이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성혼까지의 단계입니다. 의식혼의 지점에서는 ‘상대방의 화라는 것은 나에게서 온 것이다. 저 사람이 화를 낸 것은 약해진 내 영혼의 상태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화를 낸 것을 상대방에게서 원인을 찾고 지적하기보다, 내 안에 있는 화를 풀기를 원하는 것이다.’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당사자가 결국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방도 해결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서만 말했지만 이런 상황은 우리 삶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계속 이런 의식혼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을 강화해나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외형적인 것, 상대방을 바꾸려고 노력해왔다면 이제는 나의 내면적인 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아주 신비롭게도 이 세상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와 만나는 다른 사람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사로서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돼주어야 합니다. 교사 스스로 변화할 때 아이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