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공동체로 거듭나기 - 루돌프 슈타이너 (1) 본문
공동체로 거듭나기
1923년 3월 4일 도르나흐
강연 | 루돌프 슈타이너
번역 | 김광선
오늘 저는 제가 슈투트가르트에서 했던 두 번째 강연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강연에서 제가 했던 말들을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며 슈투트가르트 컨퍼런스 자체에 대해에서도 언급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강연의 목적은 왜 우리와 유사한 사회에서는 일어나면 안 되는 일들이 삶의 정신적 관점을 토대로 한 사회들의 역사에선 왜 그렇게 흔한 현상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러한 사회들은 항상 존재해 왔고 그 시대에 적응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차원적 인식을 세우기 위한 힘에 가세하려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 중의 하나는 구성원들 간의 형제애를 고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처럼 그러한 사회들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소위 영성을 토대로 한 사회들 안에서 가장 심각한 불화와 형제애의 생성에 역행하는 최악의 공격이 이루어져 구성원들 사이의 형제애가 너무 쉽게 깨지곤 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지학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인지학협회는 그러한 반-형제애적 행태로부터 완전히 보호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지학은 항상 제대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형제애가 파괴되는 이유를 밝힌다면 인지학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제 꺼낸 이야기를 다시 상기해 보는 것으로 시작해 봅시다. 저는 세 가지의 의식 수준; 일반적인 깨어 있는 의식, 꿈을 꾸는 의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 없이 잠자는 의식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상의 체험으로 꿈의 그림을 갖습니다. 인간이 꿈을 꾸는 동안, 자신의 꿈이 현실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고,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 물질세계에서 경험하는 것과 똑같이 생생한 사건을 꿈에서도 경험합니다.
하지만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꿈속에서의 경험과 깨어 있을 때의 경험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꿈꾸는 자는 자신의 꿈속 체험 안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저는 또한, 다른 사람이 그 사람 옆에서 자면서 매우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꿈속 세상을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열 사람이 한방에서 잔다고 해도, 각각은 자신의 세상만을 만납니다. 이는 굉장한 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정신과학자들에겐 놀라운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꿈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순수하게 개별적인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꿈은 물질세계로부터 빌려온 그림으로 둔갑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에도 지적했듯이 그 그림들은 단지 외적인 포장일 뿐입니다. 진실은 - 꿈에도 진실이 있습니다. 다만 -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그림 뒤에 숨어 있습니다.
꿈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정신과학적 측면에서 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그림들 자체보다는 꿈 안에 흐르는 극적인 요소들을 연구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꿈의 장면을 보면, 다른 이는 완전히 다른 장면을 봅니다. 하지만 둘 모두에게 기어오르는 체험 또는 절벽의 끝에 서 있거나, 또 어떤 위험이 닥쳐오다가 마지막으로 긴장이 완화하는 체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미지로 감춰진 그 꿈의 극적인 과정입니다. 드러나는 이 드라마는 종종 전생의 체험에서 비롯되거나 미래의 육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 삶 속의 운명의 실타래를 푸는 것이며 - 뛰어가는 것은 아마도 계속되는 육화를 통해 - 꿈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아와 아스트랄체와 함께 자신의 몸 밖에 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여러 생을 걸쳐 지니게 된 자아와 그가 지구에 내려오기 전에 살아 경험했던 모든 것과 사후세계에서 발견하게 될 모든 경험을 품은 그의 아스트랄체로서 그의 몸 밖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잠잘 때 우리는 또한 우리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로부터 분리됩니다. 꿈은 아스트랄체가 다시 에테르체와 합쳐질 때 또는 분리되는 순간에 그림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꿈은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꿈이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에도 거기에 존재합니다. 이는 그가 그 순간에 오로지 자기 일에만 빠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가 깨어나면 다시 자기 주위 사람들과 공통 관심사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열 명의 사람이 한 방에 있다면, 각각의 세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방의 내부가 모두의 공통 세계가 됩니다. 사람들이 물질세계에 함께 있을 때는 공통의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제 저는 인지학이 제공하는 인간에 대한 지식, 즉, 진정한 초감각적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의식이 깨어나야 함을, 의식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의식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잠을 잘 때 일반적으로 생겨나는 그림 의식이, 깨어 있을 때도 물질세계의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럴 때가 실제로 있습니다. 인간 유기체에 문제가 생겨서 어떤 사람이 물질세계를 꿈의 삶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그림 속 삶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비정상적 정신 상태라고 불리며 물질체 또는 에테르 체의 어떤 질환에 의해 생겨납니다. 그러한 질병을 앓는 사람은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단절하여, 마치 자는 상태가 됩니다. 그의 아픈 유기체는 그러면 자신의 몸에서 일반적으로는 꿈에서 나타나는 그림이 생성되게 만듭니다. 물론 이러한 질병은 정상적인 영혼 활동에 큰 지장은 없는 정도에서, 진짜 심각한 정신병적 상황까지 그 정도가 다양합니다.
꿈꾸는 의식 상태를 일반적인 물질세계로 가져오는 사람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한 경우에 그는,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관계가 자기 옆에서 자는 사람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고립시켜서, 그의 의식은 남들과 나눌 수 없는 뭔가에 잠겨 있습니다. 이는 그가 모든 책임을 질 수 없게 하는 특별한 이기주 의를 만들어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의식하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공통적 삶으로 이끌려, 공통적인 인상을 받게 되고 그것은 공통적인 사고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일상적인 지상의 삶으로 자신의 꿈속 의식을 투영하게 되면, 그는 자신을 고립시키고, 이기주의자가 되며, 자신의 동료들은 접근할 수 없는 자기만의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각자도 아마 이러한 꿈속 삶이 현실 삶으로 넘어와 사람들을 잘못 인도했던 어떤 이기주의적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전일적인 길에서 벗어나는 유사한 일이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예를 들어 인지학적 진리가 공부되긴 하지만, 어제 제가 언급한 그러한 발전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 영혼이 깨어나 다른 영혼들을 어떤 높은 단계에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렬하고 고차적 경험의 느낌 속에서 만납니다. 그렇게 되면, 물질세계에서 올바른 자기-발견의 상태가 자신이 파악한 정신세계로 투영됩니다. 누군가 자신의 꿈꾸는 의식을 물질세계에 투영함으로써 이기주의자가 되듯이, 물질세계에 적절한 정신적 상태 또는 마음을 고차세계에 가져가려는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실제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센세이션을 향한 욕구가 인간에게 물질체에, 에테르체에, 그리고 아스트랄체가 있어서 반복되는 지상에서의 삶과 카르마가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실들 또는 물질적 현실에 대해 말하듯 그것들에 대해 전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를 인지학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서 매일 봅니다. 일반적인 과학자들은 인지학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의 꿈속 그림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이 방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고 인지학 강연이 행해졌는지가 내 꿈에 나타난다면 믿겠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얼마나 황당한 태도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것은 누군가 인지학적 진실을 듣고는 물질세계에만 적용되는 일반과학이 증명할 수 있어야 믿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 완전히 투명하게 되기 위해서는, 더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공부에 임해야 합니다.
자신의 꿈 개념을 물질세계 상황에 투영하며 이기 주의자가 되는 것만큼 고차세계에 필요한 개념을 일반적 삶에만 적용하려 하며 고립되고, 자기 안으로 빠져들거나,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기주의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학의 특별한 요소를 찾습니다. 자신들의 인생관 안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 또는 그 안에서 발견된 요소들이 진실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물질세계에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인지학이 증명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물질세계에 적용되는 의식 수준을 초감각적 세계로 가는 길에 가져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형제애적인 관념에도 불과하고, 물질세계에서 꾸는 꿈속 사람이 이웃에게 가장 반-형제애적으로 행동할 수 있듯이 반-형제애적 요소가 생겨납니다. 그 이웃이 상식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에도 꿈꾸는 자는 그의 꿈 그림의 영향으로 "넌 멍청한 놈이야, 난 너보다 아는게 더 많아"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유사하게 누군가 자신의 초감각적 세계의 개념을 물질세계의 삶에서 가져가 만들어낸 사람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동료에게 “넌 멍청해, 나쁜 놈이야”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자가 반-형제애적 정신을 없애는, 형제애가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정신세계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다른 느낌의 방식,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지학의 본성은 그러한 형제애를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이며, 특정 종파가 되지 않으면서 물질세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정신적인 것을 토대로 한 사회들에서 왜 그렇게 반-형제애적인 요소들이 튀어나오는지 그 이유를 안다면, 그는 또한 초감각적 세계의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일하려는 사람들 각자의 영혼적 태도의 거듭나기를 통해 어떻게 그러한 위험을 피할 수 있는지도 알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그들이 “내가 꿈을 꾼 후에 내가 본 것을 믿겠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며, 인지학을 소개하는 말에 불쾌감을 느끼며 인지학을 공격하는 이유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를 들면, 저의 책에 사용된 인지학적 이야기들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합니까? 중요한 점은 초감각적인 지식을 소개하는 경우에 토론의 내용이 달라야 하는 것뿐 아니라, 토론의 방식 또한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지학을 이해하려면 다른 의식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깊이 느낀다면, 인지학은 여러분의 삶에 많은 열매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인지학은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영혼적으로 체험되어야 하지만 각자의 전체 영혼의 발달과 성격에 도움을 주며 그러한 도움은 물질세계가 꿈꾸는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종교적, 예술적, 그리고 지적인 효과를 물질세계에 주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수준의 현실을 다루고 있는 것인지만 분명히 하면 됩니다.
꿈꾸는 자는 자신의 자아와만 관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거나 특별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습니다. 꿈 속 그림 뒤에서 하는 우리의 행동은 우리 자신만 관련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카르마와 관계합니다. 꿈속에 어떤 그림이 나타나든지 간에 그것은 자신의 카르마 뒤에서 자신의 영혼, 자신의 자아가 작업을 합니다.
물질세계에서 우리는 신체에 스며든 인류와 관계된 것에 관여합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의 발전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합니다. 정신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같은 지적 존재들과 함께 일하는데, 물리적 몸을 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요소, 정신적 물질 속에서 일합니다. 그것은 초감각적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다른 세계이며, 각자는 그 세계에 적응해야 합니다.
(이어서)
[출처 : 발도르프교육 2021년 봄/여름호 https://www.waldorfedu.kr/menu01/%ec%97%b0%ed%95%a9%ec%9e%90%eb%a3%8c/]
* 약간의 교정 및 윤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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