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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루돌프 슈타이너가 스웨덴을 방문하다 - <힐마 아프 클린트 평전> 중에서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

루돌프 슈타이너가 스웨덴을 방문하다 - <힐마 아프 클린트 평전> 중에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7. 3. 20:08

루돌프 슈타이너가 스웨덴을 방문하다

- <힐마 아프 클린트 평전> 중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의 첫 편지가 1908년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도착했을 때, 그 편지는 수많은 편지 중 하나였다. 화가보다 겨우 한 살이 더 많은 검은 머리의 가냘픈 남자인 슈타이너는 신지학 신봉자들의 새로운 스타로 통했다. 그가 매일 받는 우편물에 답장하는 일만으로도 모든 시간을 들여야 했을 테다. 하지만 그런 서신 교류를 제외하고도 학자이자 순회 강연자인 그가 처리해야만 할 일의 양은 비인간적일 정도로 많다. 거의 매일 그는 관중 앞에서 시대의 위대한 정신적 질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끔 하루에 두 번 강연하기도 한다. 강연을 받아 적은 글의 상당수가 그대로 독자적인 논문으로 발표되었기에 출간물의 홍수가 그 많은 일에 추가된다.

 

슈타이너의 대중적 성공은 놀라울 정도로 갑자기 이루어졌다. 그가 앞서 수십 년 동안 거두었던 성공은 커다란 대중의 관심 없이 비교적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수학과 자연과학을 전공한 후 젊은 가정 교사였던 그는 빈의 유대인 가정에서 심한 학습 장애를 지닌 아이를 가르치면서 놀랍게 발전한다. 그 이후 그는 바이마르에 살았으며, 괴테와 실러 문서 보관소의 협력자로 일하면서 몹시 힘든 세부 작업을 수행하고,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들여서 요한 볼프강 괴테의 자연과학에 관한 글을 발간했다.

 

아마도 튀링엔 주의 작은 마을인 바이마르에 사는 학자들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몹시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슈타이너의 생각과 재능에는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1900년 니체가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은 이 위대한 철학자의 변화하는 정신 상태를 중심으로 돌았다. 심신이 완전히 망가진 후 사람들이 그를 처음에는 나움부르크로, 다음에는 바이마르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주변 사람들을 우울증과 발작으로 긴장시켰다. 슈타이너는 1895년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존경받는 작가 니체에 관한 첫 번째 전기를 집필했다. 그는 그 전기에 『프리드리히 니체, 시대에 저항한 투사라는 제목을 붙였다.

 

마침내 슈타이너가 신지학에 가입했을 때, 그는 이미 마흔한 살이었고 그의 재능은 곧장 드러났다. 1902년에 그는 두 번째 아내 마리 폰 지베르스(Marie von Sivers)와 새로 설립된 독일 지회를 이끄는 임무를 맡았다. 그 이후 슈타이너가 신지학 협회 사무총장으로서 주관했던 회의들은 대규모 관중을 끌어들이고, 회원 숫자는 급증했다. 그가 갖고 있던 뚜렷한 예술적 형상 의지가 처음부터 일정한 역할을 했다. 강연 목록에서부터 강연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든 것에 형식을 부여하고, 스스로 각각의 형식을 생각해 냈다.

 

1908년 봄, 힐마 아프 클린트의 공책에 슈타이너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기록에 적혀 있듯 그녀가 연작 진화일곱 개의 별작업하던 중에 스톡홀름에서 열린 슈타이너의 강연 중 하나에 참석한다. 3월 30일 월요일 저녁 스웨덴 의사 협회의 우아한 강당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서 신지학자 슈타이너가 독일어로 세계의 수수께끼에 대한 괴테의 신지학적 대답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듣는다. 수요일과 목요일에 또 다른 강연들, 니벨룽의 반지에서 주도적인 사고비밀 전수라는 제목의 강연이 이어진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자신이 이전에 메모해 두었던 몇 가지를 물어보기 위해서 아마도 그중 한 강연이 끝난 후에 슈타이너에게 말을 건넸을 것이다. 그녀는 장미십자회와 접촉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슈타이너로부터 들으려 한다. 또한 그녀는 자기 작업이 이미 장미십자회 추종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를 문의했을 것이다. 비밀 결사체의 역사와 의미는 슈타이너의 전문 분야다. 뮌헨에서 그는 이미 그 주제에 대해 장미십자회의 신지학이라는 제목으로 연속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슈타이너의 대답은 아프 클린트의 공책에서 찾을 수 없다.

 

동시에 화가는 그 독일 학자에게 그림을 보여 주기 위해 그를 자기 아틀리에로 초대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테다.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공책에서 분명하게 알아낼 수는 없지만 슈타이너가 처음에는 다시 스톡홀름을 떠났고, 이어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몇 달이 지난 1908년 여름에 짧은 서신 교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프 클린트는 6월 26일 첫 번째 편지를 우체국을 통해 노르웨이로 보냈다. 슈타이너는 당시 여전히 크리스티아니아라고 불리던 오슬로에 있었다. 그는 노르웨이 신지학 협회와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자주 그곳에 손님으로 머물렀다.

 

편지는 짧고, 화가는 문장을 새로 시작하면서 매번 줄을 바꾼다. 그녀는 스톡홀름에서 통상적으로 편지에 쓰는 “매우 존경하는”이라는 말을 건너뛰고 곧바로 “슈타이너 박사님!”이라고 쓴다. 마치 길거리에서 서둘러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세우려고 커다랗게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곧장 첫 번째 문장에 적혀 있기를, 그녀가 4월 28일 전후로 “나의 지도자이자 스승님”에게서 최근의 그림들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신지학 협회 회원들과 협의한 후에 “(...) 당신이 크리스티아니아를 떠날 때, 혹시 스톡홀름을 거쳐서 독일로 가는 게 가능한지 물어보려 한다고 쓴다. “그 그림들이 너무 많기도 하고 크기 때문에 제가 당신이 계신 곳으로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여행 경비를 부담할 것이라고, 신지학 협회가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했다고 그녀는 약속한다. 편지는 오류투성이인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 그녀는 영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아마도 누군가가 번역을 도와주었을 것이다. 다음 문장에서 그녀는 곧바로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핵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슈타이너의 스톡홀름 방문을 몹시 원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나의 스승님들께서 슈타이너 당신을 내가 가는 길로 보내셨으며, 그건 스스로 내 작업을 이해하도록 당신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다음 달에 오슬로에서 답장이 도착한다. 몇 줄 안 되는 답장에서 슈타이너가 아프 클린트의 편지를 읽으면서 불신으로 눈을 비볐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를, 슈타이너를, 그녀, 힐마 아프 클린트에게, 보냈다고? 그녀의 스승들이?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도록? 독일 신지학 협회의 사무총장인 슈타이너는 그것을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당신이 당신의 스승을 완전히 신뢰한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의 경우와 관련해서 제가 무슨 일을 해야만 할지가 불분명하군요.” 그는 그렇게 알렸다. 그녀가 스승들의 지원을 받는 한 그의 도움은 불필요하다고 했다. 슈타이너는 자신이 모르는 정신적 조언자가 보낸 소식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지 않았다.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그는 교사다. 그가 화가에게 알려 준 것처럼 이런 역할이라면 대답을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신이 비의와 관련해서 제 조언을 구하는 것이라면, 제가 기꺼이 돕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화해하려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는 관계를 분명히 한 것이다. 누가 주는 사람이며, 누가 받는 사람인지를 말이다. 슈타이너 역시 영어로 썼으며, 편지에서 다음 세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게 과제를 주지 마십시오. No.Task.Me.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슈타이너는 노르웨이에서 돌아가는 도중에 힐마 아프 클린트가 원하던 대로 아틀리에를 실제로 방문한 것처럼 보인다. 그게 여름이었는지, 가을이나 겨울이었는지는 공책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다. 슈타이너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화가의 기록에도 그 만남에 대한 날짜는 쓰여 있지 않다. 물론 아프 클린트는 몇 년 후에 슈타이너가 그녀의 초기 영성주의와 연관된 그림 몇 점을 스톡홀름에서 보았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슈타이너가 하믄가탄 5번지의 건물 계단을 올라, 아틀리에 문을 열고는, 갑자기 거대한 화면과 강렬한 색채와 약동하는 형태로 가득 찬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어떤 일이 생겼을까? 그는 모든 것을 관통해서 흐르는 생명의 흐름을 느꼈을까? 장미와 백합에서 혹은 베스타신녀고행자에서 한 쌍의 존재를 알아차렸을까? 그는 자루 구멍과 갈고리를 이해했는가? 이 방문이 나중에 참고 문헌에서 매우 자세하게 언급될 전설적인 만남으로 전개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은 거의 없다. 자주 되풀이되는 일화에 의하면 슈타이너는 그녀의 그림이 50년 후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거라고 그녀에게 예언했으며, 그녀가 영매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비판했다고 한다. 또한 아프 클린트가 슈타이너의 언급으로 깊은 위기에 빠졌고 몇 년 동안 그림 그리는 것을 중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1908년에 힐마 아프 클린트는 실망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 슈타이너가 그녀의 그림이 반세기가 지나야 비로소 사람들의 이해를 얻을 거라고 언급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가 전혀 없다. 그녀는 만남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는데, 오히려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져야만 할 일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슈타이너는 그가 처해 있는 시간적 압박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했을 것이다. 어쩌면 슈타이너도 그 시기에 보통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었던 그림과는 전혀 닮지 않은 그림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말문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프 클린트가 차후에 대화를 새롭게 시작하려는 시도를 그만두도록 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녀가 1920년 슈타이너가 새롭게 문을 연, 인문학 교육과 연구를 위한 영성주의적 본부인 괴테아눔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도르나흐로 여행했을 때, 그녀가 기대에 차서 미리 느낀 설렘은 순수하다.

 

다시 1908년 하믄가탄 5번지에 있는 아틀리에로 되돌아가 보자. 아마도 아프 클린트와 슈타이너가 함께 그림을 보기 위해 만났을 때는, 모든 게 전반적으로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몇 가지 질문, 몇 가지 언급. 대화를 끝내려고 하는 헛기침. 비판도 없지만 칭찬도 없는 만남. 슈타이너는 감사의 말을 건네고 악수하고는, 몸을 돌려 나갔을 수도 있다. 이미 슈타이너의 야위고 어두운 모습은 문을 지나 사라져 버린다. 신발 밑바닥이 계단 발판에 부딪쳐 나는 소리. 창문에서 화가는 그 학자가 건물을 떠나서, 광장을 가로질러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관찰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여전히 흥분한 상태로, 그리고 약간 당황했지만, 다음 기회를, 차분하게, 더 많은 시간을 갖고, 더 잘 준비해서 보다 긴 대화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곳에 남는다.

 

하지만 같은 스웨덴 여행 중에 슈타이너는 그가 지속해서 몰두하게 될 미술가와 우연히 조우한다. 괴테보리에서 그는 프랑크 하이만(Frank Heyman, 1880~1945)이라는 또 다른 미술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한다. 하이만은 조각가이고, 힐마 아프 클린트와 마찬가지로 신지학 협회 회원이다. 하이만은 슈타이너를 만났을 때 서른 살이 채 되지도 않았다. 그 시기에 찍은 사진에서 그는 수염을 기르고, 날카로운 눈빛에, 앞머리를 커다랗게 말아 올린 모습이다. 슈타이너는 그의 작품에 열광한다. “이것이야말로 보다 높은 세계로부터 느낄 수 있는 무엇이다”라고 열광한다. 하이만은 슈타이너가 묘사한 것처럼, “신성을 우러러 바라볼 때까지 인간의 내적 삶 전체를 보여 주는 돌덩어리 모양의 거대한 조각을 만들었다. 몇 년 전에 하이만은 한 선언문에서 비슷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조각가는 1906년에 '내적 삶'은 예술가를 통해서 형상화되어야만 하고, 아카데미의 전통은 쓸모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외부의 자연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사람들을 예술로 이끌지 못한다.”

 

프랑크 하이만의 조각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1904년. 아프 클린트 작품 보존재단 소장. HaK 43.

 

슈타이너에게 하이만의 조각은 일종의 계시다. 그것은 그가 이전에 미술에서 헛되이 갈망했던 것을 현실이 되게 한다. 그는 하이만의 아틀리에를 방문하기 전에 편지 초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말하자면 현재 어떤 예술가도 삶을 모범으로 삼아 창조하는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겉으로 보기에 비예술적인 조형을 하면서 내적인 삶과 내용을 형식적이고 추상적으로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날 빈번하게 예술적이라고 불리지만 진정한 삶의 전문가에게는 살아 있는 것처럼 속이려 드는 시체처럼 보이는, 내적으로 죽은 형식과 도식적인 틀에 머무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자연모방에 대해 전혀 평가하지 않는 조각가인 하이만에게서 마침내 자신의 예술 이해를 입증해 줄 사람을 발견했다.

 

1908년에는 미술에서 새로운 정신적 운동을 옹호하고 그것을 촉진시킨 주목할 만한 목소리가 또 하나 있다. 자기가 살고 있고, 신지학 협회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던 슈타이너가 뮌헨으로 돌아왔을 때, 바이에른의 주도인 뮌헨에서 발행되던 명망 높은 예술 잡지인 쿤스트바르트(Kunstwart)최신호가 그의 손에 우연히 들어왔을 수도 있다. 8월호에는 17점의 스케치가 포함된 특별 기고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주 어두운 소용돌이와 선으로 이루어진 스케치를 흑백으로 인쇄한 그림이다. 형상들은 화면 전체에서 흔들리고, 일렁거리고, 뇌우가 올 것 같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층층이 쌓여 있지만 잘 알려진 대상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쿤스트바르트』에 실린 그 작품에 대한 글에는 그 미술이 “빛이나 색채 혹은 선 그 자체로 영혼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현실적인 형태”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했다. 프라하의 미술가인 카타리네 쉐프너(Katharline Schäffner, 1884~?)가 그 작품을 만들었다. 『쿤스트바르트』의 창간인 겸 발행인인 페르디난트 아베나리우스(Ferdinand Avenarius, 1856~1923)는 그녀를 최상의 단어를 사용하여 칭찬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는 그 글로 자신이 비대상적인 회화를 옹호한 첫 번째 비평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베나리우스는 쉐프너의 작품에서 '새로운 언어'가 길을 개척했다고 썼다. 저자는 그녀가 위대한 미래를 맞이할 거라 예언했다.

 

카타리네 쉐프너의 석판화 <열정>. 1908년. 『쿤스트바르트 』에서 발췌.

 

그러나 아베나리우스로부터 칭찬 세례를 받은 여성 화가인 카타리네 쉐프너는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예술의 하늘에서 사라진 유성임이 확인되었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흔적은 완벽하게 사라져서 사망일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8년 『쿤스트바르트 독자들의 눈앞에 자연주의를 반대하는 정신적인 회화를 보여 주었던 것은 쉐프너의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다가올 몇 년 동안 많은 미술가가 그녀를 따라서 비슷한 작품을 만든다.

 

뮌헨에서 바실리 칸딘스키가 이런 의미에서 자기 존재를 알린다. 힐마 아프 클린트와 프랑크 하이만은 스톡홀름에서 공개적으로 그것을 옹호한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무엇보다 작가로 활동했던 슈타이너는 이제 자신만의 종합예술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출처 : 율리아 포스 지음, 조이한, 김정근 옮김, <힐마 아프 클린트 평전>, 풍월당, 2021 : 288-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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