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미하엘 엔데와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미하엘 엔데와 루돌프 슈타이너
카와무라 아츠노리, 그룹 현대 지음, 김경인 옮김, 『엔데의 유언』, 갈라파고스, 2013
제1장 엔데의 생애를 사로잡은 테마
2. 지구별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돈을 규명하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엔데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다. 엔데의 서재에는 몇십 권에 이르는 슈타이너 전집이 놓여 있다. 슈타이너는 사회라는 유기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사회삼층론을 세웠다. 엔데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 전체를 정신과 법, 경제 세 가지 기능으로 분류한다. 그런 다음 정신생활에서는 자유를, 법생활에서는 평등을, 마지막으로 경제에서는 서로 돕는 힘을 기본이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능은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에 대응하는 것이며 근대 시민사회의 이념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 영역이 기본원리를 토대로 기능하고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관계를 맺는 사회가 건전하다. 사회삼층론에서는 경제생활을 할 때, 경쟁이 아닌 우애라는 원리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사회적 차원 속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국가와 법 아래의 생활에 속해 있습니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측면에서 보면 경제생활 속에 살고 있고요. 그리고 미술관과 음악회는 문화생활의 일부니까 문화생활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생활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날 정치와 사회가 안고 있는 크나큰 문제는,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취급하거나 각각의 영역에 다른 차원의 이상(理想)을 혼동하여 적용했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사명은 세 가지 이상을 전부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는 법률을 만들어 적용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그러므로 평등이라는 이상, 그것도 법 아래에서의 평등을 실현해야 합니다. 국가는 정신과 경제 차원에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오류는 국가에 모든 것을 위탁해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 차원에는 자유이상이 꼭 들어맞습니다. 정신은 가능한 한 속박되지 않아야 하고, 각자에게 맞는 독자적 형태로 형성되어야 합니다.
경제생활의 이상은 우애입니다. 저는 감히 우애야말로 근대경제에 내재된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산과 수요의 자유로운 게임을 적용시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이 되고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이 항상 피해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경제생활은 본질적으로 사회 연대적인 것입니다.
그럼 돈은 어떤 차원에 속할까요? 돈이 국가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라면 국가에 속하므로 매매할 수 없습니다. 또 돈이 경제생활에 속한다면 그것은 상품이 되는데, 그럴 경우 우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돈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저는 자본의 자기증식을 허용하는 금융구조가 우애의 이상을 파괴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엔데의 발언에 상당한 거리감을 느낄지 모른다. 일본은 문화도 경제도 정부가 지배하고 통제한다. 경제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사기업의 금융기관에 막대한 세금이 투입된다. 문화활동과 정신활동도 기금을 조성하거나 권위를 부여하는 식으로 방향이 정해진다. 하지만 미래의 사회상을 고려하기 위한 구체적 단서를 엔데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예컨대 민주주의의 기본인 다수결은 정치적 차원의 원리다. 문화나 정신활동은 민주주의와는 다른 원리인 자유가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예술에서는 다수결이 잣대가 될 수 없다. 특히 돈을 생각할 때, 경제생활을 관철하는 것이 우애의 이념이라는 생각에는 깜짝 놀랐다. 다시 상술하겠지만, 많은 지역통화나 소셜뱅크가 사람들의 생업을 구제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추구한다. 거기에서 나는 공동체를 하나로 이어줄 가능성을 보았다.
경제평론가인 우치하시 카츠토는 '다원적 경제사회'라는 콘셉트를 제시하였다. 즉 이윤추구와 경쟁을 기본원리로 하는 기업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러니 그와는 별개로 연대와 협동을 행동원리로 하는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쟁섹터와 공생섹터가 병존하는 다원적 경제사회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다. 이것은 세계화와 규제 완화에 따른 자유 경쟁만이 최선이라는 논조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제2장 엔데의 장서를 통해 보는 사색의 흔적
3. 루돌프 슈타이너
- 엔데에게 큰 힌트를 준 또 하나의 경제관
엔데가 늘 곁에 둔 슈타이너 전집
국제청소년도서관에 보관된 엔데의 돈에 관한 장서와 자료 중에는 빈스방어와 케네디의 저서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D. 주어와 H. 고트샬크의 『최적의 유통성』, D. 주어의 『부가가치 없는 돈』『시장경제를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이자란 도둑이다』, L. 톨스토이의 『돈이란 무엇인가?』, A. 스미스의 『우리의 돈의 가치』, H. 크로이츠․D. 주어․W. 온켄의 『위기를 향한 성장?』, J. 보이스․H. 빈스방어의 『돈이란 무엇인가?』 등.
이들 장서의 제목들을 보고 있노라면 엔데가 어떤 식으로 돈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는지 그 윤곽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엔데의 경제에 대한 접근법을 고려할 때 빠트려서는 안 될 장서가 있다. 독일의 사상가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저서다.
엔데가 항상 슈타이너의 전집을 곁에 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다는 사실은 제1장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뮌헨에 있는 엔데의 자택을 찾아가 엔데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엔데의 입에서 “루디가……”라고 친근하게 슈타이너를 지칭하며 말하던 것을 몇 번씩은 들었을 것이다.
엔데와 슈타이너의 만남은 유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 에드가 엔데는 가시적 세계를 그리기보다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슈타이너를 비롯한 동서양의 신비사상 도서를 탐독하였다. 아버지의 창작 자세에 깊은 영향을 받은 엔데는 작가가 된 이후 아버지가 항상 이야기했던 정신세계의 실재와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과제로 삼아 슈타이너의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그렇게 엔데는 40년에 걸쳐 슈타이너와 대화를 계속해온 것이다.
사회 전체를 재조명하는 슈타이너 사상
루돌프 슈타이너는 1861년에 태어난 독일의 사상가다. 유럽의 정통적 학문을 토대로 학자로서 성실한 연구활동을 시작했지만 1900년을 기점으로 정신세계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의 배후에는 마찬가지로 객관성을 가진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사상은 인지학anthroposophy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슈타이너는 내면적 인식과 동시에 그것과 똑같은 형태의 실천을 중시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식으로 교육, 농업, 건축, 의학, 종교 등 다채로운 분야에 걸쳐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표명하였다. 슈타이너가 뿌린 이러한 씨앗들은 환경파괴나 정신의 황폐화 등 막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현대에서 싹을 틔우고,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넓게 뿌리를 내렸다. 개중에서도 교육은 가장 큰 성과를 올려 세계 각지에 800개가 넘는 슈타이너학교가 설립되었다.
일본에서는 1971년에 발표된 고야스 미치코의 『뮌헨의 초등학생』(中央公論社)을 통해 슈타이너학교가 소개되면서 슈타이너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 후, 교육뿐만 아니라 슈타이너의 독자적 예술인 오이리트미Eurythmie(슈타이너가 창안한 새로운 동작예술, 아름다운Eu+리듬rythmie이라는 말),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슈타이너 사상을 실천하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가 일체라고 생각한 슈타이너의 교육, 농업, 의학 등에 대한 제안은 이념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교육방법이나 농법, 제약법과 같은 구체적 충고에까지 이르고 있다. 동시에 슈타이너는 그러한 것들이 사회활동 전반에서 기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잊지 않고 언급했다. 제1장에서 소개한 슈타이너의 사회유기체 삼층론은 그들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다.
돈이라는 테마를 오랜 세월 궁리해온 엔데의 사색에 슈타이너의 사회론이 크나큰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경제문제를 돈 자체의 존재방식에서 근본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과정도 슈타이너와의 대화를 통해 또렷이 윤곽을 잡았을지 모른다.
게젤과 슈타이너의 ‘에이징머니aging money'
엔데는 작가인 히노우에 히사시와의 대담(『세 개의 거울』, 朝日新聞社)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식으로 돈의 존재방식을 바꿔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실제로 몇 가지 제안도 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의 예를 들고 싶은데, 둘 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은 실비오 게젤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돈의 흐름을 혈액의 흐름에 비유합니다. 돈은 필요하기 때문에 계속 흐르지만 돈 자체는 오래되어 늙으면 결국 사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자본이 모이면 그때는 더 이상 돈이 증가하지 않고 차츰 적어지다가 사라지는 존재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 주장과는 별개로 또 한 사람, 엇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 루돌프 슈타이너입니다. 그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회삼층구조』라는 저서에서 그러한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게젤에 대해 논할 때 엔데는 항상 슈타이너의 이름도 함께 거론하며 그의 사회론을 언급했다.
슈타이너는 1861년에 태어났고 게젤은 1862년에 태어났는데, 세상을 떠난 것도 각자 1925년과 1930년이니 두 사람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1920년대, 그리고 세계 대공황으로 위태로웠던 1930년대. 혼란했던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게젤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감소하는 ‘자유화폐’를 제창했던 것에 비해 슈타이너는 ‘노화하는 화폐’를 제창했다.
건전한 사회에서 화폐는 타인이 생산한 재화의 ‘수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수표’가 경제영역에서 어떠한 재화와도 교환할 수 있는 것은 그 수표 소유자가 사회의 생산부문에서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을 사회에 공급할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폐가 생산활동의 표상으로서 기능을 상실했을 때, 그 소유자에게서도 화폐가치를 사라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은 화폐소유권이 일정기간을 경과하면 어떤 식의 수단으로든 사회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생산활동에 투자되어야 할 화폐가 사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새 지폐를 발행하고 구화폐의 회수를 꾀할 수도 있다.(루돌프 슈타이너, 『사회문제의 핵심』)
다음 장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게젤의 자유화폐는 한 달에 한 번씩 액면가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구조를 통해 유통을 촉진하려는 돈이다. 그에 비해 슈타이너의 노화하는 화폐는 돈에 25년 정도의 기학을 설정하고 가치의 높낮이를 정하여 결제, 융자, 증여와 같은 영역에서 화폐의 흐름이 자동적으로 조정되어 경제가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경제학 강좌』, 筑摩書房) 게젤과 슈타이너가 제창한 화폐는 경제학에서 ‘에이징머니(노화화폐)’라고 한다. 둘의 생각은 같은 개념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나이 먹게 하는 방법’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가치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돈에 일종의 한계를 지우려 했고, 돈의 존재방식을 바꿔서 경제를 되살리고자 했던 의도는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게젤과 슈타이너가 직접적으로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저서에서 게젤이 제창한 자유경제운동에 대해 ‘나는 이 운동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하고 있다.(디터 주어Dieter Suhr, 『노화하는 화폐, 화폐이론으로 보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개념』) 슈타이너의 시야에 게젤의 이론과 활동은 정확하게 포착되었던 모양이다. 또 당시의 자유경제운동을 짊어진 사람들과 슈타이너 사상과 지지자들 간에는 적잖은 공통분모가 있었다고 한다. 동시대의 과제에 열중했던 두 사람의 경제관에 커다란 공통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리고 엔데가 자신의 경제관을 세우는 데 있어 이 두 사람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우애에 의한 경제란?
마지막 인터뷰에서 엔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현대의 돈이 갖는 본연의 문제는 돈 자체가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겁니다. 원래 등가대상이어야 하는 돈 자체가 상품이 되어버린 것,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돈 자체가 매매되는 것이 현대입니다. 이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인지? 이 때문에 화폐 내부로 화폐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어떤 것이 끼어드는 게 아닐까요?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화폐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요소가 끼어들어도 우리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까? 엔데는 그 이유를 슈타이너의 사회유기체 삼층론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사회적 차원 속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국가, 법 아래의 생활에 속해 있습니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측면에서 보면 경제생활 속에 살고 있고요. 그리고 미술관도 음악회도 문화생활의 일부이므로 문화생활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생활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날 정치와 사회가 안고 있는 크나큰 문제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같이 취급하거나 다른 차원의 이상理想을 혼동하여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이었던 ‘자유, 평등, 우애’는 혁명 이전부터 있었던 말로 원래는 프리메이슨의 슬로건이었습니다. 이 세 개념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차원에 상응합니다. 즉 자유는 정신과 문화, 평등은 법과 정치, 그리고 지금 시대에야 상당히 기이하게 들리겠지만 우애는 경제생활입니다. 공업사회는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입니다. 재봉사는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옷을 만듭니다. 그리고 빵집에서 구운 빵을 사다 먹는 게 자기 집에서 빵을 굽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싸게 먹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만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유리합니다. 이처럼 각자의 일은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건 어느 모로 보나 우애임에 분명합니다.”
엔데의 설명처럼 현대사회는 분명 분업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또 정신과 문화, 법과 정치가 각각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아래 관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경제원리가 우애에 기반한다는 사고방식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언어로 정의했을 때 분업이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란 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분업에 의해 돌아가는 현실세계는 타인을 짓밟고 사람과 사람을 분열시키는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다. 보통 경제학에서는 자유시장의 경쟁이야말로 경제의 대전제라고 말한다. 경제의 원리는 ‘자유’가 아닌가?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국가에 일임한 사회주의는 무너지지 않았는가? ‘우애’를 원리로 한 경제라니 있을 수 없는 유토피아 사상이 아닌가? 온갖 반론들이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자유’를 원리로 한 경제가 세계에 무엇을 초래하였는지, 이미 우리는 그 참혹한 현실을 알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 산성비, 대규모 해양오염과 온난화 등 지구규모의 환경파괴.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8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금도 기아에 허덕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및 대량폐기 등 여전히 포식자적 생활을 하는 선진구. 그런 선진구 내부에서도 갈수록 빈부의 차가 커지는 불균형한 사회구조…… 사회의 세 가지 차원과 그 이념의 혼란이 현대사회를 혼미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보는 엔데의 설명이 그야말로 적중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엔데와 슈타이너의 이러한 지적에 따라, 예컨대 우리가 직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돌아보면 법과 정치, 정신과 문화, 경제라는 세 가지 차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일을 공동으로 처리할 경우 거기에는 각자의 역할과 지위가 있다. 그 직분에 맞게 기술과 능력을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발휘할 것이다. 한편 현재에는 역할과 지위에 따라 보수가 정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보수=수입이 그 사람의 생활에 필요한가는 별개의 문제다. 만일 필요한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역할과 지위를 바꿔버린다면 그 일은 과연 제대로 돌아갈 것인가? 또 지위의 순서와 보수의 크기에 따라 발언이 부당하게 제한되거나 우대를 받는다면 결코 제대로 된 성과를 낳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현실의 직장이고 일이다. 즉 세 가지 차원과 원리가 혼동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슈타이너는 ‘소득과 직업, 보수와 노동이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 현대의 참상을 불러온 원인이라 보고, ‘동포를 위해 일하는 것과 일정한 수입을 얻는 것은 서로 완전하게 분리된 별개의 것’이라고 정의한다.(발터 쿠글러 지음, 히사마츠 시게미츠 옮김, 「직업과 노동」, 1908년 3월 12일 강연 “혼과 영의 인식”에 수록, 『슈타이너 위기의 시대를 살다』, 晩成書房) 그리고 “개개인이 그 일의 수익을 자신의 권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적으면 적을수록, 즉 그가 그 수익을 자신의 권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적으면 적을수록, 즉 그가 그 수익을 공동작업자와 나누는 경우가 많으면 많을수록, 또 그 자신의 욕구를 그의 업적이 아닌 타인의 업적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으면 많을수록 함께 일하는 사람 모두를 치유할 가능성은 갈수록 커진다”고 말한다.(「정신과학과 사회문제」, 1905년부터 1906년 ≪루시퍼 그노시스Lucifer Gnosis≫에 게재, 『슈타이너 위기의 시대를 살다』, 晩成書房)
이러한 점에서 분업적 생산방식을 갖는 사회는 원리적으로는 이기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와 같이 특정계급이나 개인의 이기주의가 도입되면 심각한 사회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상생활이나 일로부터 점점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경제는 우애로 성립되어야 한다는 슈타이너의 주장이 황당무계한 유토피아 사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의미에서 왜곡된 현대사회를 바로잡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슈타이너의 사상이 현대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중 경제의 우애는 실제로 어떤 형태로 추구되고 있을까?
사실 우리는 1996년, NHK BS2에서 방송된 <자유로운 씨를 뿌리다: 코야스 미치코, 후미, 슈타이너와의 25년>을 위해 슈타이너 사회실천운동을 취재하였다. 그것을 토대로 <슈타이너의 세계>(榮光敎育文化硏究所) 총 5편의 비디오시리즈도 제작하였다. 독특한 교육방법과 제약법, 농법 등과 함께 어떤 형태로 슈타이너의 경제우애가 실천되는가는 하나의 커다란 취재테마였다. 실제로 방문했던 독일의 슈타이너 학교, 유기농법 농장, 슈타이너 의학을 추구하는 병원 등에서는 사회유기체 삼층론이 의식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 또 어떤 형태로든 슈타이너 식의 경제적 시도가 행해졌다. 예컨대 학교에서는 교장을 두지 않고 교사들끼리 대등한 관계로 학교운영에 참가하고, 교사 월급과 학생들 학비를 자율신고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등의 방식이다. 또 기업에서도 지위와는 상관없이 가족구성원에 기초하여 급료를 정하는 등 독자적 경영방식이 모색되고 있었다. 현실의 학교나 기업이나 병원 등이 이런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실천하면서 나름대로 경영을 꾸려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또 ‘보수와 노동의 분리’를 말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나의 은행계좌에 각자의 수입을 이체한 뒤 자유롭게 인출하여 사용한다는 규칙을 실천하는 그룹도 있었다.
우애로 성립된 경제는 각자의 기업이나 공동체 안에서 분명 실천되고 있긴 하지만, 슈타이너가 구상한 대규모 사회 차원의 실천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취재에서도 슈타이너 교육을 실천하는 유치원에서 지역통화를 이용하여 운영하려는 곳이 있었다. 지역통화라는 새로운 방법과의 만남이 슈타이너의 ‘경제의 우애’에 새로운 전개 방식을 제공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이자를 스스로 결정하는 은행
엔데의 지적에 따르면 돈이 가진 기능에서 현대의 사회와 경제에 가장 큰 문제를 초래하는 것은 은행이나 주식시장을 통해 거래되는 자본으로서의 돈이다. 슈타이너는 자본으로서의 돈의 기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슈타이너는 먼저 자본은 그 성립과정에 따라 크게 두 종류가 있으며 그것을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순수한 생산활동으로 얻은 과잉수익과,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얻은 과잉수익이나 그것을 저축함으로써 얻은 저축에 의한 수입은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후자의 재산이나 수입이 완전히 자유롭게 다시 생산활동에 투자될 경우, 그것은 개인적 재능이 생산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다. 한편 순수한 생산활동으로 초과 수익을 얻었을 때, 그것은 사회에 빚진 것이 되고 사회 전체에 돌려주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이것을 명료하게 구별하여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본의 기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서 ‘자본’이 짊어져야 할 역할이란, 개인의 능력이 사회에 발현해야 할 역할과 같아야 한다는 것을 여기에서 지적해두고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말했듯이 개인의 재능은 자유로운 정신활동에서만 그 진가를 발휘하고 발달시킬 수 있는데, 그 영역에 정치적 또는 경제적 간섭이 가해지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자본활동에서만은 사적 활동이 허용되고 있다. (……)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갖는 여러 가지 문제점은 ‘자본’이 그 모든 것을 사회의 경제영역에 완전히 잠식시켰다는 것에 원인이 있다. 이는 언뜻 보면 기묘한 일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정신활동을 해야 자본이 원래의 창조적 기능을 완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미래를 확실하게 전망’하고자 한다면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루돌프 슈타이너, 『사회문제의 핵심』)
즉 슈타이너에게 자본이란 원래 사회적인 것이며 나아가 창조적 활동을 담당해야 하고, 항상 새롭게 투자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자본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가진 슈타이너가 기업에 대한 투자와 은행의 존재방식을 새롭게 규명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은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지학적 세계관에서 볼 때, 인지학적 목표나 존재방식을 실천하는 경제적․정신적 사업의 재정을 관리하는 은행과 같은 기관이 반드시 설립되어야 한다. 이 협회는 보통의 은행사업과 다른 점이 있다. 이 은행은 단순히 금융적 관점에서 운영되지 않는다. 이 은행은 인지학적으로 수행해야 할 한 가지 작업을 고려하는 실질적 관점에서 운영된다.(그리고 앞으로 그러한 점이 특히 중시될 것이다.) 따라서 이 협회는 보통의 은행과 같은 형태로는 절대 설립할 수 없다.
즉 은행가는 채권자의 성격은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 그보다는 오히려 융자하려는 사업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건전한 의미에서 추측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적 감각으로 그 조직을 궤도에 올리는 데 정진하는 상인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생활을 건전한 연대적 기초에 뿌리내리게 하고, 재능을 가진 사람이 정당한 지위를 얻어 사회적으로 좋은 결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여, 정신생활을 구성하기에 적합한 사업에 융자하는 것이다.(발터 쿠글러 지음, 히사마츠 시케미츠 옮김, 「삼층화에 대한 제논문」, 『슈타이너 위기의 시대를 살다』, 晩成書房)
여러 가지 사회적 실천의 단서를 구축한 슈타이너지만, 그의 생전에는 이러한 은행이 설립되지 못했다. 은행 같은 금융기관의 어제 오늘의 작태를 보면, 슈타이너가 말했던 이런 ‘은행’의 존재방식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일에는 슈타이너 사상에 기초한 은행이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한 방송에서 취재했던 GLS은행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적 우애에 기초한 은행은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을까?
GLS은행은 독일의 지방도시인 보훔에 본점을 둔 정식은행이다. 증여하고 빌려주기 위한 공동체라는 신비로운 이름을 가진 이 은행의 특징은 예금자가 자신이 투자할 프로젝트를 직접 선택하고, 동시에 스스로 예금이율을 정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기농법 프로젝트를 촉진하고 싶으면 은행이 선정한 유기농업 펀드에 투자한다. 그때 최소 무이자, 즉 이율 제로(0)에서 최대 시중은행의 평균이율까지 자기가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
GLS은행의 대변이 슈테판 로트하우스는 말한다.
“우리가 예금자에게 지불하는 최고액은 보통 은행의 이자입니다. 그것을 원하느냐 아니면 그보다 적어도 되느냐는 예금자 자신이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곳 예금자의 약 3분의 1일 적은 이자나 무이자를 선택합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훨씬 좋은 조건으로 프로젝트에 융자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가지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돈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좀 더 이율이 좋은 은행에 예금하려 했고, 또 이익을 볼 것 같은 기업의 주식을 사들였다. 은행도 더 많은 이윤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에 융자할 뿐, 그 사업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이윤의 크기를 우선시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사업에 자금을 대주려는 은행이 출연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은행에 이자가 적어도 예금하려 한다.
GLS은행은 1996년에 2억 마르크의 흑자를 기록했고, 과거 3년 간의 평균성장률은 17~20퍼센트였다. 물론 1만 명이 넘는 예금자가 모두 슈타이너 사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사회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 자연에너지의 개발과 유기농법의 보급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아이들을 건전하게 키우는 새로운 학교 만들기 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GLS은행에 예금하고 있다. 같은 시스템을 가진 은행은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 등 10곳이나 있다.
또 독일에는 사회복지와 에콜로지 프로젝트에 특화하여 융자하는 에코뱅크(환경은행)라는 은행이 있는데, 이 역시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런 은행들이 서서히 확대되고 있으며 이를 ‘소셜뱅크’라고 부른다. 예금자가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회와 환경에 공헌하는 것을 더 큰 척도로 하여 자신의 자산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시민들 사이에 이미 널리 일반화되어 있다.
엔데가 슈타이너의 저서를 읽으면서 GLS은행을 비롯하여 그러한 은행의 새로운 조류를 주시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의 활동이 모두 엔데가 지적했던 것과 같은 이자시스템의 모순을 반드시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현행하는 일반통화와 이자시스템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투자를 통해, 지금까지 돈을 소유한 사람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절대적 권리라고 보았던 이자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즉 이자를 사회에 스스로의 의지를 표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슈타이너의 ‘경제의 우애’라는 사고방식은 현대에 와서 GLS은행을 비롯한 소셜뱅크의 활동을 통해 시민들에게 널리 수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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