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비국가 사회와 국가의 분쟁 해결 방법 비교 (2) 본문
어제까지의 세계 -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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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비국가 사회의 두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첫째, 국가의 형사사법제도는 국법을 기준으로 범죄를 처벌하는 게 주된 목적이다. 국가가 형벌을 집행하는 목적은 국법을 준수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서 국내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다. 국가가 범죄자에게 가하는 실형의 목적은 피해자의 보상에 있지 않다. 둘째, 그 결과로 국가에서 민사사법과 형사사법은 분리된 시스템인 반면에 비국가 사회에서 이 둘은 구분되지 않는다. 비국가 사회는 피해를 입은 개인이나 집단을 보상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어떤 피해가 범죄, 불법행위, 계약 위반에 따른 것이냐를 따지지만 비국가 사회에서는 그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민사사법에서 그렇듯이 형사사법에서도 소송 사건은 두 단계로 진행된다. 첫 단계에서 법정은 고소된 범죄자가 한 건 이상의 혐의에 대해 유죄이냐 아니냐를 판단한다. 흑백을 가리고, 유죄냐 아니냐라는 가부간의 판단을 내리는 듯하다. 그러나 법정의 판단은 경직돼 있지 않다. 겉으로는 같은 혐의라도 죄질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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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가 유죄 선고를 받으면 국가는 처벌을 가하는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간다. 징역형이 대표적인 예이다. 처벌은 억제·징벌·갱생이란 세 가지 목적을 띠며, 국가마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다르다. 세 가지 목적 모두 비국가 사회에서 시도하는 분쟁 해결의 주된 목적과 다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비국가 사회는 피해자의 보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범죄를 처벌하는 주된 목적의 하나는 억제이다. 요컨대 시민들에게 국법을 어기지 말라고 겁주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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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와 그 가족, 혹은 범죄자와 그 가족의 바람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처벌은 시민의 대표로서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 직전에 피해자와 범죄자, 그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판사에게 건의하여 판결에 대한 자신들의 바람을 피력할 수 있지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전적으로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다.
“폴란스키 사건은 애초에 정의를 구현하려는 피해자의 바람이나 악감정을 해소하려는 피해자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 재판에 회부된 것이 아니었다. 캘리포니아 주민을 대신해서 캘리포니아 주가 제기한 사건이었다. 국가가 폴란스키에 대해 더는 악감정을 품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폴란스키가 앞으로도 다른 사람에 위험을 가하지 않을 거라는 뜻은 아니다. (......) 범죄는 개인에게만 행해지는 게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행해지는 것이다. (......) 중대한 범죄로 기소된 사람은 체포되어 재판받아야 한다. 그래서 유죄로 결정되면 그에 합당한 선고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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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제 다음으로 처벌의 주된 목적은 징벌이다. 이 목적을 앞세워 국가는 “국가가 범죄자를 처벌할 테니 피해자는 어떤 이유에서도 직접 처벌하려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도 장기형은 전통적으로 심각한 범죄에 선고됐지만, 캘리포니아 주는 요즘에 ‘삼진아웃제’를 채택하여 범죄자가 두 번의 중대한 중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에 다시 범죄를 저질러서 유죄 평결을 받으면, 피자를 훔치는 정도의 가벼운 죄이더라도 판사들에게 장기형을 선고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전적으로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캘리포니아가 현재 교도소를 운영하는 데 쏟는 돈이 고등교육을 위해 대학교를 지원하는 비용에 거의 맞먹을 정도이다.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인간에 대한 투자의 우선순위가 뒤바뀌고, 나쁜 경제정책이라는 이유로 교정 시스템에 막대하게 쏟아붓는 예산을 반대한다. 오히려 사소한 범죄로 범죄자를 오랫동안 가두어두는 게 돈을 덜 쓰고, 범죄자들의 갱생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그들을 신속하게 생산적인 일자리에 복귀시키고, 선량한 캘리포니아 시민들을 교육시켜 고급 일자리를 채울 수 있게 한다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캘리포니아의 경제 침체를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미국의 가혹한 처벌이 범죄를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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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들을 처벌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그들을 갱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사회에 복귀해서 정상적인 삶을 다시 시작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교정 시스템에서 죄수로서 사회에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주는 대신에 사회에 경제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유럽은 징벌보다 갱생이란 관점에서 범죄자의 처벌에 접근한다.
비국가 사회는 범죄 피해자의 아픔을 달래주는 게 주된 목적이지만, 우리 형사사법제도에도 그와 관련된 약간의 조항이 있지만 주된 목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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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피해자와 그의 친척들은 범죄자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증언하고,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법정에 출두해서 범죄자 앞에서 발언하고 범죄로 인한 감정적인 상처를 토로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다. 또 피해자의 원상회복을 위해 국가보상금이 존재하지만, 그 액수는 일반적으로 소액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민사소송을 제기해서 배상금을 받아내는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다. 대부분의 범죄자가 부유하지 않아 압류할 만한 큰 자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 사회에서는 집단 책임이란 전통적인 철학 덕분에 피해자가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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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에 참여한 범죄자의 재범률이 크게 떨어지고, 설령 다시 범행을 저질러도 범죄의 수준이 낮았으며, 피해자의 분노와 두려움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안정감과 해방감은 높아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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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산업국가에도 분쟁 해결을 위해서 일부 영역에서는 부족 사회의 분쟁 해결 메커니즘을 이미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예컨대 상인과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 대부분은 곧바로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일단 그 상인과 입씨름을 벌이며 협상한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거나 그 상인을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친구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그 상인을 만나 달라고 부탁한다. 현대 산업사회에도 자체의 고유한 절차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는 직업과 집단이 많다. 모두가 서로 알고 지내며 현재의 관계가 평생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시골 지역과 그 밖의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분쟁을 해결하려는 동기부여와 압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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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사법제도는 효율적으로 운영되면 세 가지 내재적 강점을 갖는다. 첫째로, 실질적으로 모든 소규모 사회에는 보복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중앙 정치권력이 없기 때문에 완강하게 반항적인 구성원이 독자적으로 보복을 모색하며 폭력으로 목표를 성취하려는 욕망을 막을 수 없지만, 국가 사법제도에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가 없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기 십상이다. ... 이런 이유에서 대부분의 소규모 사회는 폭력과 전쟁의 악순환에 시달린다. 국가 정부와 강력한 군장사회는 이런 악순환을 끊고 무력을 독점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안정에 이바지한다.
국가 정부는 이런 내재적 강점을 지니기 때문에,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수시로 얼굴을 마주치는 대규모 사회가 강력한 군장사회로, 궁극적으로 국가로 진화하는 경향을 띠었다. 우리가 소규모 사회의 분쟁 해결 방법에 감탄하더라도 그들의 해결 방법은 양날의 칼이란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동경할 만한 평화적인 협상이지만, 다른 하나는 안타까운 폭력과 전쟁이란 것이다. 물론 국가의 분쟁 해결 방법도 두 갈래로 나뉘며, 하나는 평화적인 협상이고, 다른 하나는 쌍방의 대립이어도 재판에 불과하다. 가장 섬뜩한 재판도 내란이나 악순환처럼 반복되는 살인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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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전통적인 사법체제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법체제가 우월한 두 번째 부분은 역학관계와 관계가 있다. 소규모 사회에서 분쟁 당사자가 협상에서 상대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 확실한 자기편이 있어야 한다. 나는 소규모 사회의 이런 특징을 생각할 때마다 서구 사회의 사법제도를 설득력 있게 다룬 <법의 그늘 하에서 진행되는 협상>이란 논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논문 제목을 쉽게 풀이하면, 분쟁 당사자들이 중재가 실패하면 분쟁이 법정에서 법규에 따라 해결될 거라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중재가 진행된다는 뜻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소규모 사회의 보상금 협상도 ‘전쟁의 그늘 하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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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지만, 국가의 사법체제도 소규모 사회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강한 쪽이 부당한 이점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는 적어도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를 제공하지만 소규모 사회는 그런 보호 장치를 전혀 혹은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국가 사법체제의 세 번째 강점은 잘잘못을 가려서 범법자를 처벌하고 과징금을 부과하는 목적에서 찾아진다. 물론 그 목적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까지 범죄나 불법행위를 범할 가능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억제는 국가 형사사법제도의 분명한 목적이다. 또한 불법행위를 다루는 민사사법의 목적이기도 하다. 민사사법은 피해의 원인과 책임을 철저히 조사해서, 남에게 피해를 유발하는 행위를 범한 사람에게 배상금을 강제로 부과하는 민사 판결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그런 행위를 억제하는 것이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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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사법체제에는 결코 내재적이지 않지만 널리 만연된 결함들도 있다. 형사사법체제에서 범죄의 피해자들이 별도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배상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소액의 배상금으로 만족해야 하고, 민사소송으로 판결을 받으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며,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상처를 돈으로 환산하기가 어렵고, 승소한 원고의 변호사 비용을 패소한 피고에게 일부라도 부담시키는 법적 조항이 없으며(미국의 경우), 분쟁 당사자들의 화해를 유도하는 장치가 없어 악감정이 재판 과정에서 악화되는 경우가 잦다는 것도 국가 사법체제의 결함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국가 사회가 소규모 사회의 분쟁 해결 방법들을 교훈으로 받아들여 이런 결함들을 완화할 수 있다는 걸 살펴보았다. 민사사법체제에서는 중재자를 훈련시키고 고용하는 데 더 많은 돈을 투자하면 판사들을 격무에서 어느 정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승소한 원고의 변호사 비용을 패소한 피고에게 부담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한편 형사사법체제에서는 회복적 사법을 더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미국의 형사사법체제는 징벌보다 갱생을 우선시하는 유럽 모델이 범죄자에게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와 경제에도 더 유익한지 정밀하게 재평가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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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들이 소규모 사회가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지금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파악한다면 소규모 사회의 바람직한 절차들을 우리 사법체제에 더 효과적으로 접목하는 방법을 고안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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