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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부모교육

가정에서의 발도르프 연계 교육 (1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7. 28. 21:05

가정에서의 발도르프 연계 교육 (1부)

 

정릉발도르프학교 학부모 강의 11

202166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먼저 발도르프 교육기관에 아이들을 보내시는 부모님들께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운동이 펼쳐지려면 부모님들께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주셔야 합니다. 공교육과는 다른 발도르프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주신 부모님들의 용기와 결단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는데요, 제가 가장 먼저 맡게 된 학생들은 4학년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보니 교사라는 일을 위해 교육대학교에서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배웠지만, 놀랍게도 4학년 아이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는 배운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상했습니다. 4학년 아이들의 선생으로 아이들 앞에 섰지만 교사인 저는 4학년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이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가 어떠한 존재인지 미리 알고 키우는 부모님들이 많지는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매년 아이들은 성장하며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정작 성장하며 변화하는 아이들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기존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적 성찰

 

교사로서 1년 동안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데 정작 아이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모든 상황이 부조리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교육대학교에서 아이들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인데 말이죠. 날마다 만나고 활동해야 하는 대상으로서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면서 수업을 한다는 게 잘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학교라는 공간이 정말 아이들을 위해 있는 공간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면 병원이라는 곳은 정말 환자들을 위해 있는 공간인가?’, ‘법원이라는 곳은 정말 분쟁 당사자들을 위한 공간인가?’ 같은 의문이 들게 됩니다. 실제로 경험을 해보면 그 시스템 속에서는 대단히 비인간적인 경험들을 하게 될 수 있고 비인간적 공간이라는 느낌도 많이 갖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이 선하고 성실하다는 건 알지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극복해내기란 정말 쉽지 않지요. 이로 인해 무력감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구조적인 문제를 모른척하고 살기도 합니다.

 

학교에 있으면 좀 더 인간적인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은데 이것을 극복해내려면 피곤해집니다.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관리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주변의 시선에 대한 극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초등학교 담임교사로 있으면서 저는 저희 반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며 문집을 많이 만들었는데, 저희 반 아이들과 부모님들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반면 다른 반 선생님들은 비교의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불편해지실 수 있습니다. 우리 반은 행복하지만 다른 반은 괜히 불편해지는 상황이 되는 거죠. 문집을 만드는 건 안 해도 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굳이 안 해도 되는 전시행정적인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과연 무엇이 안 해도 되는 일일까요? 학교 교사는 관료적인 측면이 있어서 행정업무는 안 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요.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교사가 온전히 교육에 마음을 쏟고, 학생이 온전히 교육을 받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많은 선생님이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한 신뢰는 변치 않지만 학교 시스템 안에서 교육에 대한 자유로운 추구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단위학교의 교사들에게 완벽한 자율성이 주어져야 하고, 교사들은 수업과 행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이러한 목표는 학교가 국가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이상,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일 것입니다. 학교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그 자체의 논리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이, 혁신학교 운동이 꽤 벌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교육은 지식과 정보 중심의 주지주의 교육의 한계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교육과정과 국정교과서가 수업의 중심이 되다보니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수업은 아이들의 머리를 자극하는 데 집중할 뿐입니다. 말로는 감성교육과 의지교육을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교과서 없이도 수업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학습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수업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교과서나 수업프로그램은 부차적인 것이니 수업이 끝날 즈음 확인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많은 선생님이 교과서와 진도에 사로잡혀 있는 게 현실입니다.

 

반면 발도르프학교는 모든 활동과 관심사가 아이들 발달에 집중되어 진행됩니다. 이 점이 발도르프학교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발도르프학교가 아닌 다른 대안학교들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대안학교 운동에 대해 공부하며 받은 인상은 대안학교들이 교육철학 문제, 특히 인간학에 대해서는 의외로 관심이 덜하다는 것, 그리고 현장에서 이러한 것들을 수업에 녹여내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교육 활동과 프로젝트들이 아이들의 내적 욕구와 별개로 진행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 교육에 대한 진심, 아이들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정작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면서 무언가를 자꾸 시도하는 게 과연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가 공교육에서 나와 발도르프학교에서 일하고 배우며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정말 잘 연구되어 있고, 그것을 예술적인 다양한 활동들로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정리가 잘 되어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겠습니다.

 

발도르프학교의 교육철학은 상식적인 것일까?”

 

발도르프학교의 인간관

 

대단히 상식적인 부분도 있지만,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낭송하는 아침 시 중 , 하느님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해에서 나오는 사랑의 빛이 / 나에게 하루를 밝혀 줍니다. / 영혼에 들어 있는 정신의 힘이 / 온몸에 활기를 전해 줍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입니다. “빛나는 해의 광채 속에서 / , 하느님 / 당신을 우러러봅니다.” 이렇게 이어집니다. 슈타이너가 제안한 시에는 신에 대한 경외의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특정 종교로 해석하기보다, (종교가 없으신 분이라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 진리여!”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발도르프교육을 계속 공부해 보면 영적인 측면, 종교적인 측면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종교에서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 특히 개신교나 천주교를 믿고 계신 분들은 슈타이너가 카르마나 윤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상함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좀 더 풍부한 인간 이해를 추구합니다. 인간은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도 있는 존재라는 거지요. 정신, 즉 영에 대해 동서양의 다양한 종교, 신화, 철학에서는 그것이 인간과 우주의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슈타이너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여러 종교를 통합적으로 연구하고, 사용하는 용어도 여러 종교에 걸쳐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각이 평소 우리가 갖고 있던 영적 세계에 대한 사상들을 종합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못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불교, 유교, 노장, 기독교, 토속신앙 등이 큰 위화감 없이 녹아 있는 문화를 갖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내 아이, 내 손주를 바라볼 때 물질로만 이루어진 그런 동물적인 존재로 바라보진 않습니다. 아이도 나름의 생각과 감정, 욕구가 있고, 자기 나름의 정체성, 소질,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 고유한 자아를 가진 인간입니다. , 인간에게 정신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 유지 활동만 하며 살 순 없습니다. 밥은 소중한 것이지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지요. 삶을 살아가면서 문화적인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또 뭔가 거룩한 세계에 대한 추구, 진리와 선, 정신 세계에 대한 추구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이 채워지지 않으면 마음이 공허하고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종교와 예술이 있고 다양한 문화 활동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에 인간의 삶 또한 매우 복합적입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이건 내 삶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만나본 수많은 아이들이 이런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건 내 삶이야. 내 삶을 잘 살고 싶어! 나도 좋은 어른,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따라서 아이들에게는 누구나 자기 존엄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존엄한 것처럼 아이들도 스스로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발도르프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교육이지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정신적 자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애의 유무, 나이의 많고 적음, 인종, 성적 지향 등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도 똑같이 누구나 존엄합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봐야 합니다.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꿈, , 가족이 있지요. 우리 주변의 누구든 차별하거나 무시하고 혐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게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혐오문화나 서열을 나누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뉴스에는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런 천박한 인식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기성세대인 우리가 어떤 문화를 만들어 왔는지 돌아보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 돈, 돈 하면서 마치 경제동물처럼 산 것은 아닌지, 내 문제가 아니면 불의한 일을 모른 체하고 넘겨온 건 아닌지 말이죠. 존엄한 존재로서 우리는 서로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서로 서열을 나누고 차별하고 혐오를 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올바른 관점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아의 측면에서 아이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이 자아가 정신세계에서 온 것이라고 하지요.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닌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자아가 있는 존재입니다. 다만 아직 어려서 자아가 독립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른으로서 이 사실을 감안하면서 끊임없이 아이의 발달에 맞게 존중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행해주는 일을 할 뿐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살다 보면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의 존엄성을 바라보고, 인간의 존엄성은 고유한 자아에서 온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출발합니다. 저희 집 딸아이가 서너 살 때,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고 거꾸로 신으려 하길래 제가 도와주려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딸아이는 내가 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대신 해줄게라고 하면 아이들은 내가 할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아이들이 말하는 라는 것이 바로 그 아이의 주체성, 즉 고유한 자아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너무 쉽게 아이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말들로 (“니가 뭘 알아! 입 다물어, 어디서 말대꾸야, 그렇게 할 거면 나가등등) 아이의 영혼에 상처를 주곤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높은 측면과 낮은 측면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인간의 모든 측면을 아울러 접근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어떻게 바라보는가?>

 

<“정신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자아(“라는 의식) - “내가 할래!”라는

아스트랄체(마음) - 영혼체 또는 마음,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마음

에테르체(기운) - 쌩쌩한 아이들의 기운, 활기 등

물질체() - , 체형 등 물질적인 몸

 

발도르프교육에선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제가 기존의 발달 연구나 심리 연구들을 보며 아쉬웠던 부분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주로 했던 작업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극과 반응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또 있어야 할까요?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내적 동기, 소망, 꿈, 소명의식 등이 있습니다. 아침시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은 정신적인,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영적인 세계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을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불편한 또는 낯선 아이들이나 부모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는 아이가 이런 측면에 대한 경험을 못해 보고 커 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영, 하느님 같은 단어가 나오면 아이들이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 부모님이 하실 일은 먼저 그 불편해하는 마음을 수용해주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 , 컴퓨터, TV 등 여러 매체를 통해 귀신, 공포, 괴담의 문화에 많이 노출되어 있는 편입니다. 물론 재미있어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보고 나면, 재미있어 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를 지배하거나 해를 끼치진 않을까 불안해지고 무서워집니다.

 

물론 발도르프교육에서 말하는 정신적 존재는 그런 것들과 다릅니다. 하느님이나 천사 같이 정신적 존재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 내면의 소질, 힘들을 이끌어 주기 위해 존재하는 선한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를 상상의 존재로 이해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한 긍정적 상상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실제로 주니까요. 이렇게 부모님부터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습니다. “괜찮으니까 한번 해봐라는 정도의 얘기로 수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이 모든 걸 이해시키기 위해 굳이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설명을 다 해 준다고 해서 아이가 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때때로 적절한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다 친절하게 이해시키고 설명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저학년에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옛이야기처럼 비유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시는 건 좋습니다. 가족이 세상을 떠나 슬픔에 잠긴 아이에게 번데기가 된 애벌레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애벌레는 결국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간다고 이야기해주면 아이는 긍정적 그림을 가질 수 있겠지요.(수잔 페로우 선생님의 <치유동화>를 추천드립니다.)

 

이러한 접근은 이론이 우선이 아니라 관찰이 우선입니다. 아이들을 잘 관찰할 수 있다면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 할지, 해답도 거기에 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아이들을 관찰할 때 아이의 행동적인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특징, 평소 기운이 넘치는지, 활기찬지, 조금 힘이 빠져 있는지, 마음이 즐거운지, 뭘 싫어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파악하고 이 아이가 어떤 과제를 갖고 왔는가? 어떤 소질을 갖고 있을까? 아이의 본질적인 측면이 뭘까? 등등 항상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초등학교 입학생들을 관찰해 보면 감각적 발달이 잘 이루어져서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보다는 감각적 손상을 입고 오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이 온전히 자기 발달의 흐름에 따라서 건강하게 발달하는 것이 더욱 더 어려워진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라이프스타일, 즉 삶의 방식은 아이들의 발달에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상황에 아이들을 맞추기보다 발달단계에 따른 아이들의 내적 욕구 또는 필요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떤 욕구들이 있을까요?

 

1. 먼저 아이들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걸 사랑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의 아이들이 안아줘”, “업어줘라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는 충분한 스킨십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촉각적인 경험 없이는 아이들이 사랑받는다고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 양육자와 아이가 많은 시간을 보내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면 적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집중적으로 스킨십을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는 양육자의 따뜻한 스킨십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촉각적인 사랑의 욕구는 아이에게 굉장히 중요한 욕구입니다.

 

2. 그리고 놀이의 욕구가 있습니다.

안아줘다음에 많이 하는 말이 놀아줘지요. 놀지를 못하면 아이들은 무척 심심해합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더 큰 기쁨을 놀이를 통해 느낍니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은 스마트폰을 보는 것 보다 손발을 써서 신나게 노는 것을 선호합니다. 아이들은 몸으로 놀고 싶고, 신나게 뛰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충분히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3. 또 아이들은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안정된 생활을 원합니다.

언제 먹고, 언제 자고, 언제 놀고, 언제 쉬는지 등등, 리듬적인 생활이 아이들에게 필요합니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욱 더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생활에서 안정감을 갖게 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적인 측면뿐 아니라 공간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욕구들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 욕구를 충분히 채워줘야 주 양육자와 아이는 어린 시절 애착관계가 형성되어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자신과 안정된 애착관계를 형성한 존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어린 시절, 이 욕구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커갈수록 욕구불만이 다양한 형태로 나오게 됩니다. 아이들의 부정적인 행동과 말들은 아이의 욕구가 채워졌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의 성향이나 신체적 상황에 따른 이유도 있긴 합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는 아이들의 내적 욕구를 살피며 양육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사실을 많이 망각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요즘 조금 나아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유치원의 경우 누리교육과정이 놀이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런 전환이 교사들에게는 쉽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이 있기 전에는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처럼 컴퓨터와 TV를 틀어 놓고 수업을 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영유아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발달단계에 맞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적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아이들은 끊임없이 울거나 소리 지르고 돌아다니거나 무기력해져 있거나 하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교육 현장에서는 학생 수가 너무 많고 가르쳐야할 수업내용도 너무 많아 진도를 나가기 바빠 아이들의 내적 욕구를 살피며 교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어려운 부분을 치유적인 접근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아이들을 발도르프학교에 보내신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유아아이들의 욕구는 이러한데 초등시기, 즉 담임과정 아이들의 내적욕구는 무엇일까요?

 

사랑받고 싶고, 마음껏 놀고 싶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편안하게 머무르고 싶고, 동시에 아이들이 커갈수록 이 세상에 대한 경외감, ‘우와! 너무 놀라워!’ 하는 마음! ‘우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가봐! 뭔가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나봐!’ 하는 마음, 내가 물을 마실 수 있어 고마워! 이 물이 나에게 와서 너무 고마워! 어떻게 왔을까? 나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을까? 내가 좋은 어른이 되려면 나는 어떻게 책임감을 배워야할까? 등등 영유아기 이후의 아이들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경외감, 감사함, 책임감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 학교의 현실은 이런 것을 놓치고 지식과 정보 위주로 교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이들의 내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은 학교를 지루하고 재미없는데 억지로 가야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학교를 아무리 다녀도 재미있고 신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아이들의 다양한 내적 욕구를 어떻게 채워주느냐에 대해서는 잠시 쉬고 2부에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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