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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교육의 대과제 : 교육의 본질 목적은 인간성 계발 - 도정일 본문
우리 시대 교육의 대과제 : 교육의 본질 목적은 인간성 계발
도정일(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교육의 '목적'이라는 문제는 허다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무엇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는가?'라는 질문을 모든 경우에 충족시킬만한 불변의 답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교육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고, 교육 수요자의 요구나 사회적 요청, 국가 전략이나 시대적 환경 변화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20세기 초 제국주의를 추구할 때의 일본에서는 '황국신민'(천황의 나라에 충성하는 신하로서의 국민)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적으로 선포되었다. 그 목적을 위해 설립된 보통교육체제가 ‘국민학교’였다. (이때의 ‘국민'은 현대 한국인이 말하는 국민이 아니라 '황국신민'의 줄임말이다.)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던 교육목적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체득하고 제국 영국의 정책을 옹호, 지지, 실천하는 남성 인간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란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리 규정될 수 있는 것이고 또 역사상 그렇게 규정되어온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20세기 후반 들어오면 교육과 관련해서 한 가지 커다란 '세계적 변화'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교육의 목적으로 규정하건 간에 교육이 적어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사상이 교육계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나라에서 교육이라 불리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교육도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게 어떻게 교육인가? 같은 나라 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남성에게는 교육이고 여성에게는 아닌 것, 부유층 동네에서는 교육이고 빈곤층 지역에서는 교육이 아닌 것, 그런 교육이 교육일 것인가? 나라, 계층, 인종, 직업, 종교, 성차 같은 분할의 울타리들을 넘어 초등교육에서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교육이다”라고 사람들이 합의할 만한 공통의 교육목적을 규정하고 제시할 수 없을 것인가? 누구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못할 어떤 공통적 보편적 목적을 가질 때에만 교육은 '교육'이라 불릴 수 있다.
초-중등교육이냐 고등교육이냐에 관계 없이 현대 사회가 (몇몇 예외적 경우가 없지 않지만) '교육'이라 부르는 것에는 아무도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명징하고 강력하며 단순하면서 근본적인 '자기약속' 같은 것이 있다. 이 강력하고 기본적인 약속들로부터 교육의 공통 목표 같은 것이 도출될 수 있다. 어떤 교육도 인간 파괴를 목적으로 내걸지 않고 어떤 교육도 인간의 능력 저하를 목표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건 공개적으로 표명되는 '교육의 목적'에는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다. 말하자면 현대 세계는 교육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일종의 합의(consensus)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합의일까? 다음의 사항들은 그런 약속 또는 합의의 핵심부를 요약해주고 있다.
(1) 교육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파괴하는 일에 나서지 않고 동조하지 않으며 파괴행위를 조장하지 않는다. 인간 세계는 ‘나’와 '너'와 '그'로 구성된다. 이 인간 공동체를 묶어주는 것은 '인간성'(humanity)이라는 공통성이다. 이 공통성이 위협받거나 파괴될 때 나의 파괴, 너의 파괴, 그의 파괴가 발생한다.
(2)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을 깊이 이해하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세계 생명공동체들 사이의 조화롭고 지속적인 공존의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교육은 인간이 수천 년에 걸쳐 추구해온 가치들을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함양하며 인간이 성취해 온 지적, 도덕적, 정서적 성취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킨다. 교육은 인간에 의한 가치 추구와 의미 있는 것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물질적, 제도적, 정신적 토대와 조건들을 존중하고 보존하며 발전시킨다.
(3) 교육은 사람이 가진 지적, 도덕적, 정서적 능력들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게 하며 그 재능의 발현과 발전을 저해하는 조건들을 최대한 제거하거나 축소하는 일에 참여한다. 교육은 이 지상에서의 인간의 지속적 삶의 가능성을 위협하는 이념적, 제도적, 사회적 조건들을 개선하는 일에 참여한다. 이것이 교육의 사회적 실천이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과 구성요소들은 교육의 이같은 실천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특징적 성질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속성들을 우리는 흔히 '인성'이라 부르고 서구 사람들은 '인간성'이라 부른다. 영어로 옮기면 인성/인간성은 '인간다움'이란 의미의 'humaneness'로, 또는 '인간이 지닌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속성 들'이란 의미에서의 ‘휴머니티’(humanity)를 지칭하거나 둘을 모두 합친 의미로 사용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What makes us human?)라거나 “인간은 왜 인간인가?"(Why is human human?)라는 질문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인성/인간성에 대한 응답이다. 이런 질문들은 인간에 관한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이며,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반면에 선뜻 답하기도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여기서 말할 일은 못되지만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그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인문학적 질문이 부단히 던져지고 있는 반면 요즘의 한국 교육, 특히 대학교육에서는 그런 질문이 잊혀진 지 오래다.) 쉽게, 선뜻 답하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 누구나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는 막연한 그림들은 머리에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의식적 언어로 딱 잡아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리다. 또 인간에 대한 생각도 그야말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인성/인간성에 대한 논의도 분분해질 수 있다.
인성/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자질, 특성, 속성들이 있다면 무엇인가? 여기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그 인성/인간성이 모든 사람,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거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질, 곧 '공통성'(commonality)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럴 때의 공통성은 모든 사람에게 '편재'하는 성질이라는 의미에서 '보편성'이라 말해도 된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적 성질, 자질, 속성들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기나 할까?
있다. 일부 논자들의 격렬한 비판과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인간답게 하는 어떤 공통의 속성들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이런 공통의 인간성이 아니라면 인간들 사이의 소통, 이해, 공감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소통, 이해, 공감을 가능하 게 하는 위대한 자질들이 인성/인간성이다. 쉽게 몇 가지만 말해보자.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역지사지의 상상력'은 인간 공통 의 자질이다. 타인의 슬픔을 동정하고 그의 고통을 나도 흡수해보려는 '동정과 공감의 능력'은 인간 공통의 자질이며 능력이다. 나의 행위와 행동들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교정할 줄 아는 '성찰의 능력'도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 자질이다. 이런 자질들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묶어준다. 그런데 이런 자질들은 생래적인 것인가, 후천적인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 능력들은 생래적인 것이다. 생래적인 것이라면 교육을 통한 자질 강화가 꼭 필요한가? 필요하다. 이 능력들은 공통적인 것이고 인간 고유의 것이지만 어떤 사회, 문화, 삶의 조건, 성장환경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능력들은 잘 발휘되고 신장되기도 하지만 위축되고 동결되기도 한다. 극단적 이기주의 에토스가 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존의 정의를 위협받는 비인간적 사회로 퇴락할 수 있다. 그 사회의 개인들의 비인간화가 사회의 비인간화를, 또는 그 반대 순서의 상황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지점에 개입하는 것이 교육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자질들이 환경을 비롯한 외적 영향 속에서 위축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교육이 필요하다. 인간의 인간적 능력들이 부단히 계발되고 발휘될 수 있게 자극한다. 그래서 시카고대학 철학교수 마사 너스바움은 교육의 이런 기능을 '인간성 계발'이라 부른다. 인간성을 생짜로 새로 만들어 주입할 수 없으나 씨앗으로 존재하는 인간적 능력의 가능성들을 최대한 계발하자는 것이다.
인성/인간성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담론과 수천 년에 걸친 빛나는 사유/실천의 전통을 가진 것은 동아시아다. 공자와 맹자의 유가 담론은 단연 그 전통을 대표한다. 공자의 '인'(仁)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자질'이다. 공자는 '인'을 70가지가 넘는 방식으로 정의했지만 이 다종의 정의를 관류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다. 그의 인의 윤리학은 현대 사회, 특히 우리 사회의 대학이 교육 속에 되살려야할 보석 같은 사유와 통찰들을 갖고 있다. 그런 보석으로 말하면 맹자의 업적도 스승 공자의 반열에 나란히 오르고도 남는 데가 있다. 예컨대 <맹자> '공손추장구'에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자질을 네 가지로 규정한 유명한 사단론(四端論)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 네 가지 마음(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제나라 왕 제선왕과의 대화에서 말한 '차마 그러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不忍人之心)도 큰 현대적 울림을 갖고 있다. 거듭 생각해보고 곱씹어봐도 맹자는 2천3백 년 전에 이미 현대 한국인을 위한 인성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맹자가 인성이라 생각한 것이 그의 시대보다 지금 이 시대에 더 퇴락하고 타락, 변질하거나 위축된 것이라 말해야 할지 모른다.
현대 세계에서의 인성이나 인간성을 말하자면 꼭 생래적 자질이 아니어도 교육을 통해서, 문화와 결단과 실천을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계발해야 할, 혹은 계발할 만한 인간적 자질들이 다수 있다. 결론 삼아 말하면, 현대 한국 사회의 교육은 인성/인간성의 계발과 신장에 관한 한 거의 참담한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교육이 나서고 사회 전체가 나서서 사람의 사회, 사람이 살만한 사회, 사람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거의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혁신'의 첫 걸음이다.
[출처: https://www.kbedu.or.kr/bbs.html?html=bbs/column.html&mode=view&uid=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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