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학교에서의 사회삼원론 - 젠녹 6 본문
발도르프학교에서의 사회삼원론 -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천천히 이 연수 과정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왔습니다. 어제는 사회삼원론의 기본 개념을 정리해 봤습니다. 오후에는 인간의 의식발달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사회삼원론과 인간발달은 연결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저께도 살펴보았듯이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현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전부 다 뒤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요, 그것을 통해 더욱 완벽한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만인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평등 자체는 인류 발달에서 참으로 고귀한 사상입니다. 하지만 모든 영역에서 평등을 획일적으로 적용한다면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등이란 법적인 삶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법적인 삶에서의 평등이란 성숙한 계약관계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평등한 원리를 경제와 정신적인 삶에도 적용을 시킵니다. 경제적인 삶에서는 박애 정신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박애 정신의 원리가 적용되는 경제적인 삶은 기본욕구의 영역에 해당하는데요, 그것은 법적인 삶의 계약관계와 달리 사람마다 다 다른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평등이라는 좋은 개념을 얻었지만 획일적인 적용에 의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슈타이너가 생존해 있을 때 공산주의 사상이 발전했습니다. 슈타이너는 당시 공산주의자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파괴되었지만 베를린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건물에서 슈타이너가 강연을 한 적도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공산주의 노조나 단체에 가서 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슈타이너의 사상을 거부했습니다. 그 뒤에는 슈타이너가 공산주의와 작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슈타이너의 사상을 배격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에게 사고의 편향적 습성이 너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다른 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만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당시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를 이야기했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사상입니다. 자본주의에 푹 빠져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심지어 이 땅을 사고 팔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슈타이너는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이 땅도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요, 소유권과 사용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한 공간이 있는데, 누구의 소유권도 없다면 아무나 와서 놀고 사냥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정확히 보자면 소유권을 갖는 게 아니라 사용권,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과 연결하여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땅이란 것은 인류 공동체 전체에 속한 것입니다. 이 동네 땅이라면 동네 사람들, 나라라면 나라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의 땅입니다. 공동체마다 대표성을 가진 모임이 있겠지요.
오늘날 횡행하는 정치가들의 일 말고, 아주 순수하게 생각해서 이 공동체를 위해서 발도르프학교를 짓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공동체의 의회에 발도르프학교를 이런저런 목적과 이유로 땅을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의회에서는 회의를 하여 당신들이 필요한 만큼의 크기와 시기를 가진 당을 허용합니다. 그렇게 계약관계가 형성되고, 의회는 그에 따른 땅을 제공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10년 단위, 20년 단위로 계약관계가 갱신될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만약 이러한 생각이 처음부터 적용이 된다면 좋을 텐데요, 제가 있는 학교의 땅은 보험회사가 소유권을 갖고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공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된 땅이었습니다. 그전에는 폐렴 환자를 위한 요양소였습니다. 여기를 대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한 대학에서 연구소를 짓고 싶어 했고 저희 학교가 관심을 보였으며 한 백화점이 주차장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이 땅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관계가 드러납니다. 소유권을 가진 보험회사는 사회삼원론을 알지 못했지만 백화점의 의도를 알고 그렇게 사용되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소유권을 대행하는 보험회사가 마치 사회삼원론을 알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대학이 들어오는 게 좋은지, 발도르프학교가 들어오는 게 좋은지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보험회사가 우리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건 일종의 지성혼의 작용이었지요. 하지만 그 땅은 사회적 공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게 명시되어 있어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보험회사를 움직일 수 있을까요? 몇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면 대학과 발도르프학교 중 돈을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 보고 대학을 선택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학교는 10명밖에 없었고 상대는 대학이었지만, 보험회사는 대학이 이미 슈투트가르트에 많은 땅과 돈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땅도 없고 돈도 없지만 좋은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99년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권을 주었습니다.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정말 동등한 관계 속에서 계약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발도르프학교를 하는 걸 보니까 이 공간에 자유로운 공간을 짓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99년 동안은 계약관계가 있기 때문에 학교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땅을 다른 공원이나 무엇인가에 사용하려면 계약관계를 파괴해야 합니다. 법적인 관계는 상당히 분명한 것이어서 여기서 내가 무얼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는 게 명확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교육할 수 있는 능력, 역량은 세 번째인 정신적인 삶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러한 능력을 펼치기 위해서는 자유라는 덕목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말하자면 저는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교육에서 능력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발도르프학교에서 일을 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가 잘못 사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날 벌어지는 상황을 살펴본다면 교육도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판단하여 누군가는 오이리트미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고 와서 공시가 난 학교에 응시할 수 있습니다. 학교는 결정을 하여 그 사람을 채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과목은 똑같은 조건이지만 하나의 예로서 오이리트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이리트미 교사의 수업이 이제 경제적인 영역으로 되었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1년 반 정도 하고 나니까 그 교사는 오이리트미는 이제 되었고 산에 가서 땅굴을 파고 싶어 합니다. 다른 동료가 가보니까 오이리트미 교사가 없습니다. 바깥에 나가 보니 오이리트미 교사가 구석에서 땅굴을 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선생님, 지금 오이리트미 시간인데 뭐하고 계세요?” “저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겁니다. 아이들과 광물학을 하는 거예요.” 이제 분쟁이 일어납니다. “아니에요, 당신은 오이리트미 교사니까 오이리트미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반박합니다. “저는 자유로운 영혼이므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상관하지 마세요.” 바로 이때 계약관계를 작성했다는 걸 떠올려야 합니다. 그 계약서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오이리트미 교사는 일주일에 몇 시간은 오이리트미를 해야 한다. 당연히 자유는 발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수업에서 온전히 가르칠 수 있을 때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함께 느끼셨다시피 사회삼원론의 영역들은 공존하지만 각 영역의 특성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의 예에서 보셨다시피 분쟁의 단초는, 오이리트미 교사는 자유롭게 행위하고 싶어 하고, 교사회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교사에게는 자유가 허용되어야 하지만 지금의 분쟁 상황에서는 계약관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이것을 구분해야 하지만, 법적인 계약관계가 자유로운 삶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이리트미 수업에서 이렇게 진도를 나가야 하고 저렇게 수업해서는 안 된다고 교사의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학교의 모든 삶도 우리 모두는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세 가지 영역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학생의 입장에서 교사들이 하는 모든 행위를 바라봅니다.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본다면, 학생이 학교에 들어올 때 계약관계가 있습니다. 등록금이나 지켜야할 규칙 등을 지키겠다고 하면 학생의 입학을 허용합니다. 학생과 교사의 관계 속에서 권리와 의무의 계약이 형성됩니다. 또 교사는 자신의 과목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학생들에게 수업을 합니다. 그 영역은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필요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업무를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교사에게 전달됩니다. 계약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본다면 교사가 잘 가르칠 수도 있지만 만약 잘 안 되면 왜 안 되는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약속한 관계 안에서 교사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수업재료나 계약관계에 침범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세 가지 영역이 학교 안에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의 측면에서 보고, 교사의 측면에서 봅시다. 계약관계는 대체로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서, 역사 교사와 계약관계가 맺어질 때 11학년에서는 이렇게 이렇게 수업을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분명하게 성립되냐 하면 발도르프교육의 역사 수업은 이렇고 11학년에서는 이런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정해집니다. 발도르프교육에 동의를 하고 왔지만 ‘11학년 수업에서 내가 무얼 어떻게 할까’는 자유의 영역입니다. 학생들도 교사의 자유로운 상태를 신뢰하면서 수업 받길 원하고, 교사는 그런 상태에서 수업하길 원합니다. 정신의 영역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고, 법적인 영역에서는 계약관계가 이루어지며, 기본욕구의 영역에서는 수업 재료가 주어집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한편으로는 박애에 따라 서로 도와주지만요, 박애는 쌍방향적입니다. 예전에 보았듯이 선생님을 위해 도시락을 싸온다거나 집을 주는 게 아니라 돈을 드립니다. 경제적인 영역에서 본다면 수업을 하는 것과 돈을 제공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학교의 많은 갈등 문제를 잘 살펴보면 각각의 영역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적게 받으니까 역사 수업을 절반만 하겠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는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수업내용과 재료를 전해주고 돈을 받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있기 위해서입니다. 학비란 교사의 능력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능력이나 사용하는 시간에 대해 어떻게 대가를 지불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능력에 따른 대가 지불이란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휴식 후에 슈타이너가 제안한 정말 중요한 두 가지 개념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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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일을 하면서 정말 다시 한번 우리의 삶과 사회가 이러한 모습인지 고찰해 보십시오. 사회성이란 쉽게 말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한다, 돕는다는 것입니다. 인지학의 인간관과 사회관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지학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인간이 사회적이면서 반사회적이기도 한 것은 맞는 말입니다. 반사회적인 모습은 아주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자기 위주로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도 사람에게 중요합니다. 인간 신체의 구성을 보더라도 자연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형성된 것입니다. 자기 위주라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루에도 긴 수업을 마치고 들어왔을 때 지쳐 있는 것처럼 항상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반사회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일을 하고 나서 받은 월급을 주로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용합니다. 세세히 잘 관찰해 보면 아주 일상적인 일입니다. 일상 속에서 반사회적인 모습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자기를 위해서 휴식을 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상당히 반사회적인 상태이지만 이것도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연수 기간을 통해서 사회적인 관계를 갖고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연수가 끝나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앞으로 할 활동을 연구합니다. 이것은 반사회적인 모습이지만 아주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그 자체만 본다면 자기 자신만을 위한 반사회적인 모습입니다. 반사회성이란 항상 우리 안에 존재하면서 나 자신을 위해 필요한 삶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반사회성이란 게 전체 사회와의 관계에서 본다면, 개인적으로만 볼 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사회 전체 속에서는 정말로 반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만약에 경제적인 영역에서 나 개인만 우선시한다면 일의 목표가 개인적인 부자가 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들은 경제적인 삶에서 경쟁에서 이겨 이윤의 극대화를 이루는 것으로 모아집니다. 그래서 요즘 기업들은 많은 사람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생각하고 생산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생산해야 내가 돈을 최대한 많이 벌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기업들은 경쟁관계의 기업을 합병하고 조직을 국제적으로 확장합니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작업은 작은 단위의 조직을 다 벗겨냅니다. 발도르프학교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면 연말에 정산을 할 때 앞으로는 수입을 더 확대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본주의적으로 사고한다면 돈이란 가능성일 뿐이고 가능성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연말에 수입이 지출보다 많아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해서 이윤을 남기고 남은 돈으로 자기가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잘 보면 자본이라는 게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내가 많이 취하면 그 영역의 돈은 더 적어지겠지요. 이윤은 공장이나 회사에서 만드는 것이지만 학교에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라고 해도 어떤 책임자가 돈을 가져갈 수 있겠지요. 다행스럽게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고 교사들에게 급여를 좀더 나눠 주려고 합니다. 또는 필요한 땅을 더 확보하거나 전등을 바꾸는 등 그 사회의 공동체가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돈을 쓸 수 있습니다. 물론 발도르프학교라도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기 때문에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사회에 돈이 가고 획일적인 사회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법적인 영역에서도 이기주의를 볼 수 있는데요, 바로 권력의 집중입니다. 법적인 이기주의는 권력남용을 부릅니다. 우리가 법적인 삶에서 순수하게 경찰의 역할을 본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경찰입니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독일 사회에서 반핵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체르노빌 사건 이후에 더욱 반대가 커졌습니다. 거리로 나와서 손에 손을 맞잡거나 드러누워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민주 사회의 경찰이 생각과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경찰을 알고 있는데요, 이런 논쟁에 갈등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이 사고를 당하거나 누구에게 피해를 받으면 경찰이 돕습니다. 그런데 반핵투쟁의 상황에서 경찰은 전혀 다른 역할을 합니다. 원자로가 지어지는 공간이 있고 거기에 시민들은 반대를 합니다.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우리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래서 반대한다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자로를 짓는 대표는, 우리는 원자로를 짓습니다, 그러니 물러가 주십시오, 안 그러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시민들은 평화롭게 시위를 했지만 경찰이 오면 방망이와 물폭탄을 갖고 쓸어버립니다. 평등하고 균형 잡힌 사회처럼 보였지만 정부는 권력을 행사하고 시민은 무기력하게 당합니다. 반사회성이 개인 안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사회에 나와 권력의 사용으로 행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남용은 경찰, 군대, 그리고 소유권의 문제로 나옵니다.
자본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권의 남용에 대해 다시 설명하자면 한 도시에 땅이 있을 때 그 땅은 시민을 위해 국가가 관리하지만 권력의 사용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자본에 대한 것도 국민 중 5%가 98%의 재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억 정도 되는 사람이 전세계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이렇게 분배되어 있습니다. 아주 적은 사람만이 엄청난 자본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부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내 자신의 정신적 삶의 영역이 빠져 버리게 됩니다. 학교에서는 이제 아이들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현실에서는 학교에서 정신적인 영역을 작업해나가야 하는데 이 사회에서 다가오는 엄청난 물질적인 자극이 다가옵니다. TV를 시청하는 것도 정신적인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TV를 통해서 인지학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한 시간은 인지학, 한 시간은 사회삼원론, 한 시간은 뭐... 이렇게 견주어 보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TV 같은 공공의 매체가 여러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그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는 정보마저 소유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5% 정도의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인 삶은 자기 자신이 누려야 하지만 정보의 공유, 정보의 제공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그것에 대해 집중하고 관심이 있는지 모르지만, 2001년의 9/11 테러가 있었지요. 공식적으로는 이슬람의 집단이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파괴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의혹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한번은 독일의 한 방송국에서 이 의혹에 대해서 방송을 하려고 했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정보가 옳다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의혹에 대해서 방송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 방송국에서는 엄청난 혼란이 있었습니다. 방송국의 국장이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정치가가 와서 경고를 했습니다. 당신들이 이것을 방송하면 미국과의 관계가 안 좋아진다, 미국은 이미 공식적으로 정리를 하였는데 당신들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니 방송을 하지 마라. 여기서 정신적인 자유를 생각한다면 방송국은 이런 방송을 할 수 있고 시민들은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어야 했지만, 결국은 방송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민주사회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성숙되었는가를 보면 그렇지 않은 모습이 많습니다. 주체적인 결정이 못 되고 우리는 결정 과정에서 소외된다는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결정되거나 조정되고 정보가 제안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여러 가지 광고와 선전이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뉴스를 볼 때마다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뉴스에서 소식들을 전할 때 아나운서가 인사를 하고 세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전한다고 합니다. 15분이나 30분 만에 60억 인류에게 벌어진 일을 공지합니다. 물론 뉴스를 방송하는 관계자들이 소양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짧은 시간에 세계의 많은 일을 다 전할 수 있을까요? 15분, 30분을 하면서 세상의 일들을 전하면서 정보 전달만이 아니라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독일의 정치인들이 400명이 넘지만 TV에서 뉴스를 전달해 주는 사람은 여남은 명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 학교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봤을 때 위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정해서 전해 줍니다. 오히려 우리가 현장 속에서 찾아내야함에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집중을 요청합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지만 또 한편으로 반사회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동체라는 말 속에 이미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 그 안에서도 나를 위해서 쉰다거나 음식을 먹는 등의 반사회적인 일을 하지만 이것도 정당하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그래서 반사회성, 이기주의는 자기의 위치와 영역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혀 엉뚱한 곳에 가서 위치한다면 그 사회는 병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이 사회에 다르지 않습니다. 세포들의 성장이 자기 위치에서 잘 이루어지고 유기적으로 관계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혹이나 암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혹이나 암은 사회적으로 일어난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문제입니다. 반사회성이나 이기주의가 자기 자리를 떠나 공동체의 영역으로 간다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반사회성이 경제적인 영역으로 가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기주의가 되고 경제를 망가뜨리는 암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법적인 사회로 가면 평등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남용하는 존재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정신적인 삶으로 간다면 인간의 자유로운 삶은 타율적으로 조정되고 통제되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공동체와 학교도 이러한 세 가지 영역의 어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 영역은 유기적으로 관계하면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까 표징으로 생각했던 암이라는 것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니며 조직을 병들게 합니다. 법적인 삶의 암적인 존재가 경제적인 영역에 가서 파란을 일으킵니다. 이윤을 극대화하는 암적인 존재도 선전이나 광고에서 어려움을 만들어 갑니다. 그곳은 자기 자리가 아닙니다. 다른 곳에 가면 부자연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정리를 해보면 세 가지 영역의 암적인 활동이 전체 영역을 뒤덮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제 세 구조로 이루어진 질서입니다. 저는 희망하기를,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이 병들어 있는 사회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여러분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내일은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사회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고찰하고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살펴봤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려본 병든 상은 지워버리고, 사회삼원론에 대한 좋은 상을 추구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집중해 주셔서 고맙고 제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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