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 - 젠녹 5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 - 젠녹 5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16. 16:49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 - 2010723일 금요일




좋은 아침을 맞으셨나요? 저처럼 여러분도 잘 주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길로 쭉 왔는데요, 그러면서 몇 가지 예를 통해서 우리와 세상이 어떻게 연결되어 돌아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어제는 엄마와 아이의 사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완전히 내가 실재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슈타이너는 항상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일이 밝혀진다고 보았습니다. 안에 있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집중력 있게 실재를 살펴보느냐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이 세상과 분리할 수 있고 분리된 생각을 완전히 세상에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 능력은 자기 스스로의 동질성, 아이덴티티를 갖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자기의 고유함이 세계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관계성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퍼져 있는 많은 사상이 실재와 달리 자기만의 사고로 발달시킨 것이 많습니다. 자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본주의야말로 세상을 잘 읽어내고 경제생활의 실재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란 실재의 일부에 대한 관찰이고 아주 일부만을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일종의 자연주의의 산물입니다.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가 생존을 위해 싸운다는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주의 말입니다. 겉으로는 정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사고가 곧바로 경제질서로 형성돼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자본주의는 그래서 강한 자는 계속 강해지고 약한 자는 계속 약해진다는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야말로 현대의 우리를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이 세상의 실재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실재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땅에서 자라는 한 식물을 관찰해 봅니다.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 식물은 땅 속의 미네랄이나 물 같이 남의 것을 가져와 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는 관찰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 들어가서 결론을 끌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 우리가 관찰을 잘 해본다면 다른 사실을 발견합니다. 땅은 오히려 식물에게 주려고 합니다. 해와 구름과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나서 식물의 세계를 보면 식물들은 동물에게 음식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동물이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거꾸로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싸우는 관계라고 보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실재를 자기 생각대로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좀더 분명히 관찰한다면, 육식동물과 다른 자연과의 관계도 볼 수 있습니다. 육식동물을 독일에서도 흔히 자본주의와 견줍니다.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때 잡아먹히는 존재가 고통을 겪고 약육강식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르게 본다면 먹히는 동물은 자기 몸을 내어줘 육식동물의 영양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잡아먹히는 동물은 그 순간 의식을 잃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빛처럼 공기처럼 준다는 의미와 연관돼 있습니다. 동물은 무리의 혼을 갖고 있습니다. 유물론자들은 동물이 죽는 걸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슈타이너는 전체 혼의 부분에서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육식동물이 먹잇감이 되는 동물을 잡아먹지 않는다면 생태계는 혼란스러워집니다. 엄청난 번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제대로 자연을 관찰한다면 서로 잡아먹고 투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도와주고 협력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특징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연은 모든 것이 사람을 향해서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과의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광물의 세계를 본다면 우리의 몸에도 기본적인 광물의 세계가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 역시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 전체가 모든 영역에서, 어쩌면 우주 전체도 모두 인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더 잘 살펴본다면 자연 자체는 인간에게 존재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에 속해 있고 자연은 인간 존재의 기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이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인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연의 모든 기반을 취하면서 정신문화적인 활동을 하면서 영적인 산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복잡하지만 잘 만들어져 있는 자연은 인간 문화 활동의 기반입니다.


사회삼원론의 시각 역시 자연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정말로 진실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바라봅니다. 식물이 있고 그것은 태양의 빛을 받아들입니다. 식물은 그 빛을 훔치는 걸까요? 아니지요. 오히려 태양이 식물에게 빛을 전해 줍니다. 제 친구 중 하나가 휴렛팩커드라는 회사에서 근무하는데, 친구로서는 서로 좋아하지만 인지학을 갖고는 싸웁니다. 제가 인지학적인 관점을 얘기하면, 그 친구는 네가 널 이해는 하지만 넌 항상 거꾸로 생각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 상황에서 놀라운 것은요, 그 친구가 말하기를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관점을 배워왔기 때문에 지금 내 관점을 바꿀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사회삼원론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너의 말에서 모순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내 상황에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휴렛팩커드는 독일에서도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 회사는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회사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을 해고하는데 제 친구가 그런 일을 합니다. 제 친구는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회사에서 제품의 단가를 줄이기 위해 많은 사람의 생존 조건을 박탈합니다. 원하지는 않겠지만 동료들을 해고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동료들과 함께 잘 살아가길 바라지만 회사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짤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사회삼원론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어제 마지막에 얘기했던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를 다시 돌아봅시다.


저는 조건 없는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최저생계비는, 모든 인간은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재화를 가져야 한다는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최저생계비는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는 문화적인 생활도 누려야 합니다. 쉽게 말해 영화도 한 편 봐야겠고 소풍도 가고 책도 한 권 사봐야겠지요. 그 말은 최저 생계비란 창조적인 한 인간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워야 합니다. 학교에서 제가 12살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너희들 정말 뭐가 되고 싶니?” 거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아이들 각자가 삶의 동기를 통해 내가 이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대답이 옵니다. “저는 이것을 하고 싶은데 이걸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이것은 우리 시대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내적인 동기와 할 수 있는 능력을 찾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생리를 쫓아가려는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저생계비를 두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조건이 없어야 할까요? 어느 누구도 생계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입니다. 거꾸로 내가 생계비를 받는데 이것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니까요. 모든 사람이 일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사회가 타락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최저생계비가 있어서 일을 안 해도 된다면 정말로 이 세상은 일 안 하는 사람으로 넘쳐날까요? 유럽에서 이런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최저생계비를 받게 된다면 당신은 무얼 하겠습니까?” 즉자적인 대답은 그러면 일 안 하면 되지하고 반응합니다. 그런데 하루나 이틀쯤 일 안 한다면 삶이 지루할 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4%의 사람들이 끝까지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지금도 있지요. 일을 안 하려는 3,4%의 사람을 위해서 기본적인 생계비는 필요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40~50% 되는 사람은 지금처럼 계속 일을 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그동안은 돈에 얽매였는데 이제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이 돈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면 일에 대한 그 사람의 흥미도 사라질 것이다. 은행에 근무하는 사람, 재정이나 무역 등 자본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사람은 기초생계비가 주어진다면 자기 일에 흥미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은행이나 증권회사의 사람들도 이러한 최저생계비가 실현될 거라고 말은 하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프랑크푸르트의 증권가 사람은 수만 유로를 다루지만 최저생계비에 대해 공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관계하는 일들은 복잡하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굴러갑니다. 슈타이너는 문화적으로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대체로 일치하는 삶의 조건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기본적인 생활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인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있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로 인간의 모습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건 없음의 배경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이미 사회보장 지원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셋째 아이에 대한 지원금이 있겠지요. 환자나 노인을 위한 지원금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정말 조건이 없는지. 사실은 거기의 조건을 맞추어야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노인이 되어야만, 실직을 해야만 지원금을 받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거대한 국가가 있고 아주 연약한 존재에게 다만 살아갈 수 있게끔 돈을 줍니다. 독일도 그렇고 아마 한국도 그럴 텐데, 실직 수당이란 아주 간신히 살아갈 수 있게 할 뿐입니다. 정치가들은 어쨌든 우리 국민이기 때문에 굶어죽지 않게 하기 위해 돈을 주는 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이기주의적인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통해서 사람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만큼을 주는데 거기에 만족을 못할 테니까 열심히 일을 해서 채워라, 라는 이기적인 방식입니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사회보장 지원금은 우리의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의 재원은 어디서 올까요? 몇 가지의 상황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자급자족의 구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일을 통해서 여러 사람이 도움을 얻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렇게 조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금이 모여서 국가의 통에 담깁니다. 지금의 국가도 물론 세금 통을 갖고 있습니다. 요즘의 국가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경제 개발에 씁니다. 독일에서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광산업을 지원합니다. 철이나 석탄을 캐는 것이 비싸져서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광산업 종사자들은 살 수 없습니다. 만약 광산업 회사가 수익을 내지 못하면 문을 닫아야 하지만 국가는 지원을 통해 회사를 살립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석탄을 캐냅니다. 하지만 독일의 회사들은 외국의 더 싼 석탄을 사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광산업 회사의 문을 닫게 하고 노동자들에게 최저생계비를 주는 것이 맞습니다.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의 사상은 이미 이 사회에 적용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국가가 거둬들인 세금을 갖고 특정한 회사나 단체에 지원하기보다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생계비를 지원하는 게 맞다는 걸 압니다. 또 다른 세금의 일부는 학교를 짓거나 도로를 닦는 데 쓰입니다.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최저생계비를 제공해도 될 만큼 여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유 있는 나라는 이런 것이 지출되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이상적으로 좋다고 말합니다. 언젠가 그런 때가 올 거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부유한 나라들은 이것을 당장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 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도르프교사로서 가져야 할 책임은 한 아이를 고유한 존재로 이끌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사고를 사회삼원론에 입각한 새로운 문화로 바꿔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자리가 역사적이라고 봅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발도르프학교 교사들이 모인 자리입니다. 저는 여기에 제 생각과 의견을 말해달라고 요청받지 않았습니다. 사회삼원론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여러분에게서 왔습니다. 이 시점에서 슈타이너가 보면 상당히 긍지를 가질 텐데요, 발도르프교사들이 스스로 사회삼원론에 대해 알고자 했으니까요. 조건 없는 최저생계비에 대한 아이디어는 독일에서 발도르프교육에 의해서 퍼졌습니다. 하지만 현재 독일의 발도르프교육 운동은 상당히 침체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것은 굉장히 다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긍지를 가질 수 있고요. 그러한 긍지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쉬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독일은 주마다 독립된 연방정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주 정부의 관리가 우리의 이론을 알게 되었고 어느 정도 받아들여서 의회에 가져갔습니다. 방송이나 언론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많이 이해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 그런 생각을 하길 바랐습니다. 증권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 생각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도 했지만요, 억만장자(200개의 회사를 운영하는) 중에 괴츠 베르너라는 사람도 그런 경우입니다. 이 사람이 이미 자기 회사 경영에 이런 생각을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10명 정도의 영향력 있는 독일의 경제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몇 사람만 관심을 갖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이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성숙한 사회적 배경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는 이 생각을 받아들이기 충분할 만큼 성숙했다고 봅니다. 그럴 때 이런 사상이 꽃처럼 피어납니다.


남녀평등을 떠올려 봅시다. 독일에서도 40년 전만하더라도 여성이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남편의 서명을 받아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불과 40년 만에 남녀평등 사상은 퍼져나갔고 지금은 오히려 남자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엄청난 사상을 몇 사람이 해낼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미국 대통령에 흑인이 되었는데 몇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1960년대 미국의 버스는 좌석에도 흑백차별이 있었습니다. 백인 좌석에 한 흑인 여성이 앉았고 버스 기사와 다른 승객들이 일어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흑인 여성은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분쟁이 일어나서 이 사건은 순식간에 언론에도 공개됐습니다.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전 거리에서 흑인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 데모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버스에 앉았던 흑인 여성이 처음부터 미국의 흑인들을 해방시키리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정당한 행위를 한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이렇게 각자 하는 행위 속에서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회삼원론이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지 외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의 실천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흑인 여성이 모든 흑인의 권리를 보장하라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다녔다고 해봅시다. 사람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피켓을 들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요.


이것은 우리의 능력, 역량의 발현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질문한다면, 어떠한 조건이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여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최대치의 능력 발휘는 많은 조건이나 제약이 다가올 때보다 우리가 자유로울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능력을 계발하고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면 자유로운 삶입니다. 여기에 자유라고 썼습니다. 우리 안에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우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야 하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영역에서는 어떠한 약속의 조건이 성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할까요? 오늘날의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일자리를 구합니다. ‘여기는 내가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자리가 없네, 여기는 사람을 구하니까 여기서 일할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자리를 주고받는 계약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얼마를 벌길 원하는지 물어봅니다. 어느 정도 조건을 말합니다.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당신도 그런 조건을 말하지만 다른 사람도 더 있다는 걸 압니다. 일자리가 하나 있을 때 여러 사람이 있으면 고용주는 가장 싼 사람을 구할 것입니다. 이것은 불평등한 계약 조건입니다. 고용주가 위에 있고 노동자들이 경쟁하게 만듭니다. 또 고용주는 만족할 수 있지만, 노동자가 찾아와 돈이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용주는 당신은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반대의 상황도 있습니다. 여기에 고용주가 있고요, 회사는 운영이 어렵습니다. 특별한 기능이나 능력을 담보한 인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특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소수입니다. 고용주는 저 사람이야말로 회사에 필요한 인재인데 저 사람을 꼭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더 주겠다고 합니다.


발도르프학교를 봅시다. 정말 좋은 역사 교사가 필요한데 그런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부모도 원하고 시험도 준비해야 하니까 정말 좋은 역사 교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역사 교사가 옵니다. “저는 여기서 일을 하고 싶은데 저를 위해서 얼마를 드릴 수 있나요?” 그러면 교사회는 말합니다. “사실 저희 월급은 요만큼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역사 교사는, “, 그것밖에 안 돼요? 저는 이만큼이 필요하고 이만큼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교사회에서는 고민합니다. 그 교사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약을 해서 이만큼의 돈을 만듭니다. 실제로 독일 발도르프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보시다시피 불평등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그 역사 교사가 왔다고 했을 때 교사회는 어떤 분위기가 형성될까요? ‘,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작게 받게 되었구나.’ 만약에 우리가 한 사회조직을 유기적으로 관찰해 본다면 이런 불평등한 관계가 항상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기본 욕구인 경제적인 문제와 개인 역량의 문제가 약속 관계에 흘러들어왔습니다. 하나는 고용주가, 다른 하나는 노동자가 불평등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성숙한 책임이 있는 존재로 한 사람이 서기 위해서는 평등한 조건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평등이라고 썼습니다. 한국말로도 자유, 평등, 박애가 있겠지요. 슈타이너는 이러한 자유, 평등, 박애의 개념이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처음으로 발현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도 자유롭고 싶고 평등하고 싶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세 가지의 원칙이 우리 삶과 사회에 적용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유에 해당하는 능력의 분야를 살펴보면, 각자 다르고 편차가 있을 텐데 평등이라는 개념이 들어가면 또 문제가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라는 개념이 두 번째의 권리와 책임의 영역에 간다면 계약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통해 재화를 얻는 박애의 삶을 이미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평등의 조건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공산주의와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태생이 프랑스 혁명(파리 코뮌)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구조를 잘 알고 있지만 경제의 영역에도 평등을 요구합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옷도 다 똑같이 입습니다. 각 사람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봅니다. 그것은 곧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사람들 삶의 실재적인 것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고 전도된 개념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살펴보면 공산주의는 자유를 슬로건으로 내걸지만 아주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권력을 유지합니다. 자유가 실현되지 않는 것은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유기적인 조직을 만들지 못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도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신자유주의란 자유라는 개념을 기본욕구의 영역으로 뒤바꾸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처음에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올바른 개념에서 출발했지만 엉뚱하게 적용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회삼원론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의 영역이 하나의 일체된 모습으로 한편으로 독립하고 한편으로 서로 관계를 하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삼원론의 세 구조를 우리 인간의 삶과 연관지어 본다면 첫 번째는 경제적인 삶, 두 번째는 법적인 삶, 세 번째는 정신적인 삶입니다. 경제에는 박애가, 법에는 평등이, 정신에는 자유가 원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시간을 지체해서 죄송합니다. 내일은 학교와 연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학교란 문화, 정신적인 삶과 연관이 되고 신체와 비교하면 머리라고 할 수 있지만 머리 역시 가슴과 사지의 형태를 모두 띠고 있습니다. 입은 사지의 형태입니다. 가슴에 해당하는 리듬적인 부분은 숨을 쉬는 코입니다. 그래서 학교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처럼 경제적인 삶, 법적인 삶, 정신적인 삶이 다 들어 있습니다.



1. Bedurfniswese 기본욕구(본질적인 욕구, 사회적 욕구)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역할(감당)로 삶을 영위한다. => 경제적인 삶 - 박애

 

2. Mundigkeit 성인, 책임, 약속 이행할 수 있다. : 우리는 서로의 권리와 의무 이행으로 연습한다. => 법적인 삶 - 평등

 

3. Fahigkeiten 능력 :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발휘한다. => 정신 문화적인 삶 - 자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