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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전체성과 실재 - 젠녹 3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전체성과 실재 - 젠녹 3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16. 16:48

전체성과 실재 - 2010721일 수요일

 

 

오늘 아주 멋진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지난 이틀 동안 너무 힘드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스스로 여러분과 원활하게 작업이 안 된 것처럼 느꼈습니다. 원활하게 함께 하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강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실 것이고요, 통역이나 제 표현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통역을 통한 강연은 여러분에게 의식을 더 집중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일 거라 생각합니다.


어제 질문을 던졌지요. 우리는 어린이들의 삶의 동력을 찾아 줘야 하는데 이것은 곧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동력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아이들의 삶의 동력은 우리를 뛰어넘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옛날 세대인 우리가 아이들의 그러한 작업을 돕는 데에 과연 적합할까요? 이것에 대해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지, 사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있는데요. 여기에 간단한 조언이 있습니다. 슈타이너조적이고 생동감 있는 활동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이해하는 것 자체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이가 스스로 자기의 상태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학령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기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게 교사들의 역할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종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그리고 아주 자세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아주 예술적인 작업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예술적인 형태가 있다면, 거기에서 우리의 의식 활동이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과정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아주 협소한 사고를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고정관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내가 어떤 뜻을 전하고 싶은데 상대방이 전혀 이해를 못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방이 이미 형성된 사고의 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도 마찬가집니다. 상대방이 뭘 전해 주려는데 제가 잘 이해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아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어제 질문했던 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교사로서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태도는 우리의 사고가 항상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슈타이너는 강조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생각을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생각을 관찰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혼의 상태를 발전시킨다면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제 했던 영혼의 상태를 다시 그린다면, 감각혼의 특성은 호감과 반감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우리 영혼의 상태가 이것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가서 오직 호감만 갖고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감을 갖고 있는 친구들과 작업할 수 있을 것이고, 나와는 맞지 않는 아이들과는 작업을 할 수 없겠지요. 슈타이너는 인류사의 전체에서 본다면 감각혼의 시기가 수천 년 동안 유지되면서 발달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감각혼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습니다. 감각혼에 더해 지성혼의 힘이 작용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낯설거나 수수께끼 같은 아이들을 만날 때도요. 우리의 이해를 통해서 아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분석하고 따져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혼은 대상에 대해 분석하고 묘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많은 정보가 있지만 지성혼만 가지고는 그걸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혼의 힘은 외부에서 아이나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외부에 머물러 있는 관점입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이 많은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또 이 아이는 두려움이 많은 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지성혼의 능력은, ‘그렇다면 이 아이의 두려움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전의 경험 속에서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두려움을 갖는 걸 관찰했고, 두려움을 갖는 이유를 관찰했고,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것이 지성혼의 능력입니다. 하나의 관찰은 그 문제의 원인이 되고, 다른 관찰은 결과가 됩니다.


지성혼의 능력은 원인을 제공한 A와 그 결과인 B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A -> B. 오늘날 가장 두드러지는 상태는 바로 이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경험합니다. 호감이 갈 때도 있고, 반감이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지? , 원인이 이거니까 해결할 수도 있구나.’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통해 사고하며 살아갑니다.


농업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화학비료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그것을 들여다보면 화학비료란 놀라운 관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물에게 뭐가 필요하고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들에 있는 식물에게 이런 것들을 공급합니다. 수십 년 동안 이런 작업이 이루어질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땅은 병들어 갑니다. 감각혼과 지성혼까지 왔을 때 우리는 많은 걸 이해했다고 보지만 새로운 문제가 노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환경도 살펴봅시다.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잘 키워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키웁니다. 아까와 똑같은 원리로, 아이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교과과정을 만듭니다. 그것을 통해 아이들을 키워 세상에 내보냅니다. 우리는 교사들로서 다 이렇게 했지요. 그런데 삶을 위해 아이들이 잘 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 아이들은 상당히 지쳐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생각하기로는 이 세상과 작업들에 대해 이해하고 관찰했다 여기지만, 사실은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은 항상 개별적이고 분절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분절된 것들을 관찰하여 우리의 의식을 형성합니다.


오늘날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이러한 사고에 의해서 생긴다고 봅니다. 왜냐면 아주 복잡한 문제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절하여 부분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발도르프교사들도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사고의 패턴을 가지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도 새로운 사고를 형성해야 합니다. 아마 선생님들 중에 어제 우리가 다 했는데... 또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이해했어이것 자체는 지성혼의 단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의식혼의 특성을 내면으로 가져와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해바라기를 통해서 관찰했습니다. 지성혼의 단계에서는 항상 외부에서만 관찰합니다. 여러분은 각각의 부분을 자세히 관찰했지만 그 부분들은 하나의 전체이고 전체적으로 작용함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이 된 사진을 보고 거울로 또 내 모습을 봅니다. 사진과 거울의 형상을 비교해 봅니다. 사진의 모습도 나이고, 거울의 모습도 나이며, 다르지만 같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의 모습, 현재의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습도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오로지 현재의 상태만 주목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과거의 사진이나 자료를 통해 과거를 떠올리는 작업을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과거는 이미 동떨어진 것입니다. 한 살 때가 존재했지만 이미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분들이 어디선가 경험을 함께 한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러한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미래에도 존재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미래에 존재할지는 잘 모릅니다. 오로지 현재의 좁은 현실만 있습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존재는 현재만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전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의식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슈타이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얘기했을 때, 과거? 중요하지 않아. 미래? 중요하지 않아. 나에겐 현재만 중요해. 이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발도르프교사의 자격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발도르프교사는 전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불확실하거나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요. 이러한 관심과 태도가 우리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의식과 사고의 형성은 한 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한 아이를 관찰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전체적인 모습을 획득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앞에 있는 특성들을 다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포함하면서 전체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존재의 본질을 우리의 의식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작업이 의식혼의 영역입니다. 이러한 특질이야말로 우리 교사회에서 서로의 의견을 함께 조율해 나가는 능력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교사회에서 아주 뜨거운 주제를 갖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급하게 진행하려는 사람이 있고 격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그 상황에서 우리가 감각혼의 특성만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가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겠지요. 그러면서 자기 편을 만들어서 좋아. 우리는 한 편이 되었어!’라고 합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똑같은 패거리를 만듭니다. 이제는 패거리와 패거리가 충돌합니다.


지성혼의 영역에서는 자기가 왜 정당한지 이유를 찾습니다. 내가 왜 옳은지를 찾습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패거리도 정당한 이유가 있고, 저 패거리도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슈타이너에게도 항상 이런 문제가 교사회에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위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인데, 지금 여러분의 수준은 아주 바닥에 있습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슈타이너가 패거리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옵니다. 당시에는 슈타이너가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권위와 역할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슈타이너를 지금 모셔올 수는 없고, 우리 스스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오늘날은 여러 패거리 중에서 누가 더 정당한 게 아니라 더 강하기 때문에 해결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좀 더 강력한 패거리가 이끌어나갑니다. 그렇지만 강력한 패거리라고 해서 정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작은 패거리 또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원하지는 않지만 큰 패거리에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 두 사람 나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다른 지점으로 간다면 전체를 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쪽과 저쪽의 양극단이 아닌 제3의 새로운 지점에서 전체를 바라봤을 때는 양쪽 입장을 다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관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런 작업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사회와 교사회를 치유하면서 통일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고, 이것을 통해 우리의 의식혼을 발달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제부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사에서도 이런 과정을 지니고 있으며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과정의 방향을 본다면 의식혼까지 발달하면서 사랑이라는 원리가 우리 내면을 지배하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이 작업이 아주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한 이유는 단지 여러분들에게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제 본인에게도 얘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작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작업해야 할 내용을 위해서 정확한 도구를 하나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리를 두면서 관조하고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필요합니다.


교사로서 우리는 아이들을 맞이합니다. 빛이 나고 똘망똘망한 아이들이 옵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요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가면 어떨 때는 그러한 행복감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해야 할 일이 책상에 가득 쌓여 있습니다. 밀려 있는 일들이 잔뜩 있지요. ‘이거 나 오늘 못할 것 같애. 나 기운 없어.’ 이러는 중에 동료 교사가 못마땅하게 쳐다봅니다. 아까 묘사한 아이들을 만났을 때는 호감이 작용합니다. 교무실에 올 때는 반감이 작용합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요. 그 다음에는 이유를 찾습니다. 내가 왜 행복감이 들고 반감이 들까? “나는 정말 동료를 이해하고 싶고 얘기를 듣고 싶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이해를 못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감과 불행감이 교차하면서 완전한 만족감을 못 느낍니다. 계속해서 불행한 마음이 이어집니다.


만약에 의식혼의 지점에 오게 된다면, 항상 힘들고 화가 나는 동료가 있다고 해도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나의 의식 상태에서 이 사람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왜 내가 이 사람과 힘들어하는지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를 원하면서 내 의식 안에 얼마만큼 형성되었는지 보면서 사랑의 원리로 돌이켜봅니다. 나의 의식 상태를 보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이 사람이 당신이 화를 냈다. 당신이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성혼까지의 단계입니다. 의식혼의 지점에서는 상대방의 화라는 것은 나에게서 온 것이다. 저 사람이 화를 낸 것은 약해진 내 영혼의 상태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화를 낸 것을 상대방에게서 원인을 찾고 지적하기보다, 내 안에 있는 화를 풀기를 원하는 것이다.’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당사자가 결국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방도 해결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서만 말했지만 이런 상황은 우리 삶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계속 이런 의식혼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을 강화해나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외형적인 것, 상대방을 바꾸려고 노력해왔다면 이제는 나의 내면적인 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아주 신비롭게도 이 세상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와 만나는 다른 사람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사로서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돼주어야 합니다. 교사 스스로 변화할 때 아이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한 게 있습니다. 오이리트미가 중요하고, 화학이 중요하고, 또 무엇이 중요하고... 각각의 교사들이 자기 과목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담임교사가 와서 담임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상급교사들은 약간 위축되어서, “그런데 우리도 중요하거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런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모든 과목과 모든 교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이들에 대한 교사의 태도이다. 그 태도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열려 있는 자세이다.” 그러한 덕목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가 앞으로 풀어갈 이야기들의 배경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오늘 좀 더 얘기해볼 것은, 벌써 이곳을 떠나야 할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 사회삼원론의 기본적인 사고를 정리했으면 합니다. 잠깐 쉬고 하겠습니다.


*


우리는 월요일날 이미 슈타이너의 사회삼원론이 사회의 현상들 속에서 배태되어 나왔다는 걸 들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별로 연관이 없는 생각은 세상에서 낯선 것이 됩니다. 오히려 반대로 세상의 것들을 내 안으로 가져올 때 비로소 내가 이 세상의 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 문화를 본다면 지금과는 다르지만 당시에는 세계와 하나의 일체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역사 수업 속 이집트의 파라오나 로마의 카이사르 같은 존재는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본다면 지배계급의 사람들이 지혜롭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 사람이 자신의 목표나 지향만을 갖고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지요. 전쟁을 벌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 때 지혜롭게 풀려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어렸을 때 이집트의 파라오는 수많은 노예를 희생하여 피라미드를 만들고 권력을 누렸다고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문화적 전성기에는 파라오가 신의 권위를 인정받아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또 파라오는 신의 지혜를 통해 사람들을 잘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어린이들이 교사를 따르는 것과 같이 파라오를 따랐습니다.


유럽의 문화나 한국의 문화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통치자가 하늘의 권위를 갖고 백성을 통치하고 사람들은 통치자에게 순종했습니다. 통치자의 권위는 영적인 소통을 통해 왔지만 정신세계와 멀어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지상의 권력으로 변질됩니다. 영의 세계와 점점 분리되어가는 것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실 이 땅의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식이 깨어나면서 이전에 지배를 받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발달시켜 나갑니다. 유럽과 한국에도 민주주의 시대가 왔는데, 국민이 주권을 갖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런지 봐야 하는데, 우리는 4년에 한 번씩 투표를 하면서 권리를 행사합니다.


슈타이너는 실제로 우리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옛 질서의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의 지배구조가 여전히 있습니다. 그것이 투표를 하거나 의회구조를 갖고 있더라도요. 권력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묘사해 본다면, 사람의 몸 중 머리만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우리의 현재 정부의 형태는 하나의 권력 형태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지배구조는 규칙과 법률을 정해서 모든 사람이 따르게 합니다. 당연히 법은 필요합니다. 질서가 유지되고 보호를 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정부란 우리에게 필요한 법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합니다.


오늘날에는 예전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의 권력가 아니라 화폐와 같은 매개를 통해 권력이 존재합니다. 예전처럼 군대를 통해서 지배하는 게 아니라 돈의 작용을 통해서 지배합니다. 학교가 있지만 정부로부터 돈을 지원받습니다. 하지만 발도르프학교는 지원받지 않습니다. 이 사회는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실제로 본다면 학교의 운영을 위해서 정부는 발도르프학교에 지원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돈에 의해 학교 역시 정부(국가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예술단체에도 지원금을 줍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영혼 생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당연히 경제적인 삶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지요. 예를 들면, 어떤 연구가 중요하다고 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을 때 거기에는 정부의 의도가 있습니다. 생명역동농법을 추구하는 단체에는 전혀 지원이 없습니다. 반면에 유전공학 단체에는 엄청난 지원이 이루어집니다. 좀 더 의식적으로 찾아보자면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습니다. 이러한 지배구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절반에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 그런 건 특별한 문제가 없어. 괜찮아. 지금은 전반적으로 예전보다 나아졌어.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고 정치권력의 압박도 줄어들었어.’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좀 더 대안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면요. 아주 고도의 기술로 구성된 사회입니다. 아주 많은 가능성을 가진 기술이지만 그 기술로 인해 많은 재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냉장고, 에어컨 등 유용한 것도 있지만 원자폭탄과 같은 심각한 위험도 상존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직업생활이 잘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한데요, 위에서부터 분배되는 것을 잘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살펴봐야 할 것은 지금 이 사회에서 자원이란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원이나 재화가 제한되어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거기에서 너무 많이 가져간다면 나머지가 모자라게 되는 건 당연합니다. 내가 어떤 제품을 어떻게든지 싸게 사 온다면요,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반대편의 생산자들은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차 재료, 자원을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확보하기 위해 내가 노력을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서, 어떤 조직에서 수입원이 있으면 그것을 나눠 가져야 합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한 경쟁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학교의 교사회에서도 학교 재정을 나눌 때 의견 다툼이 있습니다. 교사 중에 자녀를 가진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어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각각의 주장은 옳을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있어서 돈이 더 필요할 수 있지만 혼자 사는 사람도 살 집과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재정은 제한되어 있는데 지성혼의 영역으로 생각한다면 왜 나에게 이것밖에 주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분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서로 이기적으로 싸운다면 점점 인간적인 면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러한 경쟁의 관계는 원인이 있습니다. 가족을 가진 사람은 꼬우면 가족을 가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신인 사람은 너네가 좋아서 낳았지, 학교가 낳으라고 했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사회의 전영역에서도 고용주와 노조 간의 싸움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이 사회는 승자와 패자가 생기고 그것이 반복됩니다. 어쨌든 간에 어떤 모습이 존재하냐면, 자기 위주의 관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관점은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제한적 조건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이기적이고 자기 편의적인 생각이 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요, 돈의 문제뿐만 아니라 의견이나 주장을 갖고도 이러한 경쟁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우리가 물어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경쟁적인 관계를 정말 좋은 방법으로 풀 수는 없는지 묻습니다. 교육적인 관점으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요?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지 않고 교실에서 수업에만 집중할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힘든 문제입니다. 사회의 구조나 경향이 우리 삶에 밀고 들어옵니다. 그 말은 곧 사회 전체가 우리를 압박하고 있고 우리에게 병적인 현상을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용기를 잃게 하기도 합니다. 이 사회의 모든 질서 속에 편입된 사람들은 더 이상 형제자매의 관계가 아닌 경쟁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모가 자기 아이를 위해 자녀가 수준 높은 학력을 얻기 원하고 이러한 경쟁 속에서 승리하기를 희망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이 마비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하고 안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속 이 사회는 사회질서에 편입되어 잘 맞을 수 있도록 요구하고 압력을 행사합니다.


이 사회적인 모습이 규정하는 것처럼 이것이 진정으로 실체인가?’ 하는 것에 대해 슈타이너는 좀 더 독립적인 사고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디에서 이기주의가 발생했고 어떻게 그것이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가?’ 옛날로 돌아가 수렵과 채취의 시기로 가봅시다. 그때는 내가 필요한 재화를 내가 밖에 나가서 구해왔습니다. 사냥꾼이나 어부는 스스로 양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시기는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했습니다. 오늘날은 전혀 다릅니다. 생각해 봅시다. 여기 있는 의자들은 누가 만들었나요? 자기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자기가 만들었나요? 이 노트북은 스스로 만들었나요, 어디서 사냥해 왔나요? 전기제품과 전기는요? 결국은 우리가 평상시에 먹는 음식이나 쓰는 물건은 다 다른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처럼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다 다른 데에서 만들어지고, 학교에서 필요한 돈은 부모님이 가져다줍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우리가 자기 스스로 일해 스스로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우리가 쭉 살펴보았는데 우리의 사고는 아직 그 실재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한 일에 의해서 내가 산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의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모든 의식주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고도의 사회적인 관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육적인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작업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실재란 고도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만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에 매여 있습니다. 사회삼원론에 접근하기 위한 첫 걸음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미숙한 사고가 아니라 실제로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박애에 따라 서로 도우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기 전에 제가 왜 오늘날 새로운 의식혼의 사고가 필요한 것인가를 이야기했냐면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고 창조적인 사고가 필요한데 그것은 실재를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일단 마무리를 하고 싶은데요, 오늘 떠나시는 분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서기록을 꼭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슈타이너는 사회적 주요법칙의 첫 번째 문장에 정리했습니다. 맨 앞에 있는 문장이 가장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프린트를 나누어 드릴 테니 앞으로도 계속 봐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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