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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이기주의의 극복과 사회삼원론의 이해 - 미하엘 데부스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현대 사회 이기주의의 극복과 사회삼원론의 이해 - 미하엘 데부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5. 12. 17:11

현대 사회 이기주의의 극복과 사회삼원론의 이해

 

미하엘 데부스

 

사회는 인간을 법칙에 맞게 행위하는 존재로 만든다.

인간은 오로지 스스로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이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저 아침부터 좋은 일만 하는 사람? 그럼 선한 것이란 무엇인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진리가 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지 절대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선하다고 하는 것이 워싱턴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지금은 본인의 의사나 개인적 사유에 따라 군입대 거부를 할 수 있지만 15년 전에 군입대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이유를 증명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본인이 비폭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서 군에서는 테스트를 했다.

당신이 있는 곳은 학교 건물 3층 복도 창가에 서 있다. 창 아래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그런데 때마침 학교에 미치광이가 난입해 아이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죄 없는 아이들이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침 당신이 서 있는 창가에는 무거운 돌이 놓여 있고 그 미치광이는 그 창 바로 아래에 서 있다면 당신은 이 돌덩이를 아래로 던지겠는가?”

돌덩이를 던지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은 자신이 비폭력주의자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비폭력주의는 선한 것인가? 그럼 이러한 상황에서 미치광이를 향해 돌덩이를 내던지는 행위는 선하지 않은 것인가? 내가 돌을 던지지 않는다면 미치광이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는데도?

독일군은 비폭력주의자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독일의 군대는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무기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 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선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우리가 운전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폭력주의자가 아님이 증명이 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만으로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교통법칙을 만들어 준수한다. 하지만 내가 교통법칙을 잘 지켰다고 해서 교통사고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독일에서는 교통법칙을 준수했더라도 일단 교통사고가 나면 차의 크기에 따라 그에 따른 벌금을 물어야 한다. 모든 운전자가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가?

본래 도덕법칙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없을 수도 있다. 절대적 도덕법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모든 법칙에는 항상 맞아 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언제나 생겨난다. ‘살인하면 안 된다는 기본법칙이 안 맞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짜로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면 상황마다 새로운 결정이 일어나야 한다. 내가 맞다고 결정을 한 10분후 다른 사람은 그 결정이 틀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도덕적 결정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다. 도덕적 결정은 사람이 가지는 커다란 책임감이다. 그럼에도 그 커다란 책임감을 매순간마다 기꺼이 짊어지고자 한다면 진정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우린 이와는 달리 다른 관습에 익숙해져 내 책임을 다른 사람(또는 사회)에게 떠맡기려고 한다. 사회가 당신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좋은 사람인가? 자유로운 사람은 사회가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예를 들어, 사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나눠주라고 요구할 때 내가 기꺼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나눠준다면 사회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한 선행을 베풀었다면 나는 덜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회의 법칙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사회에서는 이 법칙이 유효하고 가치 있다. ‘가치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결정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역사 속의 위인들은 바로 사회의 법칙에 대항하여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동이란 무엇이고 성인이란 무엇인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아동과 성인사회는 도덕적 법칙을 가지고 있다. 아이는 어른에게서 그 법칙을 배운다. 어른의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를 아동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성년식은 더 이상 어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것이 없고 이제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되겠다는 의미이다. 이 성년식을 통해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배우고 들은 것, 가르치는 모든 법칙(선인들의 지혜, 조상들의 가르침)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사회의 법칙들은 혁명을 통해서도 바꿀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의 파라오나 종교 지도자들(부처, 공자, 맹자...)로 인해 새로운 것들을 만들 수는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일생에서의 청년기(14~25)의 변화

독일에서는 14세에서 25세 사이의 연령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 한국에서는 이 시기의 사람들을 어떻게 지칭하는가? 청소년? 젊은이? 그럼 이후부터 이 시기의 사람들을 청년으로 지칭하자.

이 시기는 아동기에 배운 법칙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아동은 가르침만 받는 데 비해 청년은 더 이상 가르침만을 받고 싶지 않다. 아동의 법칙이 더 이상 청년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 시기의 청년이 새로운 법칙을 만들 필요는 없다. 옛 규칙이든 새로운 규칙이든 더 이상 청년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청년은 위험성에 놓여 있다. 외부의 규칙이 없다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청년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시험해 보고 도전해 볼 수 있다.

이런 미덕(넌 할 수 있어!)은 미국에서 발달했다. 이러한 미덕은 선인들의 지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면서 배운다는 사상이다. 동양의 사상 배운 다음 행하라와는 달리 서양의 사상은 행한 다음 깨우쳐라이다. 미국은 그래서 젊은 국가이다. 하지만 아직 성인이 된 것은 아니다. 미국 정치를 보면 성년이 되지 않았음을, 무르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참 창의적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입관이 없기 때문에 좋은 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이 시대 모든 민족,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야 할 변화이다. (미국적 시기)

청년기가 행하면서 배우기만 하는 시기는 아니다. 그들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 어른보다 영적인 세계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지상세계에 부족한 것을 무의식으로 안다. 의식적으로는 다른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어른들이 모르는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 물론 어른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영역이 있다. 지상세계에 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이 시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이상적인 것은 청년과 어른이 서로 융합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돕는다면 훌륭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청년은 지금 보고 있는 지상세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른들이 그들에게로 청년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바로 어른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른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청년은 이상을 가지고 온다. 행하면서 배운다. 우리가 청년의 시기를 받아들인다면 자신도 변화하고 사회도 변화한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청년과 성인 사이에 서 있다면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고정된 것에서 매순간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선 힘들게 노력해야 한다. 청년에게는 늘 이런 태도가 있어야 한다.

청년은 어른들과 갈등하며 스트레스를 만든다. 순종하는 사람과 도전하는 사람의 차이... 스트레스를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을러서 이런 각오가 없다면 청년기를 이룰 수 없다. 청년기는 또한 위험한 시기이다. 지켜와야 했던 옛날 규칙들을 지키고 싶지 않고 새로운 규칙도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게으른 청년은 혼란(중독, 탈선...)에 빠질 수 있다. (청년기의 양면성)

아동이 청년기에 도달한다면 이제 어른이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무언가 교육하고자 한다면 아동기 때 이루어져야 한다. 매순간마다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청년기 다음에 맞이하게 되는 축제가 무엇일까?

제대로 된 청년기는 절대로 끝이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청년의 길을 포기했다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라건데 너희들이 청년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를...”

건강한 청년기 다음에 맞이하게 되는 축제는 성스러운 장례식인 것이다.

아동기와 성인기의 구분은 옛 사회의 규칙이다.

인생이란 오로지 아동기와 청년기뿐이다...”

양팔저울에 일생의 무게를 달게 된다면 평형을 이루기 위한 중심점이 위치하는 시기는 14세이다. 양팔저울의 한쪽이 1~14세의 아동기라면 나머지 한쪽은 아동기를 제외한 나머지 청년기로 볼 수 있다. 아동기와 청년기가 비등하게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청년기보다 훨씬 짧은 아동기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 인생의 비중에서 반을 차지할 만큼 아동기가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청년은 사회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 자유

청년이 청년기를 받아들일 수 없을 수도 있다. 약물 중독 등 청년기에는 많은 것에 중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행하는 특정한 복장을 하지 않으면 또래로부터 수용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의견을 가져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를 찾지 못한다면 위기가 발생한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한 가지 힘이 발생할 수 있다. 이 힘이 이기주의이다.

 

인간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

인간의 몸이 세상과 연결되어 세상의 영양분을 흡수한다. 손과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인간의 감각은 세상으로 열려 있는 창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신생아는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세상과 자기가 일치되어 있다고 여긴다. 두 살(만 2세)이 지나면서 세상과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천천히 준비되는 시간을 통해 두 살이 되어서야 내가 세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두 살이 되면서 반항기가 시작된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아니야! 싫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아니야!"라고 말하는 건 "난 네가 아니야!"라는 뜻이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가, 언니가, 책상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는 자아의 발생이다. 자아는 부정적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이 시기엔 아직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일 년 정도 지나서야 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때 아이들에게 라는 단어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고 자기 이름은 긍정적 의미를 담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나는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요하네스는 할 거야.", "난 싫어. 아스트리트는 이게 좋아..."

처음 라고 말한 이후 라고 말할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네 살 정도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다. 사회적 발달의 시작은 부정(반감)으로부터 출발한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걸 원해! 너는 그걸 원해?) 하지만 라는 말만 할 때는 자기를 찾을 수 없다. ‘도움증후군에 걸려서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남의 일, 세상의 일을 돕고자만 하면서 자신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이 되기 위해선 이기주의가 있어야 한다. 이기주의는 사회적 발달의 전단계이다.

나라고 얘기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문장은 한국적 정서(내 욕구보단 남의 욕구를 중요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보단 어지간하면 수용, 좋은 게 좋은 거. 내가 참지, 져주기...)와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상황에서도 이 문장은 유효하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오!"는 이기주의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로부터 가장 작은 이기주의를 엿볼 수 있다.

이기주의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발전시키는 것이다.”

는 이기주의이다. ‘는 진보한 이기주의이다. 우리는 굉장히 넓어진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에서 나와 친구, 나와 가족, 나와 사회, 나와 세상을 위한 폭넓은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자유는 내면의 영혼 영역이다.

신체를 통해 영혼은 세계와 접촉한다(지상세계). 정신을 통해 영혼은 사고와 관계한다(정신세계). 이곳에서 모든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정신(남성성)이 영혼(여성성)의 열매(새로운 아이디어)를 맺게 한다(잉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정신, 영혼, 신체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사람에게는 영혼이 가장 중요한 영역에 속한다. 영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는 것인가?

다른 교통운전자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교통규칙은 모든 교통운전자와 지키겠다는 약속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따지지 말고 우리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어떤 약속이 필요한가를 말하라.

몸에만 충실한 사람은 감각에만 충실하다. 영혼에만 충실하게 되면 규칙만 따르는 보수적 공무원(관료주의)과 같다. 정신만 발달한다면 이념주의(이데올로기)가 만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폭군정치라는 아이디어가 있다. “우리 사무실엔 색깔 있는 창문이 최고야물론 이러한 주장이 맞을 수도 있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무조건 모든 창은 색깔 있는 창이어야 해!” 하고 주장한다면 주변인에겐 폭군이나 다름이 없다. 이 폭군은 색깔유리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이데올로기가 있다. 아이디어를 가진 폭군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 영역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사회적 규칙이 이 세 가지를 통합해서 사회적 인간을 만든다.

사회도 신체, 영혼, 정신을 가지고 있다. 경제의 원형을 예로 들겠다.

- 신체적인 면: 생산자, 소비자

영혼적인 면: 법칙과 약속

정신적인 면: 창조, 창의

옛 사회에서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이것이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 세 가지를 다 주관했다. 

지금의 사회를 살펴보자.

경제적인 삶: 생산과 소비

이것도 국가가 관장을 하려 한다. 만약 공황상태가 된다면 사회적 무리가 오는 것인데 국가가 나서서 생산과 소비를 관장하려 하는 것이다.

법적인 삶: 국가

법칙을 만들어 재판을 주관하고 다른 나라와 관계(외교)하는 일을 한다.

정신적인 삶: 종교와 교육

이제는 교육도 국가가 책임을 진다. 옛 이집트에서는 이것이 맞는 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무엇이 이 세 분야를 통합하는 것인가? 사회는 어떻게 청년사회가 될 것인가?

만약 세 분야가 더 큰 외부로부터 통제되지 않는다면 청년기가 망가질 수도 있다.

프랑스는 정신세계와 온라인 상태에 있는 나라였다. 유럽에서 가장 큰 첫 번째 혁명이 이 나라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었다.

지금의 경제적인 삶은 이기주의적인 삶이다. 소비자는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나 원하는 과일을 먹고자 한다. 재배환경과 상관없이 원하는 과일을 먹고자 한다. 그래서 생산자는 자연농법이 아닌, 막대한 에너지가 투입되는 농법으로 재배를 하고 먼 나라에 갈 때까지 썩지 않고 이송하기 위해 농약에 절여 보낸다. 소비자는 적은 비용으로 많은 양을 얻기를 바란다. 생산자는 이득을 얻기 위해 대량생산 체제(과다 농약살포, 유전자 조작 등)로 먹거리를 생산한다.

경제적인 삶은 소비자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필요에 따라 차이점이 크다. 생산자는 그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 가치로운 경제적 삶은 각 개인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생산자가 그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기주의 정신이 아닌 박애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다. 소비자는 그 가치에 따라 윤리적 소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법적인 삶의 가장 전형적인 특성은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개인의 차이가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정신적인 삶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종교나 교육 영역은 다른 것이 아닌 자유가 지배해야 한다. 각각의 삶에서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종교적 자유의 문제점을 말하자면 종교를 선택하는 것에는 자유가 부여되더라도 종교를 선택하고 난 뒤에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다면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싶은지를 찾을 때까지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재육화를 믿어야 되는지 아닌지는 미리 정해놓고 싶지 않다.

교육에서도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올바르게 교육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교육에 관해 어떻게 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명 그 안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독립적인 학교가 있다. 재정적 도움을 국가가 주고 무엇을 교육할지는 국가가 결정하지 않아야 한다. 서로가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지양한다면 건강할 수 있다. 경쟁은 정신적인 삶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학교는 정신적인 삶에 속한다. 세 가지 영역 모두에 속한다. 학교는 경쟁해서는 안 된다. 학교들 간의 경쟁이라는 것은 수업료로 하는 것이 아니다(경제적 능력으로 갈 수 있는 학교). 학교가 경쟁한다면 어느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할까? 바로 자유로운 정신적인 삶의 영역에서이다.

경제적인 삶은 인간의 욕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소비자의 욕구에 의해 생산자로부터 제품이 생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회사가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내고는 거대한 광고를 통해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한다. 욕구가 생산을 자극하는 것이지, 생산이 욕구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

정신적인 삶은 반대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아이디어 가지고 있다. 이 좋은 아이디어는 타인의 욕구와는 무관하다. 누군가 자신의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서 "세계가 동참해야 해!" 하고 외칠 때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라면 사람들은 동참한다. 좋은 생각(아이디어)은 광고(홍보)를 통해 소비로 이어져야 한다.

발도르프교육은 좋은 아이디어이다. 그래서 소비하는 부모가 있는 것이다. 발도르프 선생님은 생산자이고 부모는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부모는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으나 누군가가 와서 발도르프교육이라는 걸 알리면 부모는 소비하려는 욕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정당한 과정이지만 경제적인 구조이고 이러한 영역에서는 광고를 해도 괜찮다. 이것은 경제적인 삶의 유효법칙이 정신적인 삶에서 유용하게 사용된 예이다.

각각의 세 가지 영역 모두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이 모든 것을 관할했다. 현대의 삶에서는 각각 영역이 독립된 영역 안에서 행정과 감독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법적인 삶, 경제적인 삶으로부터 독립된 상황에서 정신적인 삶이 연구되어야 한다.

소비자는 우린 이러 이러한 제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생산자는 박애 정신을 가지고 정당한 가격을 책정하여야 한다. 청년 사회는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분야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스스로 각 분야를 관장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구성원 간의 합의된 거대한 약속이다. 국가가 신체와 정신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신체적인 면

영혼적인 면

정신적인 면

삶의 형태

경제적인 삶

법적인 삶

정신적인 삶

표출 형태

기본욕구, 충족

(소비자와 생산자)

법칙, 규칙

(국가)

창조, 창의

(종교, 교육)

바탕이 되어야할 정신

박애

평등

자유

 

 

Q: 청년기 때 적용하는 사회적 규칙, 예를 들어 학교 내의 교칙 같은 것들이 청년기의 양면성에 상충되는 것인가, 아니면 상호 보완되는 것인가?

 

A: 사회적 규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청년을 위한 것이라면 청년과 함께 그 사회적 규칙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청년이 그들이 만든, 그들을 위한 그 규칙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만든 일방적인 규칙을 청년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출처 : 2008.10 정리 박언, http://cafe.daum.net/iraum/HGWa/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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