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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간 발달과 의식혼 - 젠녹 2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인간 발달과 의식혼 - 젠녹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16. 16:47

인간 발달과 의식혼 - 2010720일 화요일




- 어제 권력의 단일한 지배구조를 말씀하셨는데, 그 권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국가권력인지, 자본권력인지? 그 변화도 있을 테고, 슈타이너 당대에도 이미 자본권력이 공고했을 텐데요.


- 우리는 이미 과거의 세대이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우리 아이들의 몫이라고 들었습니다. 고정화된 시각을 가진 어른들이 과연 어떤 교육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거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발도르프교사는 얼마만큼 유연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고정된 틀 속에서 얼마만큼 해야 하는가요?


- 사회삼원론에 대해 들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듣기를 기대합니다.


-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서 각각의 개인에게 권력이 분산되는 민주주의가 지금 시대에서 계속 퇴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분산되어 있는 권력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어떻게 이 사회를 진단하시는지요?



잘 주무시고 좋은 아침을 맞이하신 것 같습니다. 어제 우리는 중요한 주제를 조금 진전시켜 보았습니다. 사회삼원론의 뿌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슈타이너가 당시에 이 생각을 어떻게 펼쳤는지도 보았습니다. 사회를 보면서 사회 주변부에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작용이 또 다시 사회 중심부에 작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에는 생명역동농업, 인지학적 의학, 발도르프교육, 그리고 사회삼원론 운동 등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각 개인과 민중은 새로운 의식을 형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슈타이너는 당시의 정치인들 속에서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걸 보면서 교육을 통해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많은 사람이 잘 모르겠지만, 발도르프교육은 흔히 교육적인 계기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슈타이너가 교사들에게 어떠한 것을 문제제기하고 제안했는지 들여다볼수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마치 창끝처럼 세상의 새로운 발달에 역할을 해야 한다고 교사들에게 제안했습니다. , 발도르프교사나 인지학자는 세상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완전히 준비하여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그래서 사회삼원론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그 이유와 근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조금 답답하게 느끼실지 모르지만, 단어나 개념을 적고 그에 대해 정리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생각이 어떻게 발전되고 전개되었는지 살피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의 사고 형성을 함께 해나가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익숙한 방식이 아닙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슈타이너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전통적인) 틀에 박힌 사고방식이 새로운 사고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였습니다.


슈타이너가 강연할 때 어떤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에밀 몰트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오늘 하신 강연을 청중들 중 몇 퍼센트나 이해했을까요?” 슈타이너는 한 명이나 두 명이 이해한다면 저는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 말을 항상 새기게 됩니다. 슈타이너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 질문을 되새겨보면, 슈타이너는 외형뿐만 아니라 내적인 세계를 이해하길 바랐다는 걸 알게 됩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각자에게 스스로가 자신의 매개나 도구를 사용해서 깊이 있게 고찰해나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으니 같이 살펴봤으면 합니다. 인간과 인류의 발달과정을 보면 각각의 시기적인 영역에 따라 하나의 상(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도식적인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태어나서 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겠지요. 이 시기에는 엄마의 모성과 품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의 시기적인 특징을 묶어본다면 7년 주기를 형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인간이 물질적인 육체로만 형성되는 게 아니라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체로 형성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대략 만 7세의 시기에 태어나는 에테르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에테르체의 힘(생명력)은 물론 탄생 이전과 이후에도 있었지만 7세 이전에는 아이의 신체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왜냐면 신체가 이 땅에 미숙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에테르체를 생명체, 형성력체라고도 하는데 부모나 교사는 이 에테르체의 힘이 어느 정도의 시기까지 아이의 신체를 형성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명력이 5~7세에 이르기까지 신체를 발달시키는 것은 그 이후의 사고와 의식의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7세 시기의 아이는 우리 어른보다 당연히 사고를 충분히 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로서는 우리의 생명력을 이 세상을 관찰하는 데에 쏟을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몸을 형성하는 데에 쓰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 힘이 신체로부터 자유롭게 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신체 형성력에서 자유로워지는 시기는 바로 이갈이의 시점입니다.


이렇게 슈타이너는 우리의 사고를 위해 그림과 같은, 형상적인 사고를 제안했습니다. 이갈이는 이러한 형상적인 사고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의 표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작용해서 어린이의 영구치는 점점 자라 안착이 됩니다. 이런 모습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는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신체를 완성하는 하나의 매듭에 도착합니다. 대체로 모든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이갈이의 시기를 학령기라 합니다. 슈타이너는 이 얘기를 통해, 만약 7살 시기 이전에 생명력이 다른 곳에 사용된다면 신체 형성력에 쓰일 힘이 모자라게 된다고 했습니다.


배울 수 있는 연령과 배우기에 적합한 연령이 있습니다. 두 살이든 세 살이든 배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배우기에 적합한 연령은 7세 이후입니다. 그것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7세 이전에는 신체 형성에 집중하면서 아주 부분적인 힘만 학습에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달의 힘은 이 시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성인기까지 신체적 발달은 계속 됩니다. 그렇지만 7세 이후에는 생명체의 힘이 사고하는 힘에 보태어집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만 집중을 한다면 머리가 피곤해질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몸이 모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작업에 집중한다면 온몸이 피곤해집니다. 어제도 우리가 경험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 몸 상태도 피곤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자유로워진 에테르체를 갖고 사고를 하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몸에 있는 에테르체를 가져와 사고를 하기 때문에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이 에테르체는 7세 이전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몸에 작용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신체와 에테르체뿐만 아니라 아스트랄체도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아스트랄체가 혼을 지탱해 주는 힘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발달시기를 7년 주기로 구분하는 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 안에 다 들어있지만 각 시기마다 각 지체가 새로운 특성으로 발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스트랄체는 7세까지 신체 내면에서 활동을 해왔고, 7세에서 14세까지는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인지학에 대해 잘 모른다면, 사람이 7세 이전까지는 느끼는 힘이 거의 없고 두 번째 시기에 이르러야 느끼는 힘이 강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 번째 시기의 아이는 아직 세상과 분리되지 않았고 세상 속의 경험을 그대로 안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시기의 아이는 세상을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거머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테르체가 7세경에 자유로워진다면 아스트랄체가 자유로워지는 시기는 14세경입니다. 여기서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거기서 벗어나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에테르체가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곧 7세가 되어서 학령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스트랄체가 자유로워지는 시기를 사춘기라 할 수 있는데 이때는 자신의 감정생활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드라마틱한 감정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감정들을 스스로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슈타이너는 신체가 말하는 아스트랄체의 탄생 시기를 생식기관의 성숙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차성징의 완성입니다. 성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이 청소년이 그것을 책임 있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후의 방법론 시간에도 말하겠지만, 첫 번째 시기와 달리 두 번째 시기의 성숙에서는 차이를 많이 보입니다. 독일에서도 이차성징은 상당히 빨라져서 심지어는 9, 10세의 여학생이 월경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그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아스트랄체의 힘이 영혼의 육성을 위해 전혀 작업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육적인 과제가 나오지만 당장에는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요즘 들어서 많이 흔들리고 있지만 대체로 14세까지의 발달시기는 유지됩니다. 21세 시기까지의 아이들에게는 판단과 사고의 힘이 요구됩니다. 개인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입니다. 세 번째 시기를 자아체 완성의 시기라고 합니다. 자아체 역시 탄생 이전부터 있지만 내면의 작업을 통해 간혹 드러나다가 21세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면으로 작업하던 것이 바깥으로 드러나면서 어느 정도 자아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 번째 시기의 외형적인 특징은 어느 정도 완성되어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스스로 판단을 하지만 자아체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이제부터 내가 스스로 발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했지만요. 이 시기의 표징은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힘입니다. 슈타이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21세 이후에도 발달을 계속 하고 있지만 외형적인 특징이 아니라 정말 자세히 관찰해야 볼 수 있는 내면의 발달이라는 것입니다. 21세부터 어느 정도 성숙하면서 또 다른 7년의 주기를 통해 성숙해 나갑니다. 그 말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활동 역시도 3개의 주기를 겪으면서 발달과 성숙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입니다.


21세부터 28세까지의 시기에는 특히 감각혼의 질적인 특성이 발달합니다. 이것이 감각혼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호감하느냐 반감하느냐에 따라 사고가 굉장히 달라지고, 호감하면 내 것으로 삼고 반감하면 배척하는 호불호가 분명한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호감과 반감은 상당히 변화무쌍합니다. 이 시기의 영혼 특성과 맞물려 짧게 왔다갔다하는 시기입니다. 좋았던 게 싫어지고, 싫었던 게 좋아지는 게 자주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감각혼도 마찬가지로 그전부터 작업을 해왔지만 이 시기는 특히 젊은이가 직업을 선택하는 때이므로 자신의 호감과 반감이 직업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시기입니다. 교사로서는 어린 시기의 아이들을 만나기 때문에 호감과 반감이 내적 성장에 영향을 끼치지만 젊은이는 직업 선택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반감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용어라기보다 거리를 두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반감의 좋은 특성은 어느 정도 선을 갖고 분리를 하면서 나의 능력을 계발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예전에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를 돌아보자면, 전쟁 상황을 목도할 때는 상당히 반감이 작용합니다. 이 세상에 저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면서 반감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도 그 내면에서 또 다른 것이 형성됩니다. ‘이상적으로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내면에서 형성될 수 있습니다.


반감의 또 다른 긍정적 특성은 그간 살아온 삶의 동력을 우리 의식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 끝나는 게 아니라 비로소 본격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감각혼의 시기가 지나면 지성혼의 시기가 옵니다. 28세부터 35세까지의 시기입니다. 호감과 반감의 작용과 밀접한 감각혼과는 다릅니다. 지성혼의 시기에서는 그 이전처럼 내면을 바라보는 시기가 아니라 반대쪽에서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반감의 분리된 간격을 통해서 대상화하여 볼 수 있습니다. 사고의 힘으로 말입니다. 판단, 분석, 반추(반사). 바로 지금 이 강의 시간에 가장 필요한 힘이 지성혼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몸은 하나의 일체인데 이렇게 분석을 합니다. 대체로 감각혼과 지성혼이 섞여서 사고를 합니다. 여러분은 객관적인 사고를 하지만 어떤 사람은 감각혼의 반감의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호감이 있어서 뭔가를 조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지성혼의 시기까지가 이 시대 인류가 도달한 시기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시기는 지성혼까지 발달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각 민족과 나라를 살펴보면 감각혼의 시기에는 전쟁과 충돌이 자주 벌어집니다. 아직도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그 반면에 지성혼의 시대에서는 과학적인 방법론이 등장하며 분석과 판단의 힘을 통해 외형적인 것을 정확하게 바라봅니다. 법칙성을 찾아내고 발달하는 지성혼의 힘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28살 이전의 사람은 지성혼이 없는 걸까요? 물론 28살이 안 된 분이라 하더라도 지성혼이 없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여러분도 관찰을 잘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1세가 되면 영혼의 힘이 다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혼의 특성도 이미 21세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각 단계의 영혼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실현됩니다. 21세까지의 첫 단계에 비해서 생리학적으로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21세 시기, 즉 자아 완성의 시기란 비로소 자기 내면의 영혼이 작용을 하면서 이 세상에 펼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슈타이너는 인류의 발달과정이 모두가 함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또 다른 발달단계를 겪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성혼까지의 발달특성을 갖고는 모자란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특성의 발달이 필요합니다.


잠깐 휴식을 하고 다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짧은 휴식이지만 새로운 힘을 회복해서 오시길 바랍니다.


*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개의 개념(감각혼, 지성혼)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두 단계의 영혼은 지금까지의 인류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감각혼의 시기를 이집트 시기와 연관시켰습니다. 지성혼의 시기는 그리스-로마 시기부터로 보았습니다. 사고와 판단, 학문의 시기입니다. 당연히 전세계의 문화권에도 각 단계에 따른 발달을 겪었습니다. 슈타이너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힘의 특징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발달에 따른 특징이 인류 발달의 밑거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발달해 나가게 된다면 각각의 고유한 문화권들이 스스로 발달해 나가게 됩니다.


우리 한번 스스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감각혼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어떨까요? 호감을 갖고 작업할 때도 있고 반감을 갖고 작업할 때도 있지요. 교사회가 이러한 상태에 있다고 해봅시다. 어떨까요? 교사회에서 어느 사람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 아주 호감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주 반감을 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면서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보다시피 감각혼의 힘만으로는 힘듭니다. 한번 그 다음 단계도 생각해 봅시다. 판단, 분석, 반추의 사고를 가진 사회 말입니다. 유전공학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유전자조작의 경우에도 기술적인 면은 이해할 수 있지만 생명작용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들에서 자라는 농작물을 보고 화학적으로 분석할 수는 있지만 필요한 생명적인 힘을 이해하고 풀어나가기도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과 법칙의 힘으로 농업 등에서 여러 가지를 조작해내지만 광범위하게 생명 질서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상황입니다. 분석과 법칙을 규명하는 힘으로 기아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환경문제나 유전자조작문제 등 새로운 문제에 우리는 직면하게 됩니다. 잘 살펴보면 이러한 힘의 특성은 이 사물과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외형적인 특성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꽃병에서 해바라기를 하나 가져오겠습니다. 이 해바라기를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개념과 작업이 필요합니다. 유전공학에서는 물질의 분자 구조를 아주 명확히 묘사해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과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해바라기를 창조주가 만든 것처럼 따라가 보려면 어떤 힘과 관점이 더 필요할까요? 외형적으로 보면 이렇게 위로 올라와 있습니다. 줄기가 올라와 있고 줄기 사이에 잎사귀가 돋았고 지금 보니까 이 잎사귀가 피곤해 보입니다. 아직 꽃은 깨어 있습니다. 잎사귀를 피곤한 우리의 몸이라 한다면 꽃은 깨어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꽃잎을 볼 수 있고 화분과 수술 등 다른 구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혼의 작업은 충분치 않아 보입니다. 좀 더 잘하려면 자연 속의 해바라기를 봐야겠죠.


우리는 보통 자연 속의 식물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뚝 끊어서 식물도 동물도, 심지어는 인간도 그렇게 관찰합니다. 일단 우리는 자연으로부터의 연결을 끊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죽어 가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다 조각조각 내서 분석합니다. 현미경이 필요합니다. 우리 눈이 자세하게 볼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현미경이 우리의 눈을 강화시킨다면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해바라기의 본성과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미경으로 더 깊이 자세히 관찰한다고 하지만 그건 항상 외형적으로만 관찰하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식물이나 동물을 본질적으로 어떻게 관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제안합니다. 사실 우리가 은연 중에 알고 있거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바로 나와 다른 존재를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존재의 본질을 내 안으로 가져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낯선 사물이 여기 있지만 그것과 내가 일체가 되고 내가 그 존재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린이를 관찰하고 바라볼 때도 어린이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사랑의 경로를 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깊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대상을 정말로 알고 싶다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슈타이너는 그 사랑하는 힘을 의식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고통스러워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영혼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 내 아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 원인을 알 수 없더라도 고통 받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친구 중에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나도 유쾌함이 전염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지성혼과 조금 다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의식혼의 작용입니다. 지성혼은 항상 외형적이고 대상화된 시각입니다. 이와 달리 의식혼에서는, 내 안에 형성된 사고란 상대방의 내면에 일어난 것을 내 안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그래서 우리의 교육적 과제가 어린이가 가져온 어떤 동력을 펼쳐 나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의 발달은 거의 한 세기를 지나서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러한 힘을 발달시키는 것이 굉장히 고단하지만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새로운 능력을 계발시키지 못한다면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지학과 연관된 유전공학자도 있습니다. 그런 분이 저를 초대해서 가게 되었는데요, 거기는 당연히 생명공학을 하는 곳임에도 생명을 다 죽여서 가져와 죽음의 나라라고 할 만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의 실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일정과도 연관을 갖는 실험입니다. 의식혼을 이해하면서 사회삼원론에서 왜 이러한 의식혼의 시대가 필요한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연습을 하길 원했습니다. 우리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요.


여기 하나의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뭐든지 처음에 연습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이제 여러분들이 해봐야 하는데 외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관찰을 해보십시오. 개인적인 생각과 환상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고와 상상으로 씨앗이 자라나는 걸 떠올려 보십시오. 이 씨앗을 결코 다른 것과 분리하지 않고 주변의 흙과 햇빛, , 생명체와 연관을 지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이 물질적인 작용에 의해 싹이 트고 뿌리가 처음 자라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점점 줄기가 자라고 잎사귀가 생기고 점점 올라가면서 꽃봉오리가 형성되기 위한 단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봉오리는 점점 꽃으로 피어나고 그 속에는 씨앗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꽃이 시들면 식물이 죽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지 않고 여기서 나온 씨앗은 땅에 떨어져 살아서 올라옵니다.


의식혼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이 꽃의 본질을 쫓아가면서 우리의 사고를 형성한 것처럼, 이 식물의 본질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것입니다. 식물의 관찰을 내 내면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내 안의 정신적인 상을 하나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내면의 고유한, 또 다른 특성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형성되는 어떤 것은 상대방 안에 있는 것을 사랑을 통해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하는 작업은 이 해바라기의 모습을 정말로 잘 고찰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며 영혼 안으로 가져오면 상대방은 진실로 이해가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런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데, 이것은 사실 상당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본질적인 것을 우리 안으로 가져와 사고하고 그것을 펼쳐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를 유기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 반드시 해나가야 하는 작업입니다. 오늘 오후에 좀 더 연습을 해보면서 다음에 더 이야기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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