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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사회삼원론 사상의 탄생 - 젠녹 1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사회삼원론 사상의 탄생 - 젠녹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16. 16:42

사회삼원론 사상의 탄생 - 2010719일 월요일




사랑하는 동료 여러분,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발도르프학교 교사연합 연수회에 참여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작업하고 싶은 것은 이미 제안해 주신 사회삼원론입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기초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에 3번째 방문했습니다. 계속 과천자유학교에만 방문하여 많은 분이 모르실 겁니다. 제 이름은 한스 요하임 젠녹입니다.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뵈블링햄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상당히 젊은 분이 많으시다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연세 드신 분도 계십니다. 연세 있는 분은 아무래도 발도르프교육이나 인지학에 경험이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젊은 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저 스스로는 여러분처럼 젊은 시절에 발도르프학교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냥 발도르프사범학교에 방문했을 뿐입니다.


교육보다 거기 있는 아가씨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였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그 당시 학교에서 수업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여기는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른 모습의 바탕과 배경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배경인 인지학을 알고 싶었습니다. 바로 사범대학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어느 정도 하니까 이게 뭔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 교육이 이렇게 어렵다는 걸 알았다면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저는 쉽게 생각했고, 내가 이해했으니까 학교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젊은 사람의 진취적인 기상에 따른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는 지역에 이미 발도르프교육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분들과 연결되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저는 몰랐지만 이미 다른 분들이 70년대부터 그 지역에 발도르프학교를 세우기 위해 세 번이나 애를 썼다고 합니다. 자기들 같이 경험 많고 나이 있는 사람들도 3번이나 실패했는데 이렇게 젊은 사람은 실패할 거라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한 사람이 슈타이너에게 치유교육을 시작하려 할 때 자기는 젊고 경험도 없다고 하자, 슈타이너는 모든 것의 시작은 조그맣다, 그 조그마한 걸로 시작한다고 격려하여 시작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학교가 시작되어 자라났습니다.


이렇게 학교가 성장하여 발전한 것과 같이 이 세상의 일들은 많은 닮은 점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에 아주 조그맣고, 학급과 교사가 하나씩밖에 없었고, 이런 조그만 일들이 닮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학급이 많아지고 학교에 위기가 찾아오고 선생님이 나가고 들어오며 여러 경우를 겪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학교가 크다면 교사 한두 명이 바뀌는 건 심각한 게 아니겠지만 인원이 작은 학교에서 교사가 바뀐다는 건 학교 전체를 흔드는 일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제가 아는 분 중 슈테판 레버라는 분이 있는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병중에 계십니다. 당시에 그분께서 저를 한쪽으로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한 가지 약속을 해야 됩니다. 당신이 교사로서 일하는 건 당신 자신만을 위하는 게 아닙니다. 어린이의 운명과 부모의 운명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와도 연결된 일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운명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와 관계된 일이므로 최소한 10년 동안은 참고 견뎌내야 합니다.” 매년마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이야기에 의해 지속해 왔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약속을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인지학적인 바탕의 내용이 저의 작업과 학교를 새롭게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그건 무엇과도 연관이 있냐면, 이 시대에 처해 있는 세상은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구조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발도르프교육의 동기부여나 자극은 전 사회의 영역에서 필요한 동기부여나 자극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회적으로 절망이나 실망을 하게 될 경우에 과연 대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이론이나 영역에서도 사회와 인간에 대한 아주 기본적이고 정확한 관점이 인지학 이외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데요, 발도르프학교를 하는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발도르프학교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이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합니다.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며칠 동안 만나는 시간이 있겠지요. 당연히 저녁때에도 사회삼원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며칠 동안 아주 기초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이 테마를 다뤄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주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론은 여러분에게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이론을 실현하는 데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퇴보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흥미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슈타이너의 사상을 어떻게 현실화하고 실제로 이 세상에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슈타이너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삼원론을 정립해 나가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처음부터 정신과학 운동을 일으키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닌데, 슈타이너도 처음에는 대학의 교수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해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슈타이너가 생각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거대한 이해 구조를 대학이라는 현실과 공간에 맞추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대학은 지금도 그렇지만 계속해서 그 안에서 물질주의 성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그 가운데에서 기본적인 관점을 인간이 영혼의 존재이고 정신세계의 존재가 세상을 창조해 간다는 것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현대에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관점입니다. 그럼에도 대학에서는 물질주의의 영향에 의해 교류되지 않았고 슈타이너의 생각이 거부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슈타이너는 하나의 행운과 같은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괴테의 저작물을 정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놀라운 일인데요, 정신적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괴테의 자연과학에 관한 저작물을 작업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걸 슈타이너가 끌어냈습니다. 괴테의 자연과학 저작물이 정신적인 지점과 연결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사회삼원론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떻게 그것이 연결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결과가 되는 것은 슈타이너가 처음부터 해왔던 정신적인 작업이 이제는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에서 성과를 이룰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슈타이너는 당시의 학계에서 그다지 인정받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그런 작업을 통해서 학계에 영향을 주고 대학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슈타이너는 신지학 그룹과도 연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지학 협회에서도 슈타이너의 사상을 어느 정도 잘 이해했습니다. 신지학 협회는 동양, 특히 티벳의 고대 불교사상을 잘 발전시켜나갔습니다. 슈타이너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정신성을 하나의 유기적인 일체로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슈타이너의 사상을 갖고 이 작업을 시작해 보면 정말 새로운 의식으로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슈타이너는 신지학 협회 안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생동감 있게 유지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까지만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신지학 협회의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영역보다 정신적인 세계를 주된 테마로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해하는 데까지는 충분하지만 이것을 이 세상에 실현시키고 실제로 그것이 되게끔 만들어가는 일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한계점으로 신지학 협회에는 전통적인 영적 지혜가 있었지만 슈타이너는 이제 어떠한 정신적 작업을 하는 협회에서도 옛날의 지혜가 아니라 미래의 지혜를 쌓아나가길 바랐습니다.


슈타이너의 새로운 제안에 대해 신지학 협회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다른 사건이 나왔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를 재림 예수로 규정한 일입니다. 슈타이너의 사상에 따르면 그렇게 예수가 재림한 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신지학 협회와 결별을 하고 인지학 협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지학 협회가 분리되어 나오면서 인간의 새로운 면모에 대해 계속 작업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것이란, 이전에는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와 같은 명령과 같은 법이었다면 다른 것이 주어졌습니다. ‘미션과 같은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자극을 받아 스스로 알아내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미션이 아닌 자기 스스로 알아내는 슈타이너의 방법론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기의 사상만이 이 세상에 전파되고 통용되길 원한다면, 서로에게 계속 낯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에 관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낯선 일이기 때문입니다. 슈타이너는 많은 강연과 저작물을 여러분에게 전해줬습니다. 여기에 슈타이너의 보따리가 있습니다. 이 보따리를 보면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걸 어떻게 나의 작업으로 만들 수 있을까? 두 가지의 차이점을 느껴 보세요. 슈타이너가 보따리를 전해 주듯이 학교는 이래야 합니다. 발도르프학교의 이상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게 첫 번째 사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이 보따리를 통해 스스로가 발전하고 변화되어 간다면 다른 방식의 성장이 됩니다. 슈타이너는 이 방식을 원했습니다.


발도르프학교가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 당시에는 발도르프학교가 없는 상황이었고, 슈타이너는 당시에 의학에 대해 많이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인지학 병원도 없었습니다. 생명역동농업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 당시에는 유일하게 한 농부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여러 사람을 초대하고 함께 해서 그 농법을 실현하려고 여러 방식으로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이타 베크만이라는 사람은 의학 분야에서 슈타이너의 제안에 따라 약과 병원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슈타이너는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계속해서 기독교의 사상이 발전할 수 있도록요. 하지만 우리 새로운 교회를 만듭시다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슈타이너가 먼저 교회를 만들자고 한 게 아니라 어떤 신학자가 슈타이너에게 와서 지금의 교회는 과거에 붙잡혀 있습니다.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없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슈타이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가 동기를 일으켜 발전해 나가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슈타이너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지학 그룹에서도 나오게 되었고, 그렇게 인지학 협회를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인지학 협회는 농업 강좌를 통해서 농업에 들어갔고, 마찬가지로 의학과 기독교 분야에도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슈타이너가 추구했던 것은 다시 사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러분이 느끼실 텐데, 인류의 문화 흐름 속에서 발도르프학교의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저는 아주 축약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 잘 아는 분도 계시고 모르는 분도 계시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아주 기초적인 사고의 형성을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시대가 문화적인 재앙 또는 재난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1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에도 역시 문화적인 충격, 사건, 재난이 있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도르나흐의 인지학 건물을 짓는 데에 아주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문화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첫 번째 괴테아눔을 짓는 일을 같이 하고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적의 관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각자 나라의 이익의 편에 서기 때문에 갈등과 대립이 생겼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새롭게 시도한 다양한 문화와 나라의 사람들이 협조하려 했던 계획이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수백만의 시체를 보면서 슈타이너는 많은 충격을 받고 고민을 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재난이 닥쳤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순간이 바로 발도르프학교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깐 쉬었다가 이야기를 재개하겠습니다.


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인지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우리는 1차 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슈타이너는 인류사의 흐름을 계속 쫓아갔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1차 대전의 원인을 겉으로 드러난 지점이 아니라 진정한 원인을 찾았습니다. 예를 들어 자원의 문제나 각 나라의 국익도 있겠지만 더 근원적인 이유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모든 도시나 국가들이 하나의 중심점 아래에 지도를 받고 지시를 받는 관계, 다시 말해 모든 시민들이 하나의 정점에 의해 지도와 지시를 받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권력의 구도가 사회의 모든 구조를 지배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잘못된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잘못된 사고를 했습니다. 이렇게 분석을 하면서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사회삼원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사회삼원론은 어떻게 생각해 내었을까요? 왜냐하면 이런 추구 자체가 발도르프학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슈타이너가 바라본 사회는 완전히 하나의 유기체적인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슈타이너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괴테의 자연과학 저작물과 연관이 있습니다. 괴테가 바라본 것과 마찬가지로 슈타이너 역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죽어 있거나 굳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사회의 유기체인 구조는 사람의 유기체 구조와도 닮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관찰한 바와 같이 사람의 몸은 하나의 일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부분들로 나누어져 있지요. 당연히 이러한 유기체는 분절화되어 있지만 하나의 통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머리의 형태, 사지의 형태, 가슴의 형태로 구분할 수 있지만 그 각각의 것이 하나로 일체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손만 갖고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머리 하나만을 갖고서는 손이 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우리 머릿속에는 신경계와 감각계가 있기에 그것을 통해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신경계와 감각계는 작용하고 있지만 우리의 손은 쉬고 있습니다. 사회도 이처럼 분절화된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이어지는 날들을 통해 안내해드릴 텐데요. 사회에는 정신적, 문화적인 작업을 하는 영역이 있고, 인간의 정신문화적인 작업을 하는 영역의 사람은 교사나 예술가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회 영역은 경제적인 영역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물질적인 기반을 형성하는 영역입니다. 저는 기대를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작업을 통해 여러분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지 기대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사회의 영역은 법적인 영역입니다. 이 법적인 영역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고파는 관계의 계약, 또 다른 관계의 계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1차 대전의 배경으로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을 한다는 것과 중앙집권적으로 이루어진 지배구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술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더 이상 사회적 재난이 닥치지 않길 바랐습니다. 그 후로 슈타이너의 예견에 따라 작업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2차 대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2차 대전을 겪으면서 한국도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비평화적인 상황을 계속 겪고 있습니다. 또 어쩌면 3차 대전의 징후를 알리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9/11 테러가 그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라와 나라가 아닌, 전방위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전쟁의 위기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어려움들은 단지 전쟁이라는 상황으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생활 속에서의 어려움, 재난, 빈곤 등을 통해 나타납니다. 전체 세계의 80% 이상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슈타이너가 살았던 1920년대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 슈타이너는 두 가지 전쟁의 배경을 말하면서 고위직의 정치가들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슈타이너는 정부라고 하는 것을 한 영역으로만 제한하려 했습니다. 정치적인, 법률적인 부분으로만 제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미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더 이상 정부의 다른 역할이 개입되지 않고 그 자체의 힘과 동력으로 움직여지길 원했던 것입니다. 정신문화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위에서부터 지시받고 조정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발전해나가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교사가 직접 지시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학습이 이뤄져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문화 영역에서 독립된 것처럼 학교가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학교 밖에서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아 교육과정이 만들어지고, 아이들에게 어느 수준을 강요할 수는 없겠습니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요구되어지는 필요치는 제안할 수 있겠지만 그건 아이들이 이뤄나갈 문제입니다. 교육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그동안의 교육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슈타이너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학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것을 가르치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3가지 구조를 바탕으로 정치가를 만나 정치적으로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당시의 정치가들 모두가 이것을 거부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에게 이러한 생각들이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14가지 조약이 적용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약에 대해서 슈타이너는 상당히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조약 뒤에는 많은 나라가 분리될 것이고 그 분리가 많은 어려움을 낳게 될 거라고 예견했습니다. 마치 사람의 몸처럼 각각의 기관은 고유한 역할을 하며 유기체적인 조합을 이뤄나가는데, 한 국가의 모습이 인위적인 계획에 의해 분리된다면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동력의 요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발도르프교육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하나의 동력은 사회적인 것으로서 아직 슈타이너 당시에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회삼원론 운동에 대한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자문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슈타이너 자신의 생각 자체를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러다가 얻은 결론은 사람들이 아직 그러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의식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인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사고가 생명력 있고 유기체적인 것이 아니라 결과론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원인과 결과, 인과관계에 따른 직선적인 사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인이 있어서 저러한 결과를 낳고, 이것이 반복되는 사고의 패턴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사고 유형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제 더 이상 실질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삶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데 환경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황폐해지고 사막화되는 것은 지구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부터입니다. 살아 있는 지구의 상을 그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슈타이너는 이 상황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전의 사고의 방식으로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익숙한 사고방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고, 살아 움직이는 사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열려 있는 사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전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학교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기를, ‘, 이 학교들은 권력자들의 입김에 의해 가르치는 일조차 상당히 지시받고 있구나’. 마치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익숙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회가 중앙집권적으로 지시받고 지배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중앙집권적인 체제처럼 모든 생각이 획일적으로 만들어지고 다루어지는 게 아니라 돌이면 돌, 식물이면 식물처럼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사고형성 패턴은 죽어 있는 것(생명이 없는 물질)을 바라보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죽어 있는 것의 화학적인 변화 정도만 파악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어 있는 것을 살피는 방식이 필요하지만 식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사고를 위해서는 그러한 죽어 있는 사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영역을 생각할 때는 더군다나 다른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물질, 즉 죽어 있는 것들의 규칙성을 식물과 동물, 인간과 사회에도 적용하는 풍토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급박하게 변화하고 긴급한 과제가 다가오므로 슈타이너는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실질적인 사고란 죽어 있는 것을 모든 것에 적용하는 사고가 아니라 살아 있는 것에 따른 사고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일반적인 학교에서도 이러한 사고가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학교 역시 사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에 사회삼원론에 대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안을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반학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정부가 사회삼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에밀 몰트라는 한 담배공장 사장은 인지학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그러한 새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새로운 학교가 필요한데, 자기 공장 노동자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 주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슈타이너가 그 동안 해왔던 방식은 자기가 직접 무언가를 하기보다 누군가 동기를 갖고 나섰을 때 돕는 방식이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의 동기는 사회적인 것이었고 또 하나의 동기는 학교의 과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딱 정해서 형태를 만들어 제안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제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고유한 본성의 자아를 가진 아이가 자기 본성에 맞게 성장하게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사회를 사회삼원론에 입각해서 다시 치유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 이렇게 피곤하고 힘들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의 농도를 말해 주기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이어서 풀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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