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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사회삼원론의 원칙들 - 젠녹 4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사회삼원론의 원칙들 - 젠녹 4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16. 16:49

사회삼원론의 원칙들 - 2010722일 목요일




안녕하세요? 그저께 밤에 간단명료한 단어를 찾기 위해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다루는 테마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좀더 명료하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좀더 이해가 잘 되길 바랍니다.


오늘 처음에는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형제는 소방관입니다. 소방관은 화재 현장이나 인명구조에 직접 투입됩니다. 그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상상하기도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직접 경험을 했던 것인데요, 어린이가 도로에 뛰어들었어요. 7세 여아였습니다. 거기서 계속 놀고 있는데 큰 화물차가 왔습니다. 화물차가 다가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멈춰 있었습니다. 화물차 운전자는 당연히 도로에 아이가 있을 거라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빠르게 달렸습니다. 브레이크를 잡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습니다. 바퀴 하나가 아이를 덮쳤습니다.


그 사고가 너무 큰 것이어서 아이의 엄마도 소리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창문으로 그 사건을 엄마가 봤을 때 아주 우연히 소방관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소방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화물차의 바퀴 밑에 여자 아이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소방관은 전화를 해서 동료를 부르고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바퀴가 완전히 아이를 깔아뭉갰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인지 바퀴가 턱을 밟고 있었고 그 사이에 아이가 끼어 있었습니다. 소방관은 여러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가슴이 눌려 숨을 못 쉬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바로 뛰어나왔지요.


거기서 아주 놀라운 일을 목격했습니다. 소방관은 머리를 굴려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서는 당연히 구급차와 차를 끌어올리는 기계가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바깥에서 관찰하는 태도가 아니라 완전히 그 상황 안으로 들어가 뭔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화물차의 바퀴를 들으려 했습니다. 소방관은 그걸 보면서 그냥 놀라기만 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엄마는 차를 들면서 아이에게 빠져나오라고 말했습니다. 소방관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화물차 운전자까지 나와 아이를 뺄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 구급차가 왔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조금만 늦었더라도 내부출혈이 생겨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잘 구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제 나눴던 사회삼원론과 연관이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한 상황을 실질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다가오는 미래에서는 나와 너, 나와 자연 등 분리된 것을 연결해서 소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각 분절되어 있는 사람은 통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체감이 없는 분리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분리된 것이 소통될수록 내 안에서 치유가 되고 일체가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서로를 돕는지 그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분리된 것이 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살펴봤듯이 오늘날의 사회질서는 이기주의적인, 자기중심적인 관점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것이란 단순히 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를 먼저 위하는 것입니다. 나를 먼저 위한다는 건 어느 정도 세상과 나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리는 고독과 병적인 상태를 낳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점점 함께 일하지 않고 분리된 상태에서 서로 반대의 일을 하게 되며 더욱 분리되어 갑니다. 만약 우리의 교사공동체에서도 우리의 의견이 하나가 된다면 큰 힘을 발휘할 테지만, 그렇지 않고 자꾸 분리된다면 우리는 더욱 힘들어집니다.


아까 얘기한 한 아이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원형적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어머니의 행위는 사고의 상황 안에 완전히 들어가 일체가 되었습니다. 그 소방관도 당연히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는 외형적으로 분리되었고 자기 생각으로 다른 도움이 와야지만 해결할 수 있다고 접근한 것입니다. 어머니도 물론 처음에는 분리된 상황이었지만 곧바로 안으로 연결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찾은 것입니다. 이 원형적인 이야기를 잘 이해한다면 슈타이너가 얘기한 사회삼원론을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요,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사회의 구조입니다. 그렇게 되면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함께 연습을 통해 이뤄낼 수 있습니다. 사회는 이렇게 구성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하는 것처럼 우리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항상 배우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 발도르프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이 정말 잘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에게도 이런 학교가 필요합니다. 우리 어른들을 위한 학교는 무엇입니까? 그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디서 배울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도 삶의 학교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기적인 경로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사회삼원론에 대한 이해와 사고를 얻는 과정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바람직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학교와 어른을 위한 학교의 차이점은, 사회삼원론 안에서 어른을 위한 학교는 자기 스스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삼원론 이야기를 좀더 진전시키고 싶습니다. 어제까지도 살펴보고 오늘도 잠깐 들여다봤듯이 오늘날 사회는 그리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제 나눠드린 사회주요법칙에서 말하는 첫 번째 원칙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번 테스트를 해봅시다. 정말 우리 사회에 이런 법칙성이 존재하는 것이고 옳은 것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수렵채취 시대의 사람처럼 자기 스스로 재화를 마련하는 일을 한다면 이것은 자급자족이라는 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오늘날의 상황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서 필요한 재화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서 옵니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나만에 의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일이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빵집의 아저씨가 빵을 굽고, 버스 기사가 버스를 운전하는 것처럼요. 일상 속에서 날마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나를 돕고 있지만 나는 그걸 의식하지 못합니다. 거꾸로 이 집을 누가 짓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을 수 없지요. 이 집은 누가 지었나요? 여기의 전기시설이며 설계와 공법 등을 이해는 하지만 의식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교사회도 생각해 본다면 어떤 때는 서로 반갑고 또 어떤 때는 징글징글하지만 동료교사가 없다면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뭔가를 느끼셨는지 아직 불확실합니다. 이 사회적 주요법칙이 여러분 의식으로 완전히 들어갔는지가요. 만약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의식으로 가져온다면요, 이것은 오히려 아주 실질적이고 실재적인 사고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지요. 혹시 여러분, 내가 세상을 향해서, 동료를 향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고 있는지, 그래서 분리된 관계를 조금씩 연결시키고 회복해 가고 있는지 느끼십니까? 내가 혼자서, 외롭게, 아무도 돕지 않아 내가 해야 하고, 그러면서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던 것이 정말 현실이었습니까? 사실은 그게 현실이 아니라 실제 현실은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관계이고 서로가 도와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실질적이고 실재적으로 바라볼 때만이 우리의 생각이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합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얘기했음에도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이건 무엇과 연관이 있을까요? 우리는 일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받습니다. 내가 일을 했고 그래서 월급을 받았고 그래서 나는 사는 거라는 인식이 당연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내가 일을 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일하는 방향은 그렇게 나가는데요, 돈의 흐름은 거꾸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이 두 가지의 흐름을 단순화시켜서, ‘내가 하는 일이 돈을 가져오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슈타이너는 이 두 가지 흐름으로 하는 사고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이 일은 경제적인 영역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슈타이너는 돈도 경제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기존의 관념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주 혁명적인 사고입니다. 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물론 당시에 슈타이너의 사상을 비교적 잘 이해했다고 여겼지만요, ‘, 이게 무슨 말인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하고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받는 돈은 학부모가 지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을 통해 받는 대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하는 행위가 결코 돈의 가치로 평가할 수 없고 대가를 지불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능력은 내면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교사는 자신의 일을 합니다. 그런데 슈타이너는 이것이 구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때 시간으로 계산해 그 가치를 돈으로 부여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우리는 돈이 필요하고, 일을 해서 돈을 받는데 만약 학부모가 돈을 내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돈에 대해 전혀 다른, 반자본주의적인 시각을 제시합니다. 돈이란 나 자신을 위해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란 어떤 가능성, 즉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학비는 결국 학부모가 내는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 일의 대가가 아니라 우리의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느끼십니까?


학부모가 학교에 돈을 냅니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제 민주주의에 대해 잠깐 들여다봤는데요, 민주주의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얘기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더 이상 우리를 압제하는 경찰이나 군인이 없지 않습니까?” 이제는 외형적인 군대 등으로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돈을 통해 우리를 통제합니다. 슈타이너는 이미 100년 전에 돈으로 인간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사회 안에서 진정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는 인간이란 신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진 지체를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머리, 가슴, 사지로 신체 자체도 삼원론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우리 안에서 여럿으로 나누어지고 또 연결돼 있다는 걸 어떻게 경험합니까? 사회 속에서 어떻게 관계하고 느끼며 살아가나요? 우리는 늘 뭔가가 필요합니다. 영양을 공급할 음식이 필요하고, 옷과 집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많은 소비재가 필요합니다. 앉을 의자, 그림을 걸어놓을 액자, 만년필, 공책 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뭔가가 필요한 존재이지만 그것은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나에게 오는 물건들은 다른 모든 사람이 만들어 준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나를 위해서 필요하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박애정신입니다. 현실을 잘 관찰하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욕구를 가진 존재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능력을 키우는 것은 사회적 욕구를 갖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세 번째 영역을 본다면, 어른이란 성숙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책임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책임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 그것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뭔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계약, 약속을 지킬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책임 있는 존재라는 것이고 그것은 약속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어 생각해 주십시오. 1. 기본욕구. 2. 성인/책임 있는 존재/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존재. 3. 능력. 확인해 봅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들 속에 이 세 가지가 항상 있나요? 인간의 신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당히 복잡하지만 그 안에서 어느 정도 구조화된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사회 속에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시나요? 잠깐 휴식하고 좀더 재밌는 이야기를 해봅시다.


 

*

 

1. Bedurfnisse(needs) 필요. 기본욕구(본질적인 욕구, 사회적 욕구)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역할로 삶을 영위한다.


2. Mundigkeit(responsibility) 책임. 성인(약속을 이행할 수 있음) : 우리는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한다.


3. Fahigkeiten(abilities) 능력 :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발휘한다.



첫 번째 개념을 좀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우리의 몸이 있는 것이고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식주는 모두 다른 사람이 생산을 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능력을 계발하기 위한 학습도 들어갑니다. 의약품, 의료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편으로 성직자들이 하는 일도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뭔가가 빠져 있는 것 같은데, 지불한다는 것(대가를 받는 것)도 음식처럼 우리가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에서 돈이라는 것이 어떠한 역할인지 아시겠습니까? 의식주와 연관된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치료행위도 우리의 신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학습 또는 연수도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돈이라는 것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의 위상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음식이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것처럼 돈도 우리 삶을 지탱해 줍니다. 음식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신체적 필요를 충족하여 주고, 돈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필요를 충족해 줍니다. 즉 돈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주의 문제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어떤 경로로 발도르프학교에 돈이 들어오는가?”, 우선 학교에 돈이 아니라 음식을 가져옵니다. 아주 다양한 식성임에도 학부모가 가져온 음식을 맛있게 먹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집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구성원들은 모두 그 집에 살아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정해진 것이 만약 서로에게 다 맞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유연하게 바꿔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 돈이 사용되어 교환관계를 만듭니다. 결국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교환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기본적인 삶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돈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학부모가 학교에 먹을 것을 가져오는 건 교사와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과 교사는 배우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학부모는 마찬가지 이유로 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슈타이너가 말하는 새로운 생각은 지금 얘기한 것과 전혀 다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기 위한 게 아니라 삶의 기반을 제공하여 교사와 학생이 배움을 계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부모가 제공하는 돈이 삶의 원리와 분리되지 않고 연관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학생이 학교에 가고 부모는 거기에 돈을 지불합니다. 그런데 돈은 우리가 일하는 것과 직접 연관이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은 돈이란 우리의 능력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사회 안에 학교에는 있지만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교사의 의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부모가 제공하는 학비는 1번의 기본적 욕구가 해당합니다. 사실은 구분이 되어야 하는데, 교사가 일을 하지 않은 것은 3번의 능력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일을 안 했으니 돈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계약 관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성인으로, 책임 있는 존재로 교사회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하고, 해야 한다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약속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책임을 따르지 않는다면요. 교사회에서 얘기합니다. “당신이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 얘기는 각 영역에서 일어난 일들이 1번의 기본욕구에서 해결되지 않고 2, 3번의 영역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과 능력. 하지만 오늘날 많은 일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것은, 한 사람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일자리를 박탈당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삶의 기본 욕구인 돈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슈타이너는 두 번째 혁명적인 사고를 하였습니다. 돈의 경로는 결코 다른 영역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영역은 인간의 기본욕구를 충족하는 영역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에게 동료나 상사가 와서 일자리를 빼앗습니다. ‘내가 여기서 짤리면 나는 돈을 못 받게 되고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짤리지 않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교사회나 단체가 그 사람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는 계약관계에서 스스로 저는 역량이 된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지금은 힘들어요. 저는 계속 할 수 없겠습니다. 이제 이 약속을 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요. 그렇다면 여기서(2) 돈을 못 받게 되는데 어디에서 돈이 나오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돈이란 인간의 기본욕구를 충족하는 영역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그 능력이나 계약관계에 상관없이 기본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은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이러한 돈이 국가에서 제공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조건 없는 지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건 없는 기초생활 보장 비용입니다.


기초생활비는 어떤 조건이 없더라도 받을 수 있는 돈을 말합니다. 이 돈은 국가에서 지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국가는 도대체 그 돈을 어디에서 받습니까? 아시겠지만 오늘날의 국가는 세금을 통해 엄청나게 큰 지출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국가가 하는 일이란 세금을 걷어서 도로를 만들거나 학교를 만드는 일입니다. 국가는 돈의 흐름을 통제하고 나누는 일도 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에 의해 나눠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가를 지탱하는 것에만 돈을 사용하지요. 예를 들어, 국가기관에는 상당히 많은 지원을 해 줍니다. 많은 사람을 고용해서 많은 돈을 줍니다. 국가가 돈의 흐름 속에서 나누어 주는 것은 새롭지 않지만, 모든 국민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재화를 분배하여 누구도 삶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생각입니다.


여기서 한번 더 생각해 봅니다. 지금 이 사회가 과연 민주적인가? 그런 여건이 충분히 되는가? 정말 사람들이 자유로운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능력을 사회를 위해 마음껏 발휘하면서 생존의 걱정이 없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세상을 위해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팔아야 한다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도르프교사라 할지라도 이렇게 제안되는 것을 현실화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발도르프교육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조건 없는 기초생계 비용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을 팔아서 삶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세상은 완전히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 능력을 다 발휘하지 않아도 생계비용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팔지 않아도 생계비용을 받습니다. 노인이나 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 중에 몇 퍼센트가 일을 할 수 있느냐를 보니 인구의 40%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왔습니다. 60%의 사람은 자기가 일을 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40%의 사람은 급여를 받는데, 자신의 능력을 파는 행위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이처럼 조건 없는 생계비를 나눠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능력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고,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라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두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시간상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내일 이어서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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