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사회삼원론의 이상 - 젠녹 7 본문
사회삼원론의 이상 -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오늘 마지막으로 뵙지요? 안녕하세요? 사실상 어제 내용적으로 마무리를 잘한 것 같은데, 오늘 전체적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사회삼원론에 대해 나눠드린 게 있지요? 첫 번째 원칙은 우리가 그동안 살펴보았던 길입니다. 첫 번째 주요 원칙의 근간은 유지하되 다르게 발전시켜 풀어낸 과정이 앞으로 진행됩니다. 밑의 부칙도 슈타이너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세 가지 개념을 다시 정리한다면요, 사회는 세 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념적으로 우리가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경제적인 삶, 둘째는 법적인 삶, 셋째는 정신적인 삶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이기주의적인 모습에 의해 사회적으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도 보았습니다. 이기주의가 경제적인 삶에 영향을 준다면 자본주의의 사상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은 최대 이윤을 남기기 위한 방향으로 가면서 소수의 부자들만 재산을 불려갑니다. 사회삼원론은 우리의 의식을 끌어올려 경제적인 삶의 본질적 원리가 박애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기주의적인 자본주의 흐름이 아니라 박애에 입각한 경제적인 삶은 하나의 조합적인 삶을 이룹니다. 조합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에도 일정 부분 작용하고 필요한 개념입니다. 박애에 입각한 경제생활에서 조합성은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법적인 삶의 이기주의는 권력의 집중화 문제로 대두됩니다. 이러한 권력구조는 사람들로부터 재화를 분배하는 힘과 역할을 빼앗습니다. 이 영역에서도 우리가 이기주의를 극복한다면 평등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즉 이기주의적인 모습이 아니라 서로 평등한 권리 실현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됩니다. 여기에서 이 개념을 말할 때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필요한데요, 현재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하지만 슈타이너는 더욱 본질적인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제 독일의 반핵운동에 대해 말했는데, 독일은 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권력의 불평등이 심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평등하게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독일에 납치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보통 용의자 제보에 5000유로를 내겁니다. 이 경우에는 은행장의 부인이 납치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현상금이 더 올라갑니다. 5000유로가 아니라 50만 유로로 올라갔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요? 법적인 삶에서 이기주의가 나타나면 강압적이고 명령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타인에 의해 지시되고 명령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발도르프학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절반 정도만 성공했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지만 졸업한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회에 나가고 취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존의 권력구조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삶에서 본질적인 원리는 자유입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원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기주의와는 다른 자기 집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고 정신적인 삶을 추구한다면 학교가 사회적으로 어떤 관계를 구조화할 수 있냐면 학교 연합이 형성되겠지요. 그래서 자유란 협력이라는 형태로 사회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칙의 첫 번째 경우가 정신적인 영역으로, 협력적인 형성을 향한 모든 이들의 자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정신생활이 발원될수록 더 풍요로워진다입니다. 슈타이너가 처음 주창했을 때는 그저 쉽게 말한 게 아니라 오랜 노력으로 가능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두 번째 법적인 영역에서는, 모든 동반자들의 평등에 따라 민주적 형성에서 나온 노력이 기반이 될수록 더 많은 지지가 생긴다입니다. 공동체적 사회의 경제생활은, 분배 받은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박애에 따라 협력을 위해 확대된 노력이 실천될수록 더 만족스러워진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들이 그저 이상주의에 머물 것인가?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슈타이너는 첫 번째 주요법칙과 세 가지 부칙은 자연의 법칙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력의 법칙에 대해 우리가 모르더라도 자연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사회적 주요법칙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견줘 보십시오. 현재 우리 삶에서 이러한 모습이 절반 정도는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산한 재화는 모든 이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반대 방향의 돈은 올바르게 분배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사회삼원론에 따라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이기주의에 따라 살게 된다면 기아와 불평등에 의해 우리의 삶은 파괴되고 반사회적으로 됩니다.
법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개인들이 각각의 삶을 영위하고 행복하게 살 때 사람들은 사회적인 존재가 됩니다. 반면에 민주적인 삶의 실천이 적을수록 권력집중의 양상이 나오겠지요. 평등한 질서를 우리가 추구해 나간다면 권력의 집중은 계속해서 사라질 것입니다. 세 번째의 정신 영역에서도 자유에 의한 협력이 잘 이루어진다면 끊임없는 경쟁이나 타인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없어지겠지요. 만약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지배를 받는 삶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사회삼원론의 법칙에 정리를 하였고 발도르프학교 역시 이러한 사회적인 주요법칙과 영역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교사들도 같은 지점에서 이 조합성과 민주주의, 협력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삼원론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제가 이 사회삼원론을 처음 접했을 때는 마치 하나의 빛이 오는 듯했습니다. 생각의 전환으로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다 보니 거기서 생기는 일상의 모습이 그전과 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사회삼원론이 저에게 완전히 소화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배운 대로 사회에 나가자마자 실천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먼저 이상적인 상을 그리지만 현실에서는 잘 실천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무기력함, 패배감을 느끼게 됩니다.
제안을 해보겠습니다. 한 아이에게 어려움이 있어서 아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모입니다. 아이 관찰에 대한 예를 들고 있는데요, 우리가 만약 일상적으로 흔한 얘기를 한다면, “이 아이는 이래, 수업시간에는 저래” 이러면서 계속 판단하는 얘기를 합니다. 반대로 판단을 전혀 집어넣지 않고 관찰을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도 함께 하는데요, 이 아이가 어떻든 선입견 없이 내면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생각과 행동의 경로는 어떤가,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판단 없이 바라봅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에 대해 묘사한 내용 자체가 어려웠던 모습일 수 있고 좋았던 모습일 수도 있는데요, 또 판단하지 않고 전체적인 사실을 놓고 얘기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작업을 우리가 했다면 하루 정도 지나서부터 아이에게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내면에서 작업한 이것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관심을 가진 것이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아이는 필요한 것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고, 사랑으로 아이의 본성을 드러냈다면 이미 영적인 작업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내 안의 영적인 관점과 활동이 내 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순수한 작업이 이루어져 그것을 통해 구현됐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명할 수 있습니까?
세 번째 7년 주기인 청소년 시기에는 사고하는 힘이 깨어나 자유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면 안에서 작업을 하면서 그것이 무르익어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의식을 형성하는 힘이 초기 단계에는 몸에 작용하면서 자기 몸을 실재로 적합한 기관으로 형성한다면 이것이 바로 의식을 일깨우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절에 갔는데요, 절에 있는 스님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한 마음으로 명상을 통해 정신세계 속에서 인류의 평화를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면 이 사회는 정말 평화로워집니까?” 스님은 “당연합니다. 세상은 더욱 평화로워질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까 아이 관찰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인 작업 속에서 현실의 작업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회삼원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이 사회에 사회삼원론을 구현하기 위해 우리가 정신적으로 작업하고 실천한다면 그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생명유기체로서 이 사회를 구조화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 관찰로 돌아가 보면요, 우리가 정신적인 작업을 했을 때 한 밤을 지나면 아이가 정신적인 작업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발도르프교육이나 인지학도 하나의 영적인 형태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형태와 구조에 집중할 때 현실적인 에테르체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물질적인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일들을 물질적인 삶에서도 구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먼저 작업해야 할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은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영적인 것을 정확한 형태로 가져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형상과 구조화에서 두 번째 단계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버스비를 지불하면서도, 형상화한 사회삼원론을 생각하며 경제적인 삶을 내가 어떻게 구현하는가, 내가 운전사라면 법적인 삶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우리가 서로 만나서 함께 작업해야 합니다. 모여서 어떻게 함께 일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 것인가, 최저생계비를 실현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어 조사도 하고 연구도 할 수 있겠습니다. 네 번째 조언인데요, 이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길에 함께 하고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발도르프학교 교사들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에는 이미 이러한 사회적 관점이나 이론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일상에서도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길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교사로서 상당한 이점이 있습니다. 만약 은행원이라면 이런 삶을 추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이상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이상을 추구하는 학교들이 각각 있지만 만약 우리가 더 나아가 학교들끼리 협력을 이뤄나간다면 우리의 이상을 훨씬 더 잘 풀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큰 테마를 마무리하고, 여러분과 작은 실험을 하고 싶습니다. 유럽에서는 보통 이렇게 얘기합니다. 태어나면서 받은 유산과 능력, 사회적으로 얻은 유산과 능력이 우리를 형성하는데 이렇게 우연하게 얻은 것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공식화된 인간에 대한 입장은 선천적으로 얻은 것과 후천적으로 얻은 것이 조합된 게 나라고 말합니다.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인간상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발도르프학교 교사는 다르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하나의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모습이면서 부모에게 신체를 받아 존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유전적인 상속은 하나의 부분일 뿐입니다. 사회와 문화에서 오는 것도 역시 중요하고 실재하지만 일부분입니다.
모든 사람은 실재를 추구합니다. 어떤 주관적인 환상으로 추구하길 원치 않습니다. 발도르프학교도 그렇습니다. 실재를 추구한다는 것은 전체가 실재하는 것입니다. 실재라는 건 부분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체의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의 전체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하나의 작은 존재입니다. 전체를 품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슈타이너 당시에도 선천적으로 받은 신체와 후천적으로 받은 교육이 인간을 구성한다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슈타이너는 만약 우리가 영적인 삶의 영역을 생각하지 못하고 전체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단편적인 생각의 상태이고 이것은 우리를 동물적인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인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진화해나갈 것인가도 우리가 결정하고 발달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동물 세계에서는 자연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살아가지만, 인간의 발달에서는 알아서 자동으로 발달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실험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희 학교 아이들과도 해봤는데요, 유럽인들은 공식적으로 얘기할 때는 인간이 선천적인 부모의 유전과 후천적인 사회의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무엇을 원합니까?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동기에 대해 ‘사람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현대의 철학자도 이 두 가지 모티브에 공감합니다. 인간의 어떤 것도 이 두 가지 모티브가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마오쩌둥도 그렇고 스탈린도 그런데 권력자들은 항상 자기가 유명해지고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길 원하는데, 그것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것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학생들에게 했던 질문을 여러분께 하려고 합니다. 상황과 조건을 다 떠나서, 완전히 내가 정말 행복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어떤 때입니까? 어떤 과학자가 사람의 뇌에 전기장치를 연결해 영원히 행복한 상태를 만들어 줍니다. 침대에 누워 죽을 때까지 행복한 상태를 만들어 주겠으니 누가 여기에 눕겠냐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막 자기가 하겠다고 장난처럼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무도 없자) 외국인이라 신뢰를 못하시나 봅니다. 정말로 약속드립니다. (없다) 학생들도 결국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첫 번째 모티브는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에 불사의 약을 가져왔습니다. 이걸 먹으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에 다들 자기가 먹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오늘 할 일도 별로 의미가 없고 내일 할 일도 별로 의미가 없고 천 년 뒤에 할 일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열두 살의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뭐가 저에게 행복을 줬는지 얘기해 보겠습니다. 내 친구와 함께 지내고 생활했던 게 행복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의 행복은 실재가 아닌 자기 안의 행복이라고 한다면 친구와의 행복은 실재 속에서의 행복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 죽지 않으려는 모습은 다 우리 안에 작용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동기부여의 전부는 아닙니다. 실재를 추구하려는 모습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동기부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자아가 신체의 물질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자아는 이 세상 전체의 실재를 알고 싶어 하고 그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갑니다.
슈타이너는 각 사람이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이고 그래서 고독하지만 이 세상을 알고 싶어 하고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놓고요,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기도 하고 한 세기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슈타이너가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많은 사람이 도르나흐에 모였습니다. 인지학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서로 논쟁을 하였습니다. 왜 그러했냐면, 마치 인지학이 하나의 굳건한 시각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인지학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각 사람이 전체의 부분이고 그래서 모두 다르며, 그래서 인지학은 그렇게 하나의 굳건한 시각으로 이루어진 사상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수의 과정을 통해서도 여러분들 스스로 자기 시각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인데요, 영적인 삶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료교사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교사들은 자유가 있고 그렇게 자유로운 생각들이 모여서 우리를 풍요롭게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는 또 관계를 구성하는 법적인 삶의 약속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타협할 수도 있고, 그 법적인 약속은 항상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교사들이 너무 쉽게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많은 교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뤄내는 여러분의 성과들이 상당히 놀랍습니다. 독일에서 동료들과 무언가 작업을 해 이렇게 성과를 이뤄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려운 상황이 서로 함께 모색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의 사고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실재를 탐구하고 일궈낼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각자의 생각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로 만드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올 수 있는 어려움은,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오랫동안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면 관계의 힘은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의견의 일치를 모으기 위해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겪으며 힘이 빠지는데요, 그러면 결국 힘이 강한 사람들의 의견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지 말고 단순한 하나의 가능성을 채택하여 한번 해 보자, 완전히 일치를 보지는 못했지만 반성을 하면서 풀어가 보자, 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겸손하게 자신과 상대의 생각의 차이를 접근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의견으로 결정되었을 때 으쓱하거나, 그러지 못했을 때 ‘내가 옳은데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기주의적인 사고입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이 채택되어 잘못되었을 때, “거봐, 내가 얘기했잖아” 이런 식이 아니라, ‘아, 그때는 그렇게 정했지만 이제는 내가 말할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교사회를 약화시키는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갈등입니다. 슈타이너의 임종 직전에도 사람들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이 사회는 얼마나 갈등이 많은지 알 수 있겠지요. 두 번째는 비판입니다. “저 사람은 항상 문제를 일으켜. 쟤는 말을 듣지 않아.” 이런 식으로 비판을 합니다. 아이 관찰처럼 얼마나 긍정적으로 관찰하느냐에 따라 관계성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설령 상대방이 아무리 날카로운 칼로 찌르더라도 혹여 나는 그 사람의 그 부분만을 전체로 파악하지 않는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스트레스입니다. 너무 일이 많거나 잠을 적게 자는 것도 문제입니다. 신경을 많이 쓰는 것도요. 슈타이너는 물질주의적인 사고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당시에도 슈타이너는 ‘당신들은 인지학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주의자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이야기하면 자기 안에서 소화시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대로 남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이것은 영적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의 성장 과정에서 내면적으로 받아들이는 힘은 감사와 사랑과 이해라고 했는데, 우리는 진실로 그렇습니까? 세상에 대한 헌신과 감사, 서로에 대한 사랑, 밝은 이해는 우리를 키워 주는 힘입니다. 이상을 갖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상을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상주의를 놓지 않고 그것을 구현하려고 할 때 그것은 삶의 중요한 동력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 편협하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두 가지 영역, 물질적인 영역과 정신적인 영역의 한쪽이 약하지 않은가, 돌아보면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권리와 의무의 양쪽에서 한쪽에 붙잡히지 않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사회와 연관하여 작업하고 추구하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고유한 영역에서의 작업도 중요합니다. 나의 작업과 함께 나와 너의 작업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이미 일어난 부정적인 결과를 다 극복하고 용서하고 풀어야 합니다. 결정한 것도 중요하지만 결정한 것을 참고 견디는 것도 중요합니다. 결정이 중압감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인내심을 갖고 견뎌낼 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정의 문제에서 내가 결단하고 함께 한다는 것에서, ‘내가 20년 동안 교사를 하면서 참아야 돼’가 아니라 ‘내가 1년을 하면서 하나씩 해나가자’라고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급과정의 선생님들과 작업하면서 경험한 것은 목표를 정해 함께 추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내가 걸어온 여정을 돌이켜 봅니다. 지금도 힘들지만 여정 속에서 얻은 성과를 살펴보면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권유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살면서 위기가 올 때 우리는 항상 위기를 극복했다는 걸 상기해 보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입니다. 교사회의를 너무 늦게까지 하고 와서 지쳤을 때 다음 날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또 힘이 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결국은 교사에게 힘을 주고 교사를 일으켜 세워 줍니다. 어떤 요소가 또 함께 힘을 주냐 하면 세상에 대한 관심과 흥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아이와 교사가 교육을 통해 함께 나아가면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톤 브루크너라는 음악가는 머릿속에 음악이 떠오를 때 가장 행복하고 새롭게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동료는 자기가 자연 속에서 있을 때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이 자기에게 힘을 준다고 합니다. 괴테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삶의 동력과 힘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제 과정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상당히 긴 여정을 이어왔습니다.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 하더라도 여러분 안에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작업은 헛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학생들도 저와 수업할 때는 나중에 완전히 지쳐버린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성적은 좋아!”라고 말합니다. (웃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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