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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사상과 교육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사상과 교육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7. 24. 18:19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회사상과 교육

 

 

 

정치, 경제, 문화 영역으로 3구조화된 사회 구상

 

사회조직의 3구조(사회삼원론)라는 사상을 가지고 루돌프 슈타이너가 표명한 것은 정당 프로그램이나 어떤 추상적인 요구가 아니다. 그가 애써 획득한 이 고찰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 사회의 관계와 본질을 읽어낸 것이다.

 

사회와 개별 인간의 현존 속에는 각자 고유의 특정한 법칙성을 갖는 세 가지 삶의 영역이 드러나는데, 정신-문화적인 삶의 영역, 경제적인 삶의 영역, -정치적인 삶의 영역이 그것이다. 대략 15세기부터 서유럽에 근대 국가들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세 영역이 적어도 광범위하게는 하나의 중심에 의해서 그리고 획일적으로 관리되는 데에 우리는 차츰 익숙해져 왔다. 군주가 (아니면 이후 시대에는 일단의 책임 있는 정치가들이) 외교 및 사법 업무뿐 아니라 정신 및 경제 생활 문제에서도, 또한 많은 국가에서는 사소한 낱낱의 사항에 이르기까지 결정을 내리는 그러한 단일국가가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삶의 형태로 보인다. 전체주의 국가뿐 아니라 민주주의로 간주되는 국가에서도 이 중앙집권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와 위험에 대해서는 후에 이야기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루돌프 슈타이너가, 경제 생활과 정치 생활 그리고 문화 생활 세 영역이 병렬적으로 존재함으로써, 서로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속에서 사회 기능으로 여겨지고 다루어지는 사회삼원론을 지지한다는 것만 지적해 두자. 그는 (이 시대뿐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과도 의식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현대 인류의 상황이 사회생활의 그러한 분산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유, 평등, 형제애

 

슈타이너가 말하는 3구조화된 사회조직을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는 인간적 욕구들은 간략하고 정형화된 방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단어들이 프랑스혁명 시대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열광시킬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가지 이상(理想)은 우리 모두가 다소 의식할 수 있는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깊은 본능적 느낌들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각각은 사회생활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데, 다음의 예가 하나의 구체적인 설명이 될 수 있겠다. 우리 모두는 법 앞에서 평등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우리의 정신적·물질적 욕구마저 그런 평등의 요구를 따르도록 법적으로 강요한다면, 이는 고금의 수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피할 수 없는 획일화를 야기할 것이다.

 

이에 루돌프 슈타이너는 최초로 이 세 가지 이상에 인간적인 공동생활의 특정 기능들을 일관된 방식으로 부여하면서 개념설명을 하고자 하였다. 사회의 3구조를 위한 그의 작업의 근간에 놓인 목표설정은 다음의 세 가지로 짧게 공식화하여 표현할 수 있다.

 

- 문화 생활에서의 정신적 자유

- 정치() 생활에서의 민주적 평등

- 경제 생활에서의 사회적 형제애

 

슈타이너의 진술에 따라 삶의 매시점에서 시작될 수 있는 실질적 동기들의 총합으로부터 여기 그 실현의 몇 가지 보기들을 살펴보자.

 

 

문화 생활에 관하여

 

자유는 창조적인 정신 생활이 존재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가능한 한 포괄적인 국가-산업적 기획(이것은 그 자체로 필수적이다)으로의 지향이 교육 및 연구기관의 구조 속으로, 또한 전체 문화 생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오는 때이다. 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문적 연구소들은 점점 더 국제적 경제·정치적 경쟁 요소로 간주되고 있으며 교육과정, 수업의 구성, 시험규정, 연구 프로그램 그리고 조사방법들은 점점 더 일관되게 산업이나 국가행정, 심지어 군대의 필요에 맞추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다고 표방하는 나라에서도 문화 생활의 자유가 위협당하고 있음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교육과 수업은 이와 관련해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인류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있다. 세계의 모든 개혁, 모든 창조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적 업적과 이것이 공동체 내에서 적용되는 범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개인이 내적 원천을 개발해낼 기회는, 그가 교육자와 교사를 통해 경험하는 교육의 과정에 의존한다. 이미 확정되어 있는 기술·경제적 발달 궤도를 직접적으로 계승할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소질을 키워주고 사회적으로 결실을 보게끔 하는 것이 교육자의 가장 중요한 과업인 것이다.

 

슈타이너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그 스스로 활동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 사회부문의 구성에 참여할 수 있을 때까지 국가권력과 경제 생활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성장해야 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요구들이 수업기관의 교육활동 속도와 시험의 의무에 지나치게 영향을 주면 청소년과 대학생들의 욕구, 그리고 포괄적인 교육에 대한 권리는 낙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교육, 즉 자라나는 세대가 기존의 사회를 언젠가는 변형시킬 수 있도록 자신들의 동기와 소양들을 가능한 한 다방면으로 전개시키는 교육, 그리고 그러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아마도 루돌프 슈타이너로 하여금 자유학교와 자유대학을 세우도록 이끈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이들 학교는 재단과 기부금 또는 경제계의 법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출자에 의해 자금이 조달된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그들의 학생 및 주변 환경과 당연히 협력하면서) 후진 교사들을 양성하고 교육과정과 수업방식 그리고 전체 교육활동의 구성이라는 모든 문제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자유로운 조직을 직접 만든다.

 

한편 학문분야에서도 이러한 자유가 유효해야 한다. 많은 나라에서 국가와 산업에 의해 이 분야에 (특히 강대국들 내에서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 권력남용은 이제 다수의 세목에서까지 보여진다. 세력 있는 정치가와 경제인 층에서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을 이용해서 그들의 특수한 목적과 관련하여 연구자, 연구 프로그램, 심지어 연구결과까지 주문하는 일이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오직 모든 학문분야가 수업기관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관리함으로써 철저하게 제지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자금조달을 받게 되면 연구자가 (그들에게 오는 기부나 출자금 들이 아무 특별한 조건 없이 주어질 때에도) 여러 실질적인 면에서 그들의 환경에 구속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프로젝트와 연구방법의 선별에 대한 결정은 오직 연구자들의 협의회 내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교육 및 연구기관들이 국경의 제한 없이 전세계에 걸쳐 마음대로 서로 왕래하며 함께 일하는 것은 자유로움의 결과로서 생기는 일이다. 이러한 자유가 보장될 때에 자금조달과 자치, 국제적 협력의 동일한 가능성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자주적인 정신 생활의 모든 단체에 주어질 것이다(예를 들면 종교단체, 예술생활, 대중 정보매체들에). 자율적인 정신 생활이 현대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는 위에서 보아 알 수 있다. 톱니바퀴 같은 오늘날의 생활에서는 경제나 정치적 이해(利害)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순수 인간적인 영역을 대표하고 옹호하는 일을 공히 자신의 인정된 과제로 떠맡는 기관들이 필요하다. 온전하게 그리 고 법적으로 보장된 자유 없이는 이 과제가 완수될 수 없다.

 

 

국가제도 및 법률제도에 관하여

 

특정한 순수 개인적 욕구들을 가꾸기 위해 사람마다 각자 자유로운 정신생활기관들을 필요로 하듯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권리를 마땅히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기관이 필요하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일이 맡겨지는 법적, 정치적 생활의 주무 관청들은 3구조로 된 사회조직 내에서 거대하고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종류의 과제 앞에 서 있다. 예를 들면, 개인이나 산업으로부터 교육, 연구 등을 장려하기 위해 주어진 기부금이나 출자금은 정신 생활의 자유를 위협하는 조건들과 결부되지 않도록 배려되어야 한다.

 

경제 생활의 자유가 (이에 대해서는 곧 언급될 것이다) 이미 주도적인 산업 영역의 손아귀에 놓여 그 엄청난 권력수단의 보존과 강화를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 불가능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사고방식과 법률제정 그리고 행정실무가 국회나 정부권력만큼이나 전체 문화 생활에 지배력을 행사하거나 최소한 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 그런 일을 조장하는 나라에서 그러한 일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일단 전체 사회조직을 3구조로 만들어야 할 필연성을 통찰하고 나면 점차 국가적, 경제적 그리고 정신문화적 기능들로 효과적 분리를 유도하는 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는 한 번도 일관되게 일어나지 않았지만) 의심할 바 없다.

 

슈타이너의 견해에 의하면 경제 생활의 이해(利害)로서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발된 국가기관들의 결정으로 기준이 되는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노동시간 및 작업 기준량의 실행과 사회보장 그리고 소득 형성에 적용될 규범 같은 것들이다. 국가가 원칙적으로 문화생활이나 기업가들의 일에 직접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서 국가가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법률기능의 약화를 초래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 밖의 사회생활의 분파에 어떠한 자기 이해도 얽히지 않은 국가조직에서는 객관적이고 편파적이지 않은 방침과 조치들이 특히 잘 마련될 수 있다. 국가는 법률을 주관하도록 맡겨진 사람들(사법관) 외에 어떠한 보조수단 없이도 사회적 대립과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다.

 

 

경제 생활에 관하여

 

산업화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전적으로 이웃들의 생산에 의존한다. 자신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할 뿐이라고 얼마나 확고히 믿고 있든 간에 상관없이 그는 오늘날 경제조직 내에서 자신의 작업을 통해 다른 소비자를 위하여 일하도록 맞추어져 있다(타급자족의 삶). 자급자족의 생활방식은 세계의 이런 부분들에서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다. 여기서는 현대의 생산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종류의 형제애에 대하여 (이 단어에 어떤 도덕적 의미도 부여할 필요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는 원칙적으로 상품이 가장 좋고 가장 싸게 생산되는 곳에서 그것을 구입하려 하기 때문에 현대적 교통수단을 갖는 이 시대에 경제 생활은 자연스럽게 전세계를 아우르는 연결망을 형성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 경향은 현재 세관과 수입금지, 외환규정 등에 의해 억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자유로이 전개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경의 제한에 상관없이 경제조합들이 형성되어 그 안에서 생산과 분배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 참여한 사람들 스스로, 아니면 그들이 선발한 대리자들은 틀림없이 당면한 필요와 만족의 가능성에 대해 상의하곤 했을 것이다. 그 조합들은 한 곳에서는 좀 더 지역적인 성격을 띠었다가도 또 다른 곳에서는 전세계를 포괄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상황에 맞게 주어진 임무를 다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정치적인 요구사항들이 뒤섞이는 일 없이 이들이 온전히 경제적 전제조건으로부터 발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된 나라와 미발달국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연결되는 전혀 새로운 형태가 생겨날 가능성들도 나타난다.

 

그 각각의 조합이 더 큰 조직단위로 모아지건 모아지지 않건 간에 이제 그들은 그 자체로서 3구조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독립적인 활동영역에서 일하는 것이다. 이 활동영역은 생활에서 매우 다양한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모든 종류의 물품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처럼 생산수단이 국유화되거나 기업가들이 국가의 조종을 받는 나라에서는 실행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인 의식에서 형성된, 산업체에 대한 사유화와 연관되어 있는 문제들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조처가 필요하다.

 

여기서 루돌프 슈타이너는 소유권상의 해결방법을 제안하는데, 이는 어떤 점에서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중용을 보여준다. 만약 관료주의의 만연을 피하고 각 개인의 창의력을 관여시키려 한다면 착실한 개개인에게 그들 인생의 가장 생산적인 시기에 재산과 생산수단을 자유로이 관리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날 때면, 그들에 의해 세워지거나 키워진 시기에 대한 처리권은 (자유로운 정신 생활의 전문기관이 동의한 뒤) 그런 업무를 떠맡을 능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넘겨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비된 입법을 통하여 많은 재산이 유산을 통해 비생산적인 소유로 넘어가는 일이 불가능하게 된다.

 

 

사회삼원론은 유토피아적인가?

 

상이한 기관들을 갖고 있는 세 가지 서로 종속되지 않은 생활영역에 모든 사람이 동시에 관여하는, 탈 중앙집권화된 사회조직의 건설은 의심할 바 없이 인류의 사회적 공존에 심대한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가장 유효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 국가와 국가연합의 대표들은 그들의 외교적·군사적 지향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으로 방향을 맞춘 문화와 경제 생활기관으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쉽게 믿으려 해서는 안된다. 국가기관들이 그들의 영역 내에서 사회정의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국가의 법적 기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겠지만 그 이상 다른 권력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며, 강제수단은 극히 제한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깨에 책임을 걸머진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일에 그런 질서를 부여하고자 언젠가는 서로 협력하리라고 믿는 것은 유토피아적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지금의 세계정세에 한 번 시선을 던져보자. 몇십 년 동안 단단히 결합되어 있던 권력층이 개방된 뒤에도, 극단적으로 힘을 기울여야만 해체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권력 집중과 군사적 파괴력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전면적인 파멸이라는 두려움이 누그러졌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만큼의 더 많은 지역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각 지역마다 모든 사회분야에 대한 통제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다.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동요가 있는 바로 이 시대에 소수의 국가관료들은 더 많은 권력을 그들의 수중에 집중시키도록 거의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느낀다. , 사회의 건강한 조직화를 위한 모든 노력이 소멸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전세계적인 대중매체 체제 및 경제 체제 망은 중앙집권화를 촉진하는 일에 계속해서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인해 지구상의 수많은 권력조직들은 더 많은 통제권을 위임받고자 노력하며 또한 점증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대처를 한다. 우리는 결국 또 다른 전쟁과 자유의 제한 그리고 사회생태학적 재앙을 예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신 생활(학교교육, 일반교육, 연구, 여론형성)과 경제 생활(공업, 농업, 은행업)의 기능들이 국가의 직접적인 권력층으로부터 해방될 때에 비로소 이 위험들을 진정시킬 수 있고, 어쩌면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앙권력의 통제를 기반으로 평화와 안전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오랫동안 품어온 유토피아는 맞지 않음이 입증되었고 구식이 되었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사회적 변형이 독단적으로도 가능한 독재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아주 강력한 국제 여론이 형성되려면 다양한 정보와 오랜 시간, 그리고 어쩌면 많은 아픔 또한 필요할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1919, 통찰로부터 비롯된 필요한 사회적 조치가 평화로운 발전 속에서 그리고 민주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책임을 의식한 정치가들에 의해 이끌어지고 실행되기를 희망했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던 변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시대에 맞는 사회적 체제가 실현되지 않는 한 인류의 여정은 쿠데타와 혁명 그리고 전쟁을 겪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3구조로 가는 도정에서 추구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그의 서술은 완전히 냉철한 것이었다. 그는 각각의 조치들이 자신이 스케치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형성될 수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그는 다수의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사상가들과 의식적으로 대립하면서 그가 장려하고자 하는 삶의 형태들이 절대 어떤 사회적 낙원 상태로 이끌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정치계나 경제계의 권력자 내지 일반 사람들의 도덕적 능력에 대해 그는 아무런 환상도 품지 않았다. 그가 매진하고자 한 목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건강한 사회체계로서, 이는 사회적이거나 반사회적 동인을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회체계가 건전하고 시대에 적합하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공존 형태로 실현된다면 인간의 모든 약점과 이기심의 한가운데에서 깨어 있을 수 있는 사회적 능력들이 촉진될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교육학을 근본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3구조의 이념들에 대한 해명을 비켜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교육예술의 기본목표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사회적 능력을 인간의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일깨워 키우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프란스 칼그렌·아르네 클링보르그,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옮김, <자유를 향한 교육>, 섬돌, 2008 :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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