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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자본주의 시대의 발도르프교육 - 벤자민 체리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자본주의 시대의 발도르프교육 - 벤자민 체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10. 29. 06:18

자본주의 시대의 발도르프교육 




벤자민 체리


벤자민 체리 학부모 교육

일시 : 2011년 9월 24일 오후 2시

장소 : 푸른숲발도르프학교 강당

통역 : 이지현(8학년 담임) / 정리 : 김미라, 손원태

 


 


안녕하세요. 푸른숲학교에 오게 되어서 행복합니다. 푸른숲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아서 기쁩니다. 이 학교에 오래 계셨던 분 계신가요? 처음부터 계셨던 분도 계신가요? You are strong! 작년에 오신 분들은 같이 가을 노래를 불렀는데요, 오늘도 불러보겠습니다.



Autumn leaves curl & twist & fall,

Crystal clear the night sky!

Autumn means winter's coming too,

But when the darkest hour is through,

In the deep earth, in the warm earth

New life will rise!


가을잎이 말라 비틀어져 떨어질 때,

수정처럼 맑은 밤하늘!

가을은 겨울이 오고 있음을 뜻하지,

하지만 가장 어두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깊은 땅 속에서, 따뜻한 땅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야!




 


작년 이후로 한 단어를 바꾸었습니다. 겨울에 땅 표면은 차갑지만 사실 그 속은 따뜻합니다.

 

오늘은 발도르프교육이 자본주의 시대에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의사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봅시다. 슈타이너가 가졌던 통찰력에 대해서 여러분이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야기한 사회삼원론을 떠올려 보고 발도르프교육으로 확장해보겠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발도르프교육은 교육방법론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바른 눈을 가지고 사회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예술적으로, 학문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도 교육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발도르프교육이 바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는 교육이기 때문에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교육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이 자기 나라의 땅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누가 결정합니까? 미국이 그 결정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갈등이 어디에서 옵니까? 일반적으로 그것은 사회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그 사회적 문제는 많은 부분에서 미디어와 정치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 계신 여러분은 분단된 현실 속에 있으면서 정치와 미디어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나와 타인이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그럼에도 함께 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그것(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에 관해 관심을 갖고 또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육이 큰 역할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 수업도 사회적 관계에 대한 교육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잠시 후에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물질주의적인 사회입니다. 물질적 사고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환경입니다. 모든 것들이, 자연이든 미래든... 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사고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효용가치가 있는 것을 중시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의 시대와 사회의 모든 네트워크가 연결된 곳은 자본주의인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사회와 사고의 바탕은 물질주의입니다. 우리가 한 번만 산다면 어찌 안 그러겠습니까? 우리가 한 번 산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 외에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질주의적 사고가 현시대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는 교육의 근원입니다. 잘하려는 강한 경쟁심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높은 수입, 좋은 대학, 좋은 직장, ... 이 모두가 이겨야 하는 강한 경쟁을 불러옵니다. 물질적인 부는 굉장한 축적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의 내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부에 축적되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올바른 역할(도리)이 아닙니다. 제대로 하려면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지요.

 

다섯 살 된 손자가 있는데 일 년 반 전에 그 아이에게 여동생이 생겼습니다. 큰 아이는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감이 약해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의 관심이 아기에게 가게 되니까요. 그렇지만 자신의 동생에 대해 품는 사랑이 점점 커지면서 큰 아이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자기에게 또 하나의 동반자가 생겼다는 것을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로서 그것을 밖에서 지켜보면, 아이가 진정으로 풍성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 이외의 동반자를 갖게 되었고, 자신에 대한 관심이 조금 줄어들었어도 여전히 충분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소통의 중요성

 

어린아이는 작은 세상에 살지만 자라면서 점점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유치원으로, 학교로, 사회로, ... 이 학교에 지난 기간 동안 어떤 사회적 갈등이 있었나요? 학생과 학생, 학생과 부모, 부모와 교사, 교사와 학생, 부모와 부모, ... 우리가 받은 교육이란 것이 얼마나 사회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준비시켜 주나요?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세입니다. '내가 어떻게 대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에게만 집중하고 나에게 갇혀 있다면, 좁아지고 부모로서도 교사로서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교사와 부모에게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발도르프학교의 비밀스러운 부분은 아이들이 어린아이, 큰 아이, 더 큰 아이로 커가면서 타인과 자신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아이의 내부에 자리잡게 한다는 것입니다. 3학년 아이의 수업을 3살짜리 아이와 하는 방법으로 수업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1학년 수업과 3학년 수업은 분명히 다르겠지요. ... 부모와 교사는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부모와 교사는 제대로 된 길을 벗어난다든지,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간다든지 하게 되겠지요. 학교의 규모가 큰가 작은가에 따라서도 달라지겠지요. 학교가 작을 경우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학교에 대한 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교의 규모가 커지고 사람들이 제 각각의 생각을 가지고 제 각각의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고집할 때 큰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집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들어야 합니다. 열어서 다른 것을 보고 이것이 나의 생각인데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놓고 서로서로 배울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의사소통은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 보고 그래서 그 아이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외부로 드러나는 언어. ... 어떠세요. 이해가 되세요? 혼란스러운가요?



사회삼원론의 이상 : 자유, 평등, 박애

 

자본주의로 돌아갑시다. 자본주의란 것은, ‘자유’란 좋은 것인데 그것이 잘못된 상황에 적용된 것입니다. 언제나 색다르게 들리는 다른 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 ‘자유’라고 적고 다시 ‘정신의/문화의’라고 적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는 아주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 아주 좋았던 것이 다른 곳에서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생각해 보면 사람의 몸은 여러 가지의 장기와 기관이 잘 일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귀에 막 넣고 코에 막 넣으면 독이 되지요. 소화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완벽하게 파괴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소화 기능을 입으로 가져와서 입에서 산이 나오고 그런다면 어떻겠습니까? 파괴적인 기능을 가진 소화를 언어로 가져온다면 언어가 파괴적인 기능을 하겠지요.

 

또 한 가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 ‘평등’입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아이로 나서 어른이 되어 죽는 인간인 이상,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 인간인 이상, 우리는 모두가 다 같은 인간입니다. ‘평등’ 위에는 ‘정치적인/법률적인’이라고 썼습니다.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평등이 보장되길 바랍니다. 이상적으로 정치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어떤 것이 필요하고 하는 모든 것을 아울러서 법을 만들게 됩니다. 말한 것처럼 자유는 좋은 것임에도, 이 평등의 영역으로 가져온다고 하면 자유는 독소의 기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벌 회장이 음주운전 같은 것을 하면서 ‘내가 누군지 알잖아. 나는 처벌받고 싶지 않아.’ 그리고 경찰을 매수해서 문제 없이 처리하는 경우가 그 예입니다.

 

세 번째 영역이 ‘경제’ 영역인데, 셋 중에서 가장 복잡합니다. 우리의 경제라는 것은 우리의 필요(욕구)가 만나는 그런 분야입니다. 모두가 먹을 밥, 살 집, 탈 차 등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살아가는 데 수천 가지가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살아가려면 수없이 많은 것이 필요한데, 경제 영역이 그 모든 것을 제공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건강해야 합니다. 이익을 내는 것이 건강한 경제의 역할이지만, 그 과정을 잊어버리고 자유를 가져와서 함부로 하면 독이 되겠지요. 경제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용어를 썼습니다. 이타주의/협동이라고 하는.


현재의 경제에서 이타주의가, 같이 일하는 것(협동)이 규칙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된다면 그 경제에도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 하는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이런 것을 생산해 낼 때 생산과 이득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생각해서 이득을 내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그 경제시스템에도 이익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시스템으로 어떻게 타인에게 이익을 낼 것인가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생산하는 것,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생각하고 이 경제적 행위가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생산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현실은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옷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사거나 누가 준 것입니다. 먹는 음식도 내가 직접 기른 것이 아니라 사거나 누군가가 길러준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수 천 가지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제의 현실입니다. 그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한 분야가 경제입니다. 이 경제가 오늘날 오히려 파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 이득이 되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이 안에 우리가 좋은 것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기에게 집중된 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파괴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 사회, 교육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경제에서 가장 크게 바뀌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180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닌, 주변에 이득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 또한 경제입니다.

 

다시 자유로 돌아가서 정신적인 것, 문화적인 것을 살펴봅시다. 개인에게서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독립적인 내면의 삶입니다. 그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내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은행에 100만 달러가 있을지라도 지구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아플지라도 내적으로는 행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면의 것은 자기 계발의 측면입니다. 정치, 법, 경제에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있든 우리는 내면의 생활(내적인 자유)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발전, 자기 계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계발을 인생으로 가져오는 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자유’의 분야이지, 무엇을 만들어내는 경제의 분야가 아닙니다. 경제가 교육으로 와서 이것을 생산하라고 하면 그것은 독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육에 정치(평등)의 영역을 가지고 오는 것도 독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즘 세계적으로 정부가 학교에 "이것을 가르치고 저것은 가르치지 말라"고 간섭합니다. 호주 같은 자유로운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있는 호주의 발도르프학교에서도 ‘정부에서 요구하는 것을 단지 다른 방법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매년 보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 분야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부모, 정부 등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간섭을 합니다. 그들 모두가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단지 교사만 권위가 없습니다.



발도르프교육이 추구하는 것

 

어떤 사람이 교사가 되어야 할까요? 또한 자기 계발, 내적인 삶, 이것들은 교사든 부모든 모든 개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교사가 윤리적인 사람인지, 내가 윤리적인 사람인지 어떻게 신뢰하겠습니까? 이것은 법적 영역이나 경제 영역과는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한국 법에서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경제에서도 ‘윤리적인 사람이 필요하니 학교가 만들어라’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윤리적 행위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보세요. 교육이라는 것이 자기의 내적인 것에 억지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이 밀어붙이는 것이 되면 내적인 교육을 이루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아주 연약한 아이일 뿐입니다. 나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라납니다. 교육이 내적인 것을 키워주고 내가 실수를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윤리적 발전, 계발은 수치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적인 어떤 것의 느낌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때때로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택하는 것일까요? 단지 의무 때문이고 이렇게 하면 보상받고,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기 때문일까요? 어느 사회에서도 규칙은 필요하지만 윤리적 인간은 규칙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규칙을 지킬 수도 있고 안 지킬 수도 있지만, 나의 내면에서 솟아나오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사회에서 윤리적 행위는 ‘자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선택, 행동, 말 등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삶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오직 내 내면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에는 이 분야가 어떻게 되어 있나요? 정치, 사회, 경제 분야에 있는 사람이 현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요즘 시대에는 그 사람들이 꼭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과 마찬가지로 과학도 다른 것들(정치, 경제)과 하등의 상관이 없어야 하고 인간과만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는 당연히 개인이 자유롭게 결정해야 하고 예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미디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하등의 연관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미디어 뒤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직업이 무엇이든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창조적인 자신의 삶과 자신의 내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이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어 일을 할 때, 세상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큰 세상이든 작은 세상이든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훨씬 더 풍성해지겠지요.


현대 물질주의적 사회에 발도르프교육이 나왔습니다. 이 교육이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치유할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정치, 경제와 전혀 관련이 없이 오직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발도르프교육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이든 부모든 교사든 모두가 다 치유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초반에 ‘발도르프교육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기초는 커리큘럼이 아닙니다. 그것의 기초는 이 학생, 이 학급, 이 교사 그리고 이 사회입니다. 바로 이 곳, 이 때입니다. 그래서 교사가 내면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교사는 자신의 내면의 성장을 통해서 아이들을 양육시킵니다. 교사에게 이런 창조적이고 내적인 것이 더 풍성해질수록, 아이들이 배우는 모든 것들을 더욱 가치롭게 교사가 만들어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수학 없이 가르치면 아이가 자라는데 균형이 맞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이의 어떤 부분에서 균형이 깨집니다. 음악, 색채, 미술, 과학 중 어느 하나가 모자라게 되더라도, 모두 아이의 배움에 균형이 깨질 것입니다. 교사를 통해서, 주변 어른들을 통해서 세상이 아이 하나하나에게 살아 있는 삶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발도르프학교의 교육목적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더 큰 세상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시험이라고 하는 좁혀진 세상이 아니라 더 큰 세상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자유의 가치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고양될까요? ‘윤리적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고양시킬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아이를 자유 속에 있게 하면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 우리를 벗어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지금 어른이 아닙니다. 어른은 자기 책임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어른은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감정이나 과거나 다른 사람이나 그런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내부가 비어 있지 않아서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가장 고차원적이고 이상적인 어른입니다. ‘네가 나를 화나게 했잖아’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위가 상대방에게 있다는 것이고 상대방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이들에게 자유는 너무나 크고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책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자유를 주어버린다면 (책임지는 일 없이) ‘나는 이걸 할 거야. 저걸 할 거야’ 하고 자라게 되어서, 흔들리고 자신이 없고 자신보다 큰 것에 대한 경외감을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면에 철장같이 영역을 좁혀버린다면 스스로 결정해서 할 수 없는 경직된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발도르프교육의 시도는 아이들에게 잘 맞는, 중도에서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분명하지만 따뜻한 영역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교사가 부모가 아이들의 내면을 채울 수 있는 내용을 아이들에 줍니다. 아이들은 그러한 것을 배우는 것을 사랑합니다. 학교를 사랑하고 집을 사랑하고 학교와 집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른이 되었을 때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슈타이너는 그의 <자유의 철학>에서 ‘자유로운 인간이란 윤리적 인간이다. 그리고 그의 행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행위이다’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을 가치롭게 여긴다면 그 사람이 가치롭게 여기는 것에 해가 되는 것을 행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있는 곳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파괴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을까요?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비어 있고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통합되지 않아서 거기에서 파괴적인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발도르프교육이 지향하는 점입니다.


발도르프학교 학생들은 열심히 해야 합니다. 발도르프교육은 재미있는 것만을 찾아서 하는 말랑말랑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한다는 의미는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한 좁은 의미가 아닙니다. 학생들이 자기가 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거워한다면 학생들은 더 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윤리적 행위라는 것은 생활과 밀접한 것이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주는 것입니다. 삶과 밀착되어 있어서 이후에 더 많을 것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 삶을 자기 안에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의지를 내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인생을 자기 안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세요. 내면적인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발도르프교육이 시작된 지 92년 되었습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발도르프교육이 정말 풍성하게 이루어내는 시기는 아직은 아니고 미래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질의응답

 

질문) 윤리적이고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사회삼원론과 관련해서 ... 여기 계신 모든 어른들, 주변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고 자유로워야 하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상호관계 속에서 의사소통에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일상생활 속에서 그렇게 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이 있나요?

 

답)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랑하십시오. 총기 난사 사건 등 극단의 경우를 ‘자기가 하고 싶어 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확신을 갖고 하고 싶어서 한 것이라고. 그러나 더 깊이 분석을 해 보면 그가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제적인 요소나 외부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용적인 방법을 물었으니 실용적으로 대답한다면 매 순간 내가 결정하고 매 순간 나는 나의 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작은 것부터 시작합니다. 책을 읽을 때 머리를 긁적거리는 것, 이 아이를 볼 때마다 숨결이 급해지는 것, 그러한 순간에 얼마간 멈춤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또 매일 작은 과제를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질문) 윤리적인 것, 도덕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요. 개인적으로 전통적 사고방식 중에서 옳은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혼란스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윤리 도덕이 영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좀 더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우리가 분명히 생각할 것은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밖에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인가?’입니다. 윤리라는 것은 무엇을 지킬 것이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적인 현존이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부모님께 혼재된 감정을 가진 것처럼 아이들도 여러분에게 혼재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 경험에서 나온 말인데, 외부에서는 나에게 ‘이렇게 해야 돼’라고 말하지만 나의 내부에서는 ‘사실 나는 이렇게 하기 싫어’라고 말합니다. 윤리적이든 그렇지 않든을 떠나서 ‘이것이 내가 할 것이고 내가 이것을 할 책임을 가지고 있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늙으신 어머님을 모실 것이냐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윤리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어떤 책임이 따를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총체적인 책임을 내가 가지고 있다.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내가 하는 일을 멈추고 나서는 늘 어머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불만을 내 삶과 내 생활에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유로운 결정이 아닙니다. 선택한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한탄하는 것은 자기의 결정에 대해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이 필요해’라고 할 때 내가 자유의지로 ‘내가 이것을 하겠어’라고 결정을 합니다. 내 자신 전체를 통해 하고 싶어서 하게 되면, 그 결과는 책임이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100% 내면적 자유가 됩니다. 즉, 내면적 자세의 문제인 것입니다. 나의 반쪽이든 나의 1/4쪽이든 하겠다고 하고, 내 전체가 하지 않으면 사람은 지치고 피곤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경우, 안하겠다고 번복하면 나의 반쪽이나 3/4쪽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죄책감을 느끼느라고 역시 피곤해집니다. 못하겠다는 분명한 인정을 하고 이것을 결정하면 온전히 그 결정된 것으로 가야 합니다. 미래에 다시 그것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전체의, 전체로서의 현존, 자유의지, 그리고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발도르프교육에서 아이들은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렇게 할 씨를 뿌리고 가꾸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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