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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학교와 새로운 공동체 - 미하엘 데부스 본문

인지학/사회삼원론

발도르프학교와 새로운 공동체 - 미하엘 데부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28. 07:28

발도르프학교와 새로운 공동체

- 우리의 학교공동체, 무엇이고자 하는가?



미하엘 데부스(Michael Debus)

독일 슈투트가르트 사제대학 대표교수 역임

그리스도교 공동체 교회(Christengenmeninschaft) 사제




누구든지 사람들은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서로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빠와 엄마, 즉 부부가 최초의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부부는 곧 아기를 이 세상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맞이하고, 또 이어서 동생들을 낳으면서 조금씩 더 큰 단위의 친족이 아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아이가 태어나서 소속되는 첫 번째 공동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인생의 과정에서 큰 의미와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에서는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의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도 됩니다. <나는 스스로 찾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 무언가를 찾으려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준 공동체에서 완전히 채울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채워줄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으려 합니다. 모든 각 사람은 자신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분명히 다르고, 결코 서로 바꿀 수 없는 고유한 자신의 그 무엇입니다. 인생의 세 번째 7년주기에 해당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이것에 대해 아직 아주 민감하면서도 스스로 무엇이라 규정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 청소년들은 그 무엇에 대한 강한 동경을 하고, 지금까지 보살펴준 공동체를, 경우에 따라서는 맞닥뜨리는 모든 대상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해 모색하고 추구하는 모습은 이전의 시대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느낌과 의미도 다르게 다가오게 됩니다. 공동체는 각각의 고유한 개별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개별적인 가치를 모색하는 것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가치와 일정한 긴장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가족, 마을, 같은 언어의 나라, 민족 단위 등) 그리고 요즘은 개인의 판단과 공동체의 판단이 다른 경우에 (청소년의 경우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뜻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자신의 판단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당연히 오늘날에도 아직 세세한 규제와 개인의 고유한 성향과 관심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문화가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전혀 다른 모습의, 공동체의 가치가 사라진 문화, 거기다가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도 나타납니다. 거대한 국가의 체계에서도(소비에트연방, 유고연방 등), 아주 작은 단위인 부부나 가족관계에서도 이러한 변화와 붕괴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 그리고 개별적인 단위들은 각각 자신의 조건과 상황이 다르지만 이러한 해체 과정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경향과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관심과 역할이 공동체에 작용하여 나타나는 결과라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위의 사항에 대해 이미 19세기 말에 사회적 기본법칙으로 특징지운 바가 있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현상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은 법칙적인 과정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인류는 초기의 사회조직 형성시기에는 조직의 관심과 판단을 우선적으로 지향하면서 개인의 관심과 판단을 희생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음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은 사회조직을 우선했던 관심이 개인의 자유와 해방으로 돌려지고 각 개인들의 요구와 역량이 발휘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모두가 각각의 개별적인 삶을 누리면서 더이상 공동체의 모습은 없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미래를 향한 인류의 건강한 방안은 개인의 고유성을 견지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의 공동체,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한다면 공동체의 삶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요? 요즘 여러 나라나 공동체들이 겪고 있는 일들로도 충분히 의문과 절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극적인 무언가가 나오지 않으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공동체는 붕괴하겠지...


새로운 공동체는 그러나 옛 공동체와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합니다. 해방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과 관계없이 형성된 공동체나 질서에 따르며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 스스로의 삶을 위해 방향을 정하고 자기 고유의 목표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러나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의 목표와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외형적인 정보나 지식을 모으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면의 연습과 성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발도르프교육의 중심 모티브는 그래서 자유를 향한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옛 공동체에서는 자신들과 관계없이 만들어지고 주어진 사회규범을 통해서 사람들이 매여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자유로운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들의 의지로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가는 그러한 공동체가 있을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공동체의 성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외형적인 규범을 좇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 사람들의 선한 의지로부터 생기는 새로운 것을 가지고 서로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옳고 훌륭한 목표라 할지라도 서로가 지원하고 돕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이뤄낼 수 없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으려면 자유로운 조건과 상황에서 스스로 그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의 고유한 이상은,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때 찾아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역으로도 성립합니다. 어떤 이상적인 목표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빛나는 것이라면, 이러한 일은 다른 사람들도 기꺼이 함께 이루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고유한 이상이야말로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에서의 사회적인 기본방안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모두 옛 공동체의 질서에 속해 있습니다. 옛 공동체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지혜 공동체(도덕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의 목표와 이상을 위해 세워지는 공동체입니다. 각 개인들의 목표를 위해서는 또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두가 하나의 같은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공동체, 이것 역시 사람들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다만 서로가 평등하고 서로가 각각 다른 자신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래서 새로운 공동체는 의지의 공동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단지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존재합니다. 부모님들은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학교를 원합니다. 선생님들 역시 자신들의 고유한 동기부여로 이루어진 학교를 원합니다. 학생들 또한 자신들이 좋아하는 학교, 다시 또 다른 모습의 학교를 원합니다. 이렇게 모두가, 모두의 의지가 모여서 발휘된다면 거기에서 새 공동체의 맹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원하는 모습은 미래에 속하는 모습이 될 것이고, 각 개인들의 뜻과 활동이 보태어지고, 과거로부터 온 문화의 요소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학부모 모두의 성원이 참여하는 여러분의 학교 공동체가 의지의 공동체로서 나아갈 때, 바로 여기에 우리의 특별한 순간들이 있는 것입니다. 서로 환영하며, 어쩌면 실제로 축제를 이어가는 분위기에서 공동의 목표를 의식하며 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리의 삶을 영위하는 지금의 문화에 건강한 미래지향의 자극과 동력을 제공하는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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