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자이델 선생님의 사회삼원론 강연 본문
자이델 선생님의 사회삼원론 강연
2019. 1. 8. 화
인지학센터(서울 여성플라자)
통역 : 여상훈
서기 : 김훈태
안녕하세요? 제가 독일에서 강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는 한국의 어느 교회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그곳에서 설교하시는 분이 그 공동체의 교인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그 제안은 이랬습니다. “여러분들은 베트남 사람들을 닮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하루에 13시간씩 일합니다. 그렇게 하면은 한국 전체의 GDP가 높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에 와 보면 느끼는 것이 한국은 이미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교회에서 설교하시는 분은 가족이라든지 예술이라든지 교육이라든지, 왜 이런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까? 이렇게 잘 사는 나라에서... 13시간씩 일을 하면 그런 공동체에서는 교회에 갈 시간조차 없을 텐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지?’
놀라운 현상들이 있지요. ‘어떤 상태에서 이미 더 나은 상태로 간 사회에서는 과연 그 사회 조직이 어떻게 해야 건강한 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제 그 문제에 대해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건 지난 세기 1968년의 일입니다. 학생운동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한국의 경우라면 80년대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 젊은이들은 새로운 사회적인 전형, 새로운 사회의 틀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회를 이끄는 새로운 전형들 말이지요. 그런 새로운 사회적 틀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부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이었지요. 당시에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인데 그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그린피스라는 환경운동 단체도 생기게 되었고요.
전체적으로 보면 학생운동의, 젊은이들의 움직임의 중심지는 프랑스였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 학생혁명에서 내걸었던 표어는 이런 것이었지요. “상상력에게 권력을!(L’imagination au pouvoir)” 우리의 상상력이 우리를 인도하게 하라. 우리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 상상할 수 있는 것, 현실이 아니라, 그것에게 권력을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이 불렀던 <시대는 늘 변하는 것이야(The times they are a-changin’)>가 전세계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젊은이들의 갈망, 새로운 사회에 대한 틀이라는 갈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전체적으로, 물론 젊은이들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젊은이들은 당시의 현실, 사회적인 틀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 경험에서 무엇을 얻었고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되었는가? 그렇게 질문을 해보면 세 가지 영역에서 어떤 현상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개인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전통에 따라 자동적으로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들, 우리는 자기가 직업을 선택할 때도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고르는 것이었지, 가업을 따르거나 전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그냥 복종하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1) 우리는 점점 더 개인화되어간다.
우리는 정치 영역에서 점점 더 시간이 흐를수록 인권이라는 문제에 자각을 갖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수만이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집단의 의견도 반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그 사이에 이런 법까지 생겼습니다. 모든 기업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차이, 개인 간의 차이, 즉 성별 인종(피부의 색깔) 성적 정체성 등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차별을 받으면 안 된다는 법이 생깁니다.
2) 인권의 실현
그리고 경제적인 분야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경제가 전세계적으로 한 덩어리로 묶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상호의존성’이 경제의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예를 들어 석유를 나르는 세계의 유조선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전에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가지게 되는 생각 중의 하나는 이른바 공정무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건의 가격이 어느 선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냐면, 그것이 모든 생산자들의 생활수준을 일정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는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페어 트레이드에 대한 생각이지요. 물론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갖고 있는 부정적 측면도 역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개인화, 개별화, 개인주의로 흐를수록 우리의 공동체는 점점 더 파편화됩니다. 지금 현재 유럽에서는 이른바 극우단체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극우단체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개인화되어갈수록 정치 영역에서는 극단적인 성향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공동체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온 것과 같은, 경제 분야의 상호의존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아랍 국가들이 전세계에 석유를 공급하는데, 그런 석유공급이 끊어지면 견딜 수 있는 경제라는 것이 이 지상에 있을까요? 아니면 이라크에서 했던 것처럼 천연자원을 둘러싼 전쟁을 다시 해야 할까요? 시리아에서 현재 일어나는 전쟁도 같은 맥락인데요, 민주주의라든지 그런 가치를 위한 전쟁이 아니고 오로지 천연자원을 둘러싼 전쟁들입니다. 한국의 예를 들어봐도 그렇지요. 한국은 여러 강대국의 힘이 부딪히는 완충지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독일이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독일을 중심으로 생긴 경계선에는 어떻게든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힘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힘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사회적인 틀, 또는 이념 같은 것들을 원하게 되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새로운 이념이 생기면 그 반대쪽에는 그것과 전혀 반대의 이념과 사회적인 틀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요. 그렇지만 강대국들 사이에 서로 상반되는 사회적인 틀이 있느냐를 생각해보면 고대 그리스와 다릅니까? 사실 오늘날에도 러시아나 중국 같이 그렇게 큰 나라를 들여다보면 그 나라들은 마치 그리스 시대 때 신정국가와 같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제일 꼭대기에 당 지도부가 있지요. 이집트 시대에는 그게 바로 파라오였는데요. 그리고 그 밑에는 산업이라는 분야가 있고, 광범위한 관료조직이 있습니다. 또 그 밑에는 농부들,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입을 벌릴 일이 없습니다.
이런 체제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이른바 우애 넘치는, 박애적인 사회주의, 따뜻한 사회주의라고 했던 것인데 그러한 것은 실제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말로만 가능한 계급 없는 사회주의가 그것이었습니다. 서쪽에서는 또 상황이 어떠했냐면, 미국을 축으로 해서 우리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기름이 잘 칠해진듯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경제 기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서쪽을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아시지요. 이렇게 기름친 듯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경제 기계로서의 사회는 여러분이 뉴스에서 본 것처럼, 예를 들어 미국의 정보국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것처럼 사실은 이런 사회도 저 위에서 완전히 큰 세력이 전체를 감시하고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그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표어는 자유입니다. 물론 서쪽에서는 그야말로 자유롭게 살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는 있지요. 물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로운 이야기, 자유로운 행동이 자본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경험이지요. 양쪽에 극단적인 사회체제가 우리에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 틀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되는데요. 그 갈망은 우리의 새로운 사회적인 틀이 우리 의식의 발달 정도에 걸맞기를, 적절히 맞아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신의 정신과학 연구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의식 발달과 맞는 세 가지 요소를 이야기합니다. “중앙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중심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중심보다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 하부요소이다.” 첫 번째는 경제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경제생활을 구성하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겠지요. 두 번째는 자율적인 교육체제,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달시킬 수 있는 교육체제입니다. 여기의 이상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먼저 말씀드린 경제생활의 이상은 바로 박애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평등이라는 이념으로 지배되는 정치생활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평등, 박애는 아시다시피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극적으로 드러나고 실현된 것이지요.
오늘날의 현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경제와 정치 생활이 교육체제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 가지 가치가 어느 분야에서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또 어떤 분야에 적용되면 반생산적으로, 비생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문제에서 생산적이고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하려면 개인이 자기의 사고의 습관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기가 판단력을 스스로 길러야 한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이 세 가지 이념이 어느 분야에서든 긍정적으로 생산적으로 작용한다.”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체를 가진 존재인데 지구는 하나이고, 하나인 지구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한된 자원을모든 이가 공평하게 함께 나누는 것이 박애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므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지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발달시키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능력도 다르고요.
세 번째 정치 생활의 영역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정신적인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 안에는 붓다의 본성, 그리스도의 본성, 이런 것들이 들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합니다. 동등한 정치적 권리가 주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 가지 가치, 이념입니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인간의 본성(신체, 영혼, 정신), 그 세 가지 가치가 어떤 사회에 안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경제 영역에서는 반드시 박애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 박애라는 이념을 통해서 생산된 것들이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지는 그런 경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유럽연합이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하고 있는 정책이나 태도는 그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우리(유럽) 정부나 유럽연합은 그야말로 대규모 양계장에 보조금을 줍니다. 그렇게 싸게 생산한 닭을 아프리카에 판매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망하게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유럽인들의 세금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개발원조라고 부릅니다. 그야말로 박애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지요.
교육 그리고 문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아마도 교육과 관련된 곳에서 일을 하시지요? 교육자시죠? 교육에서 자유라는 이념은 과연 적당하게 맞아들어 가는 이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교육자이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으로 발달하도록 지원하고 도와줄 것이냐가 바로 이념이 되지요. 여러분이 원하는 다음 세대의 인간상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것을 모두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인간, 그걸 키워나간다는 것이지, 주변의 필요에 의해서 어떤 곳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만 갖추어서 좁아지고 아주 제한된,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키우려는 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가, 여러분들이 길러내고 있는 그 세대가 우리가 계속 저지르는 실수를 똑같이 저지른다면 우리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평등이라는 이념에 대해 이야기해보지요. 평등이라는 이념 하에서 우리 시민들은 서로 상대방들의 의무와 권리를 직접 결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이념이라는 것은 각각 그것이 해당하는 분야에서만 생산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예를 들어서 정치 생활에서 제한 없는 자유라는 이념을 쫓을 경우 그야말로 완전한 자의적인 행동들을 하게 되겠지요. 자유라는 이념을 경제에 적용하면 제한 없는 자유주의가 나올 것입니다. 이 자유주의는 사람이나 혹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착취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평등해야 한다는 이념을 여러분이 교육체계에 완전히 도입한다면 문화는 획일화되겠지요. 사고까지 획일화될 것입니다. 경제 분야에서 완전한 평등이라는 이념을 적용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개별적인 요구는 충족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 분야에서 만일 박애, 즉 우애를 적용하게 되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바로 부패일 것이고, 패거리활동일 것입니다. 이렇게 각각의 이념들은 그 분야 영역 안에서는 건설적이고 훌륭하게 작용하지만 특별한 변화 없이 다른 분야로 옮겨가게 되면 대단히 파괴적으로 작용합니다.
1905년과 6년에 루돌프 슈타이너는 아주 분명한 어조로 사회원칙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행복의 총합은 각자가 자신의 능력과 활동으로 얻은 것을 포기할수록, 적게 요구할수록 그리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서 충족하려고 노력할수록 더 커진다, 이것이 루돌프 슈타이너가 사회원칙의 요강으로 삼은 것입니다.
* 사회적 주요법칙
더불어 일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대가를 적게 요구할수록,
즉 자기보다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게 할수록,
전체의 영성이 점점 자라난다.
또한 각자가 바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노력에 의해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공동체의 영성은 더욱 커진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욕구가 서로의 관심에 의한
사랑의 힘으로 채워질수록,
서로가 평등함을 바탕으로 모두의 뜻이 모아질수록,
자유롭게 서로가 서로를 돕고 유지될수록,
사회삼원론의 질서는 더욱 잘 이루어진다.
하지만 서로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면
사회삼원론의 정신은 사라지게 된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모임들의 모든 욕구가
조합의 차원에서 민주적이고 협조적으로 이루어지고 지켜질수록
사회삼원론의 구조는 더욱 집중적으로 발달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모임들이 서로를 소외시키는 결정을 하고
이익과 효율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수록
이 사회는 획일적인 중앙집권체제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부 칙
- 공동체 사회의 정신적인 삶은,
협동하는 이웃들이 정신문화적인 활동을 할 때
그것이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에서 나올수록 더욱 풍요로워진다.
- 공동체 사회의 법적인 삶은,
모든 이웃의 평등에 따라 민주적인 노력을 실천할수록
더 많은 지지가 생긴다.
- 공동체 사회의 경제적인 삶은,
재화를 분배 받는 모든 이웃 사이에서
사랑을 통한 연대의 노력이 실천될수록 더 만족스러워진다.
지금 현실이 이렇습니다. 기술적인 면에서의 경제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냐 하면,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의 재료인 면화는 아프리카에서 생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옷감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도 타이완 같은 곳에서 할 것입니다. 그 옷을 완성하는 것은 중국이나 터키 같은 곳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미 우리의 생활을, 다른 사람이 만든 것에서 우리의 요구를 충족하고 있지요. 분업이라는 것을 통해서요. 아까 이야기한 슈타이너의 사회적 원칙은 도덕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슈타이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사실에서 나오는 결과, 이것들의 관계입니다. 경제생활에서 생산된 것을 우애적으로, 그야말로 박애정신으로 나누면 나눌수록 경제생활 자체가 건강해집니다. 예를 들어, 생산에서도 그렇습니다. 여성들을 포함해서 생산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키워줄수록 모든 사람이 얻게 되는 긍정적 결과는 더 커집니다. 그런 식이라면 결국 우리의 교육과 관련된 체제, 즉 정신생활도 더 건강해지겠지요. 그것이 바로 발도르프 교육이 독일 그리고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발달 단계에 맞게 키울 것인가? 너무나 일찍 전문가처럼 키우는 게 아니라 발달 단계에 맞게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키워주는 것, 이것이 슈타이너가 던지는 질문 또는 과제입니다.
그리고 정치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상대방이 서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떤 협의나 협정, 이런 논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해줄수록 우리의 정치생활은 건강해집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사회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즉 이런 세 가지 중요한 이념들을 앞에 내세우는 요소들이 우리 사회에 가장 이상적이고 맞는 것이라면 지금이 아니라 왜 50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500년 전에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질문 말입니다. 인류는 사실 늘 그러한 이념들에 의해서 인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신비적인 일들을 주도하던 사제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경우에는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신을 대신해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과 신과 관계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구분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시대에 와서는 초기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이른바 개인이 등장합니다. 지금의 발달 단계는 인류의 의식이 개개인 안에서 반영되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파라오나 사제들이 이제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이다, 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도덕과 관련된 판단력을 가지도록 불리움을 스스로 받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개인화되어가는 상황입니다. 중세 이후로 우리의 의식은 지상의 것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 위의 것들, 즉 고차적인 것들과는 단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지상의 삶에 집중한 덕분에 생긴 게 기술입니다. 그리고 등장한 물질주의 또는 유물론은 도덕적 가치체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생각해왔던 정신세계와는 관련이 없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이른바 영적 연결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연결은 결국 영혼을 가진 존재의 개인적인 일이고, 개인이 그 영적 연결, 정신적 연결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알아서 명상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눈을 떠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영적 차원입니다. 그것도 아주 개인적이고 개별적 차원에서입니다. 인간은 아주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다른 사람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사회체제에서 우리가 눈을 떠야 하는 것은 그렇게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교육체제, 또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문화 안에서는 말이지요. 자주적인 교육체제 안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다음 세대 아이들의 가장 이상적인 발달, 그것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교육부장관이 여러분에게 지시하거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 여러분이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그 가치들에 따라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겠지만, 일단 독일의 경우만 봐도 교육체제라는 것이 너무나 고리타분한 구식입니다. 모든 명칭을 봐도 그렇습니다. 김나지움이라는 말도 그리스어입니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경제계에서조차도 교육계가 길러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창의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경제생활에서 눈을 뜨려면 생산자와 소비자 또는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되느냐,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더 잘 전달되느냐를 고민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론 그 분야 자체 내에서 경험을 얻어야 합니다. 그 분야에 가 있지 않고는 쉽게 경험하기 어렵겠지요. 예를 들어, 선생님들이 경제계에서 금방 일을 잘하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무엇이 더 현명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정치 분야에서 우리의 깨어남이란 것은 여러분이 정말로 서로가 완전히 평등한 협상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세 가지를 지배하는 네 번째 요소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 세 가지를 전부 지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루돌프 슈타이너는 권력이란 이래야 한다 또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체제에 대해서는 그 어떤 예도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노력의 방향, 변화의 방향이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이 세 가지를 인식하고 나아갈 때 가장 이상적으로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방향을 제시한 것이지, 체제를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슈타이너의 이야기를 깊이 새기면 우리 스스로를 우리 스스로가 활성화, 즉 활동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까 말씀드린 세 가지 이념이 각각 어느 분야에서 생산적으로 작용하고 또 작용하지 않는지조차 여러분이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래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자유롭게 굴러가는 자유경제, 즉 시장경제나 아니면 동쪽에서 있어왔던 계획경제라는 것들이 생산자들에게 적절하게 가격을 지불하는 공정한 가격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이야기로부터 제가 크게 와 닿은 것은, 그래서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우리가 모든 악은 큰 자본을 가진 사람이나 대기업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 싼 티셔츠를 산다면 대기업이 아니라 우리가 그 생산자를 착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안 뒤로는, 예를 들어 세일하거나 떨이로 파는 걸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좋아하지 않게 된 건 아니고 정도가 좀 약해졌습니다. (일동 웃음)
저는 경제에 관한 걸 전공했고, 오랜 세월 발도르프 학교의 행정담당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문제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땅, 이런 것들을 사고팔지요. 칫솔이나 텀블러 같은 것은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생산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의 경우에는 양을 늘린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가치가 창조되는 분야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입니다. 가치 창조의 연결고리가 있는데, 농부가 있고 농부가 생산한 밀을 제분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로 빵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가치 생산의 연결고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빵에 지불해야 하는 올바른 액수라는 것은 빵 만드는 사람, 제분소를 하는 사람, 농부가 모두 어렵지 않게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가격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땅 한 조각이 있어서 “이건 내 거다”라고 한다면 농부는 그 땅을 사용할 권리를 지불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어떤 땅을 사용한다면, 그리고 땅 주인이 권리를 주장해서 돈을 지불한다면 돈은 오가지만 어떤 종류의 가치 창조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된 가치가 나에게 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일단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창조된 가치가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하지 않는데도, 즉 우리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데도 생산된 가치가 우리에게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회사 하나를 통째로 매각할 수 있습니다. 그냥 손가락만 까딱까딱하는 것으로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물건이 아닌데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건전한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육을 통해 능력 있는 경영자나 노동자를 회사에 보내는데, 회사가 그야말로 가치 창조를 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그런 사람을 키워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회사를 인수할 때는 보통 어떻게든 더 싼 물건을 만들어서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회사를 인수하지는 않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회사를 인수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경제시장 안에서 자기의 권력을 높이거나 경쟁자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회에 좀 더 도움이 되거나 건강한 방향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방향의 경제활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문기사 같은 걸 통해서 자산이 어떻게 집중되고 있느냐를 볼 수 있는데요.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그 국가의 자산 얼마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계가 나오는데, 날이 갈수록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건전하고 건강하다고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욕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세 가지, 교육과 경제, 정치 분야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욕구가 우리 안에 있다는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개별자로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게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 이러한 요소들에서 발달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제일 앞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점점 개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저 위에 있는 위대한 인간이 다 해결해줄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개별자로서 모든 것을 주재해 나가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의식이 점점 더 넓고 높은 곳으로 커가기를 희망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질문이 있나요?
- 그러면 사회가 점진적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고 아이들의 신체적 발달도 빨라지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런 상황에서 어른으로서 우리가 아이들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을까요?
= 제 자신이 교육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건 세상이 빠르게 변하지만 아이들의 상상력을 지닌 가슴, 사고하는 머리, 움직이는 사지 이런 것들의 발달에 필요한 적절한 자극, 또는 교육 이런 것들이 우리가 화면에서 아이들이 겪게 되는 어마어마하게 빠른 변화나 발달, 이런 것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발달 속도라는 것이, 아이의 신체와 판타지 능력, 사고 능력 등이 발달하는 것이 우리가 보는 화면들에서 보이는 가상의 발달,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것과 맞아떨어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 점점 개별화되면서 공동체가 파괴되는 현상이 심각해지는데요.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해야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고 가꿀 수 있을까요?
= 무엇보다 우선 아까 들으신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부모들과 여러분의 이야기가 그 안에서 부모들을 설득할 수 있으면, 발도르프 교육이 아이들의 발달에 무엇을 주는지 확신을 줄 수 있다면 그 부모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여러분의 의도를 함께 따라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죠.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학교를 세운 주체들에 의해 설득된 부모들이 있다면 경제적인 문제도 부모들이 해결해 줍니다. 우리 학교에도 컴퓨터가 부족해 어려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모들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개별화되고 파편화되는 현상도 있지만 공통의 이념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으면 사람들은 훨씬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이런 공동체를 원할 것입니다. 독일에서 한동안 친환경적 농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 실천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농가를 샀습니다. 그것을 운영하는 재단을 만들고 그리고는 친환경 농사를 지을 농부를 구했습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 스스로가 건강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농산물을 먹을 뿐 아니라 시장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걸 한 건데 결국 자신들의 요구를 넘어 훨씬 더 넓게 사회에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1970년에 새로운 형태의 은행이 설립되었습니다. 대출과 기부라는 이름의 은행입니다. 돈을 빌린 사람이 이자를 지불하지 않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물도 있어야 하고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기 때문에 그걸 감당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금액을 지불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은행은 돈을 입금하면 이자를 거의 전혀 못 받게 되었습니다. 돈을 빌려도 초저금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출과 기부의 은행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은행의 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매달 일정한 돈을 은행에 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기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한 돈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 지금 말씀하신 대출과 기부 은행은 경제공동체를 말하는 것인가요?
= 결국 경제적 분야이긴 하지만 경제만이 아니라 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목적을 위해서 무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더 넓어졌습니다. 그런 은행이 발도르프 학교도 지원하고 농부도 지원합니다. 사회적 참여와 관련된 그러한 부분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 예를 들어 풍력발전에 자금을 대는 것 등의 결과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활동이기도 하지만 도덕적인 목적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질문이 없으시면 편안한 저녁 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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