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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 교육학을 둘러싼 독일 교육학계의 논쟁 - 강상희 본문

발도르프교육학

발도르프 교육학을 둘러싼 독일 교육학계의 논쟁 - 강상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7. 29. 20:53

* 이 글은 강상희 선생님이 2002년 <한독교육학연구 제7권 제1호>에 개재했던 글로 17년 전에 발표된 논문이지만, 발도르프교육 100주년이 되는 현재에도 유효한 것으로 느껴져 내용의 일부를 올립니다.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 대해서도 살펴보시길요. (약간의 문장 수정이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학을 둘러싼 독일 교육학계의 논쟁

 

강 상 희


들어가는 말


대안적 학교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는 학교 중의 하나는 아마 발도르프학교일 것이다. 발도르프학교 특유의 교육체제와 교육방식의 밑그림을 그린 이는 바로 슈타이너(Rudolf Steiner, 1861-1925)이다. 슈타이너는 독특하고도 광범위한 사상 체계를 인지학(人智學: Anthroposophie)이라는 틀 안에 담아 전개하였다. 발도르프학교는 바로 인지학이라는 확고한 사상 및 이론적 기초 위에서 일반 학교와는 다른 교육 과정을 행하고 있다. 그의 인지학적 교육 사상은 지금까지도 발도르프학교 교육이 나아갈 방향의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인지학에 뿌리를 둔 교육 이론은 발도르프학교 공통의 원리와 방법을 제공해주어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발도르프학교들이 본질적인 동질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슈타이너의 인지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발도르프학교의 교육 이론 전반을 독일 교육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발도르프교육학 또는 인지학적 교육학이라고 칭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부터 발도르프교육학(또는 슈타이너의 인지학)에 관심 있는 이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있다. 발도르프학교 교육을 이상적으로 소개한 방송이 나간 이후 발도르프 관련 책자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좋은 학교 교육의 형태를 발도르프학교의 교육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다. 그런 기대감이 외래 교육이론을 다룰 때 반드시 필요한 거리 두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아무튼 발도르프교육학과의 비판적 대결을 거치려는 노력 없이 무조건 수용하고 환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덧붙이자면 발도르프교육학에 관한 소개서나 참고 문헌으로 인용하는 것들은 예외 없이 모두 발도르프교육계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런데 독일 학계로 시선을 돌려보면 이런 세간의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발도르프교육학은 탄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독일 교육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간 발도르프교육학은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학문적 관심의 뒤안길에서 서클 내에서만 회자되는 조용한 독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발도르프학교의 교육적 실천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면서도 발도르프교육학에 대한 평가에서는 인색한 편이다.

독일에서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교육학, 즉 발도르프교육학은 어김없이 믿음 차원의 적극적인 수용이나 비판적 반대의 두 방향으로 논의된다. 발도르프교육학을 두고 독일 학계와 발도르프교육계 양 진영간에 전선이 형성되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쇼이얼은 발도르프 교육학을 논하게 되면 반드시 어느 한 편에 서 있어야 하는 이런 현실을 가리켜 “편가르기”(Scheuerl, 1993: 295)라 부르기도 한다.

발도르프교육이 내보이는 개혁교육학적인 실천적 공동체 정신, 즉 발달에 따른다는 원칙, 학습의 단계화, 다양한 교육 내용의 제공, 삶의 공동체와 교육적 지도, 교사 및 학부모 집단의 강한 참여 정신 등에 대해서는 독일 교육학계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반면 슈타이너의 인지학을 신비학(Geheimwissenschaft)으로, 그의 인지학적 인간론에 대해서는 사이비 학문 및 비철학적 기초 위에 서 있는 일종의 “합리화된 신비설”로 폄하한다. 더 나아가 발도르프교육 실천의 성격을 “제의로서의 교육”으로 간주하며, 교육 프로그램, 수업 방법 그리고 발도르프학교 생활에 반근대적인 세계관 성격이 내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비난한다. 요컨대 발도르프교육학의 이론과 실천이 현실적 힘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새로운 ‘대안적 범형’으로 보는 교육학자들은 많지 않다.

발도르프학교의 구체적인 교육 행위는 슈타이너가 언급한 말이나 그의 인지학적 이론에 상당한 부분 직접 의존하고 있다. 교육적 실천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면, 그 배경에 깔려 있는 교육학의 이론적 근거들을 문제삼고 따져 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발도르프학교 교육 실천 자체가 ‘화석’처럼 1919년 시작한 바로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수업 및 학교 실제 문제에 있어서 슈타이너가 지시한 바들이 아주 엄격한 형태로 지켜지고 있다면, 발도르프교육학의 인지학적 배경을 보다 상세히 숙지하고 그 배경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런 전제 하에 먼저 그 동안 전개되어 온 발도르프교육학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를 독일에서 간행된 출판물을 중심으로 짧게 살펴보고자 한다.

 

발도르프교육학 논쟁의 전개 양상


발도르프학교, 유치원 및 교사 양성기관들이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지만, 독일 교육학 내에서는 발도르프교육학이 오랫동안 그에 걸맞은 인정을 받지 못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발도르프학교들이 거두고 있는 성과들이 사회적으로 주목받게 되면서, 80년대 들어 발도르프교육학이 교육학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많은 저서들에서 발도르프교육의 이론과 실천이 정신사적으로, 철학-체계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연구되었다. 더불어 발도르프학교의 놀라운 현상을 둘러싼 논의가 발도르프교육자들과 일반 교육학자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발도르프교육학은 비교적 일찍 독일 교육학계에 소개되었다. 카르젠(Fritz Karsen, 1923)은 당시 실험학교(Versuchsschule)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슈타이너의 슈투트가르트 학교 설립의 교육 구상에 관해 외부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 나치 시대에 실험학교의 형태로 살아남으려던 학교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연이어 폐교한 후 발도르프학교는 1945년 이후 일반인의 관심을 새로이 얻기 시작했다.

50년대에 들어와 몇몇 학위논문을 통해서 또한 교육 관련 역사 기술에서도 다시 교육학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빌헬름(Theodor Wilhelm, 1959)은 발도르프학교를 전원 기숙학교들, 근로학교, 예술교육운동, 몬테소리-교육과 예나-플란-학교들과 나란히 개혁교육학 성향의 스펙트럼 속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인지학적 배경을 교육학적 판단의 척도로 삼는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겼다. 플리트너(W. Flitner)와 쿠드리츠키(G. Kudritzki)(1962)의 『독일 개혁 교육학』(Die deutsche Reformpadagogik)에서 발도르프학교는 비슷한 위상으로 서술되었다. 이때 긍정적인 형태 특징으로 꼽고 있는 발도르프교육 내용들은 주지주의 일변도 교육의 거부, 실천, 수공예, 예술 활동의 존중, 에포크 수업(Epochenunterricht), 통합학교 성격, 남녀공학, 교사진의 자치행정 그리고 어린이 각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심의 요구 등이다. 특히 신학자들이 격분했던 소위 종파 문제제기는 거기서 배제되었다. 그것은 일반인이 발도르프학교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상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이후 발도르프교육학 논의는 가시 돋친 날카로운 논쟁으로 발전되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이때 발도르프교육계는 자신들이 오해받고 있다고, 자신들의 성향이 논쟁으로 왜곡되었다고 여긴다. 특히 세 명의 교육학자들, 즉 울리히(Heiner Ullich), 프랑에(Klaus Prange), 그리고 트레믈(Alfred K. Treml)이 발도르프교육계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 이들이다. 울리히는 Neue Sammlung지(1982)에 도전적인 반어적 제목 “슈타이너화된 개혁교육학(Ver-steinerte Reformpädagogik)”이라는 글을 실어 발도르프교육학의 최근의 현실을 문제삼았다. 이에 응하여 발도르프교육계의 헤르츠(G. Herz)는 “접촉의 두려움”에 대하여, 그리고 그에 응하여 푸케(E. Fucke)는 “생생히 살아있는 ‘화석’”(Das sehr lebendige “Fossil”)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프랑에는 저서 『인지학으로의 교육』(Erziehung zur Anthroposophie)을 통하여 발도르프교육계를 격분시켰다. 이 책은 아무리 세계관 학교가 아니라고 단언하지만 발도르프학교는 세계관 학교라는 언급으로 강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참조. 키어쉬(J. Kiersch) 대 프랑에(K. Prange) in: Z. f. Päd. 32[1986], S. 543ff.). 이 책에서 프랑에는 슈타이너의 교육론이 유대인의 카발라(Kabbala), 마니교적 전통, 헤르바르트주의, 신지학 전통, 인도의 힌두교 전통 등을 짜깁기한 것이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트레믈(Alfred K. Treml)은 Zeitschrift fur Entwicklungspädagogik지에 두 편의 논문(“강신술사의 꿈 혹은 정신과학​<Traume eines Geistersehers oder Geisteswissenschaft>”, 3/1987; 그리고 “루돌프-슈타이너-교육학의 은밀한 매력​<Der diskrete Charme der Rudolf-Steiner-Pädagogik>”, 6/1988)을 실음으로써 발도르프교육계로 하여금 날카로운 반박비평을 하도록 자극하였다. 그후 양 진영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어 서로 대립하고 있다.

독일 교육학계에서 나온 연구서들은, 대체로 발도르프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을 문제삼고 발도르프학교의 양적 성장 내지는 발달의 원인을 발도르프교육학의 성격에서 찾지 않는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독일 학계에서는 주로 발도르프교육학이 과학성/학문성을 만족시키느냐는 문제에서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참조. Eickhorst, 1995). 특히 인지학적 세계관에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밀교”, “신비주의”, “영지주의”적 색채를 문제삼는다. 인지학은 신화와 과학의 중간쯤에 있으며 발도르프교육에는 일종의 “신화사랑”(Mythosphilie)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참조. Ullrich, 1984). 이렇듯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교육론이 신비주의 색채를 띠고 있으며 종파적이어서 학문적 검증이 어렵고 따라서 (근대) 이론이나 학문(과학)의 필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독일 교육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1990년과 1991년에 나온 두 권의 책 (Kranich/Ravagli (Hrsg.), 1990; Bohnsack/Kranich(Hrsg.), 1990)과 한 편의 모노그라피(Schneider, 1991)는 그동안 격렬하게 논의되었던 발도르프교육학 논쟁을 다시금 교육학의 시계 안으로 옮겨다 놓았다. 이 책들은 모두 발도르프교육학과 그것의 인지학적 배경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 누구도 어느 한편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발도르프교육계에서 나온 Kranich/Ravagli의 책, 『논의 속의 발도르프 교육학, 교육학적 비판의 분석』 (Waldorfpadagogik in der Diskussion Eine Analyse erziehungswissenschaftlicher Kritik)은 대체로 해명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세 명의 비판자들의 반박에 대하여 인지학적 시각에서 “올바른” 슈타이너-해석을 다시 세우려고 노력한다. 이 반박비평서는 비판하는 이들의 방법 및 학문적인 무능력을 비난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가령 프랑에의 경우, 슈타이너가 철학 및 심리학의 반대입장들(Herbart로부터 Wundt까지 그리고 Freud로부터 Binet까지)과 거친 수많은 대결들을 빠뜨리거나 무시하거나 혹은 그릇 해석하는 등, 자신이 문제 제기한 슈타이너-텍스트를 그저 불충분하게 알고 있을 뿐이며, 또한 당시 학문 이론적인 성향과 기본적으로 다른, 인간의 본질 이해에서의 슈타이너의 인간학적인 출발점을 보지도 않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S. 14f.)고 크라니치는 주장한다. 슈타이너의 정신적인 경험세계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것을 알기 위해 “그저 도서관으로 가서 읽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내어야”(S. 23f.) 한다고 크라니치는 소리 높인다. 요컨대 슈타이너가 남긴 광대한 유고 앞에서 비판자들 모두 슈타이너를 불충분하게 읽었음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크라니치의 말에 깔려 있다.

더 나아가 라바글리(Ravagli)는 한층 신랄하게 트레믈(Treml)을 비난한다(S. 33-59). “상세한 대화 (Dialog en de'tail)”(S. 35)에서 그는 인용문을 계속 대조하며, 트레믈이 “오해의 예술”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한다(S. 33). 슈타이너의 사유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얻는 모든 지식에서, 항상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태도가 문제로 제시되는데, “초감각적 인식의 ... 훈련방법”(S. 49) 등 슈타이너의 가르침들은 현재의 학문적인 논구에서 전혀 진지하게 논급하지 않는다. 발도르프교육학에 공감하는 이들 역시 그것을 기이한 것으로 무시해 버렸다(참조. 가령 Bohnsack/Kranich의 책에 있는 Wagenschein의 발도르프교육학에 대한 판단, S. 421). 한편 근대의 “학문, 에토스”(Wissenschafts, ethos)는 참으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생활세계에 유해한 결과를 많이 파생시켰다고 보는 현재의 지배적인 시각을 빌어, 이런 맥락에서 슈타이너가 지닌 매력 역시 더욱 더 커가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끝에서 라바글리는 먼저 트레믈이 한 유화적인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슈타이너를... 영원한 진리의 계시로... 읽지 않을 때, 상대화되는 것을 긍정하고 그의 광범위한 저작의 풍부함을 발견하고 부정할 수도 있는 거리가 주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슈타이너를 읽어야 한다...!”(S. 59)고 라바글리는 한 마디 덧붙이며 반박 비평을 끝맺는다. 이 비판의 의도 역시 분명하다. 슈타이너 비판자들이 슈타이너를 제대로 읽지 않고 슈타이너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라바글리는 한층 폭넓고 날카롭게 울리히를 반박한다(S. 60-238). 울리히는 이미 “방법상의 오류”를 통해 자신의 “무능력”을 입증하였으며, “더 나아가 인지학의 수용에서 슈타이너 자신이 아니라 인지학의 이차 문헌”을 근거로 하였다는 것이다(S. 77). 이 이차 문헌들 안에 발도르프교육계에서 나온 것들도 있는데, 그 문헌들 역시 라바글리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예를 들어 “‘발도르프교육학이 역사적으로나 외형상으로 볼 때 개혁교육학의 산물’임”을 인정하는(S.61)는 헤르츠(G. Herz)를 그는 반박한다. 그리고 울리히와의 대결에서 “성급하게... 인지학 또는 발도르프교육학의 근본적인 입장들을 포기”해 버린 셈이라며(S. 62) 그는 키어쉬(J. Kiersch)를 비판한다. 더 나아가 키어쉬는 울리히를 “비인지학자로서는 발도르프 교육학에 최고로 정통한 사람”으로 부르기도 한다(S. 68). 울리히가 “인지학의 학문요구에 대해 파괴적인 판단”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그를 “호의적인 비판자”로 여기는 사람은 “슈타이너에 의해 성취된 학문 개념의 확장”(S. 64)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라바글리는 본다.

맺음 장에서 라바글리는 “철학적 인지학”의 과제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다른 사상들과의 대화 및 인지학의 변론”(S. 239ff.). 그에 의하면 “... 대화가 불가능한 곳에서는 변론이 필요하게 된다”(S. 241). 그런데 누가 대화의 불가능성을 설명하며 또 어느 시점에서 그렇게 하는가? 그에 의하면 “인지학의 초감각적 연구결과들”(S. 248)은 다른 인식수준(가령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과학”)에서 얻게 되는 이해를 통해서는 “논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관찰들은 오직 관찰을 통해서만, 감각에 의지하지 않는 관찰들은 감각에 의지하지 않는 다른 관찰을 통해서만 논박될 수 있기 때문이다”(S. 249). 언급한 세 명의 비판자들이 감히 의심하지 못한, 슈타이너가 주장한 “초감각적인 관찰”은 라바
글리에게 있어서는 비판가능성에서 제외되어 있다.

라바글리의 이런 식의 반응은 인지학을 비판하는 논점들을 다루는 발도르프측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인지학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대해서 이들은 예외 없이 적대감에 가까운 입장을 취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슈타이너를 비판하는 이는 충분히 슈타이너의 사유세계에 깊이 파고들고 못했다는 것, 그 때문에 슈타이너를 오해하고 있으며 그러는 한 그 비판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리텔마이어(Rittelmeyer)는, 발도르프교육 비판이 전체적으로 자아 비판력이 없는, 독선적인 이들의 일치 단결된 저항으로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고 보고, 발도르프교육 비판자들에게 방법론적인 대응 방식을 돌아보고 더욱 공평무사한 방식으로 대응할 것을, 그리고 슈타이너 교육학의 윤곽을 조망할 것을 요구한다(Rittelmeyer, 1989: 475). 발도르프 비판자들은 인지학에 관한 이차 문헌에 의지하는 편이며 이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발도르프교육계에서는 반박한다. 결국 누구나 자신의 정신 능력에 따라서 슈타이너의 원전들을 해석한다(Rittelmeyer, 1989: 476)면서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맥락에서 벗어난 비판이라고 비판하며 비판자들에게 슈타이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정신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내비친다.

앞서 살펴본 라바글리나 리텔마이어 등 발도르프교육계의 주장을 따라가면 결국 두 부류만이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슈타이너를 이해하고 추종하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추종할 수 없는 무리이다(Wolfgang Schneider, 1992: 21). 이런 식의 주장은 슈타이너가 주장하는 실체직관을 의식한 사람은 호의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국외자로서 발도르프 교육학에의 접근 통로를 찾는 이는 오히려 위협받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인지학이나 슈타이너 관련 2차 문헌 참고 또는 인용을 문제삼는 발도르프측에 대해 비인지학권은 슈타이너 원문 텍스트나 인지학권에서 나오는 인지학 입문서들은 그 내용이나 요지에 있어서 차별성이 없으며 따라서 2차 문헌들 역시 인지학에 이르는 직접적 통로라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슈타이너의 저작이 방대하며 일목요연하지 않을뿐더러 사용하는 어휘나 개념이 난해한 반면, 인지학권에서 나오는 인지학 입문서들은 슈타이너의 텍스트에 초점을 맞춰 주로 수용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고쳐 말하기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Wolfgang Schneider, 1992: 24). 내용이나 요지에서 원저와 다를 바 없을 뿐더러 더 나아간 내용이라고는 없다는 것이다.

발도르프교육학 논쟁은 거의 예외 없이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요컨대 인지학 비판 세력과 그 비판을 반박하는 발도르프교육계는 “이단 논리를 따르는(häresiologisch) 지평”(Kranich/Ravagli, 1990: 255)에서 서로 움직이고 있다. 비판은 몰이해와 동일시되고 이해는 추종을 의미한다. 자동적으로 신봉자로 이끌지 않는 슈타이너의 이해는 없고 이해의 부족이라는 평결로 귀결되지 않는 비판은 없을 듯하다. 결국 전수 받은 사람들의 닫힌 세계가 성립되며 동의하는 이만 이해할 뿐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Wolfgang Schneider, 1992: 21). 학문적-비판적 논의는 시작부터 막혀 있는 셈이다.

발도르프교육학을 “합리화된 신비설”, “제의로서의 교육”, “살아 있는 화석” 등으로 판정하는 한 교육학 학계에 발도르프교육학과의 학문적인 대화에 대한 관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반대편에 서 있는 발도르프교육자들 역시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교육학과의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발도르프학교가 꾸준히 신설되는 바람에 그 일에 참여한 발도르프교육자들은 서클 내 대화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루돌프 슈타이너라는 개인 및 그의 인지학 학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발도르프교육학의 독단적인 말과 관념성으로 인해 접촉은 서클 내부로 제한되었으며 이에 따라 외부와의 차단이 초래되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그들의 교육학적 인간론의 기초에 대해 일반 교육학계가 행한 비판은 기대할 수 있는 대응 논증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교육적 노력에 대한 적대적인 논박으로 종종 이해되었다. 그럼으로써 교육학 학계에 대한 기존의 차단 경향(Abschottungstendenz)은 오히려 더욱 증폭되었다(Ullrich, 1992: 462)고 볼 수 있다.

발도르프학교와의 개인적 경험으로 인하여 반대편에 서 있는 경우도 눈에 띈다. 가령 매우 가시 돋친 논박을 펼치는 피롯(V. Pierott, 1983)의 경우, 슈타이너의 “혼란시키는 진술들/내용들의 넘실거림”을 비난하며(S. 23) 그 “어설픈 성격들”을 비판한다(S. 25). 피롯은 인지학이 요청하는 자유는 그저 좁은 경계 내에서만 인정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S. 233), 솔직히 그렇다고 고백하지 않는 복면 쓴 종교(S. 236)라는 판단을 내리며 끝맺는다. 루돌프(Ch. Rudolf, 1988)는 인지학을 “광범위한 심리요법(Seelentherapie)”(S. 14), 비현실로의 교육(S. 14), 자칭 개혁교육학 구상들의 독재적-반동적 부분의 은폐(S. 199)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이들의 대결은 철학이나 교육학적인 체계 잡힌 문제제기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단수 수준에 머무르면서 과학적 가치가 낮은 실천적 경험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지학계의 슈타이너 수용방식과 마찬가지로 인지학이나 발도르프교육학과의 진지한 학문적 대결이라 볼 수 없다(Wolfgang Schneider, 1992: 24-25).

양 진영의 팽팽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 시도가 있었다. 레버(Stefan Leber)가 책의 머리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발도르프 교육학자들과 학계 교육학자들 사이에 “완전히 다른 대화 형식들”(Kranich/Ravagli, 1990: 12) 또한 있다. 그 한 예로 본작(Fritz Bohnsack)과 크라니치(Ernst-Michael Kranich)가 발행한 『교육학과 발도르프교육학』(1990)을 들 수 있다. 편집인들은 그 책을 가리켜 “필요한 대화의 시작”이라 불렀다. 1987년부터 10여명의 저명한 발도르프 교육학자들과 발도르프교육학과는 대립 노선에 있는 독일 대학의 교육학자들이 1년에 두 차례의 만남을 가지면서 경험과 생각을 기탄 없이 교환하였다. 만남의 목적은 상이한 두 입장 사이의 ‘가교’의 탐색이었으며,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더 많은 이해를 얻는 한편 또한 건설적인 비판이라는 의미에서 서로-다가감이었다. 상이한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참여자들은 대체로 서로에게서부터 배울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일치하였다. 교육학자들은 악화되고 있는 현재의 학교 위기 앞에서, 분명히 매력적인 대안을 약속하는 발도르프교육학의 기본성향, 그것의 배경 및 실천적 내용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발도르프 교육학자들은 그들 편에서 교육학적인 토론과 보다 밀접한 접촉을 가지려는 분명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책의 대략 20편의 기고에서 나타나는 대화는 3년 남짓 걸쳐 진행되었고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참여자들 중에서 집단 역학적인 과정과 같은 어떤 것이 형성되었으며, 그 과정은 또한 그 밖의 공적인 토론에서 오래 전부터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경우에서도 역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 물론 “양 전선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양 “진영” 안에서도 이해의 차이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점은 “서로 비판적으로 논의”되었다고 발행인은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발도르프교육학에 관한 내용 및 방법상의 접근, 2. 인간학에 관하여, 3. 수업에 관하여, 4. 학교체제에 관하여. 다만 1부와 4부에서만 교육학계 대표들에게 균형 있게 발언권이 주어지고 다른 두 부분은 인지학적 교육학자들의 독무대이다. 또한 집필진을 살펴볼 때, 일반 교육학계 교육학자들은 4명인데 비해 발도르프교육 측은 12명이라는 숫자상의 우위가 대화에 필요한 균형감을 잃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발도르프교육학의 내용 및 방법론적 통로에 대해 묻는 1부는 본작(Fritz Bohnsack)의 “오늘날 학교의 과제들”에 관한 글이 연다. 그는 이를 민주주의 내에서 성숙으로 이끄는 교육이라는 고전적 이념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사회적이고 생태-지구적 문제들에 대한 책임 과제들로 보충한다. 국가, 사회, 자연 그리고 자아(Ich)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끄는 교육의 이러한 “주요 차원”들에서부터 본작은 “교육적인 귀결들”을 추론해내는데, 결국 전부 개혁교육학적인 학교문화의 속편으로 이어진다. 그는 듀이를 빌어 어린이에 기초한 교육의 “회전”(Umdrehung)을, 룸프(Rumpf)와 헨티히(Hentig)를 빌어 학교 내 학습의 생기 부여(Verlebendigung)를, 클라프키(Klafki)를 빌어 개별화하는 학생 평가를 통한 학교 선발의 철폐를 각각 요구한다. 다원성이 “내적으로 붕괴되어 버린” 공립 학교들의 획일적인 관료주의에 반대하여 그는 각기 학교들의 자치권 또는 동지적-결속감을 주는 세계관을 지닌 학교 공동체의 자치권을 앞세운다. “오늘날 삶에 필요한 차이들의 대화 속에서 ... 발도르프학교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 교육받은 비-인지학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 자녀들을 이 학교에 맡기게 하는 것은 발도르프학교의 긍정적인 교육학적 특성들이다.” 이처럼 본작의 학교의 인간화를 위한 참여적 변론은 뜻밖에 발도르프교육학의 찬사로 끝맺는데, 이때 그것의 고유한 목적 설정은, 그리고 부분적으로 분명히 구별되는 “교육학적인 귀결들”은 전혀 논구되지 않았다. 여기서 적어도 본작에 의해 요구되는 교육적 원칙들과 귀결들이 개혁교육학적인 각인을 갖고 있는 다른 학교들에서, 루돌프 슈타이너의 비의적(okkult)-신지학적인 세계관에 기초하지 않고도, 권위 있게 실현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2부에서는 발도르프교육 측의 세 명의 저자가 “인간학”(Zur Anthropologie)을 서술한다. 광범위한 3부(S. 217-332)에서는 6명의 저자들이 발도르프학교의 시각으로부터 “수업”(Zum Unterricht)을 진술한다. 주 테마는 “발도르프 학교에서의 기억력 교육”(O. Oltmann, S. 219ff.), 발도르프 학교에서의 화학수업과 물리수업(P. Buck, S. 242ff.), 생태학 위기와 환경 문제(W. Schad/A. Suchantke, S. 260ff.), “수학 수업을 통한 사회 교육”(E. Schuberth, S. 2ff.) 그리고 슈타이너의 교육학 안에서의 괴테의 영향(W. Schad, S. 303ff.)이며, 공동 편집인인 크라니치가 부록으로 전권에 배치되어 있는 그림들(자유 발도르프 학교 Ulm의 11학년과 12학년 학생들의 작품들)에 붙인 보충 논평을 첨부한 기고가 있다(S. 328ff.).

제 4부에서는 “학교 편제에 관하여”(Zur Schul-Verfassung) 양측 저자들이 기술하고 있다. 수 년 간 발도르프학교와 다른 자유 재단(Trägerschaft) 학교의 법률 고문을 지낸 변호사인 포겔(Johann Peter Vogel)은 논쟁적으로 토의되고 있는 문제, 즉 발도르프학교가 어느 정도까지 “종파 학교”인가에 대해 기술한다. 인지학적 “믿음의 원리(Glaubensätze)”는 수업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대부분의 학부모 역시 인지학적 세계관 공동체의 회원이 아니다. 대부분의 독일 주의 현행 학교법에 따르면, 종파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최저한도로서 대략 학생들의 80%가 종파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므로 발도르프학교는 종파적 성격과 세계관 성격을 지닌 학교의 요구조건에 맞지 않다(S. 344f.)고 그는 결론짓는다.

발도르프교육학 측의 크니베(Georg Kniebe)는 이 책에 대하여 “교육예술”(Erziehungskunst)에서 이미 하나의 “돌파구”를, “최고의 의미에서의 비판적인 대화”를 성취하였다고 진단하고 있다(Kniebe, 1991: 285). 테마의 다양성이란 측면이나 분석의 철저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일반 교육학과 발도르프교육학 간의 대결에서 건설적인 새 국면을 열고 있다는 점을 일반 교육학계에서도 일단 인정하고는 있다(Ullrich, 1992: 477).

그러나 이와 같은 크니베의 판단은 울리히에 의하면 나쁜 증상에도 불구하고 쾌감을 느끼는 거나 다름없다. 교육학적 시각에서 볼 때 그런 판단에 유보 없이 동의할 수는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단 학계 교육학의 4명의 대표자들에 비해 인지학적 학교운동의 저자는 12명이라는 숫자상의 우세가 신경을 거슬리기 때문이다. 동시에 책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볼 때, 엄밀한 의미의 대화는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4명의 학계 교육학자들이 발도르프교육학에 열렬히 호응하고, 파울리히(Paulig)의 경우는 아예 동화되기까지 하는 한편, 베르크(Berg)는 예외이지만 발도르프교육학에 내재해 있는 이질적인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 반면 벅(Buck)과 헤르츠의 시도를 제외하면, 12명의 발도르프교육자들은 여전히 일반 교육학의 성찰과 연구 분야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들어 울리히는 “진정한 학문적 토론”으로의 “돌파구”를 열지는 못했다고 평한다(Ullrich, 1992: 477). 울리히에 따르면 이 책은 교육학과 발도르프교육학 간의 대화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발도르프교육자들과 발도르프학교에 호의적인 교육학자들 중 몇몇 사이에 공유할 길이 가능한지를 탐색하는 대화일 뿐이다. “여권을 가진 대화”(Dialog mit Passierschein) 이후 쌍 방향 안의 “자유로운 여행자 왕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Ullrich, 1992: 478)는 것이 울리히의 이 책에 대한 최종적 평가이다.

울리히의 지적대로 대화라는 것은 그저 다른 편의 사정에 대해 호의를 표하며 맞장구치는 이해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참을 다른 편의 참을 통해 심화되고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기대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다(Ullrich, 1992: 463). 상대편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려 하거나 또 자기를 포기하고 상대에게 끼워 맞추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참다운 대화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에서 교육학자들은 발도르프쪽으로 기울어져 아주 동화된 듯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쨌든 이 책은 울리히의 제목을 빌어 표현하면, 양 전선 간의 경계선을 조금 넘나들게 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슈나이더(Wolfgang Schneider)의 “발도르프 교육학의 인간상”이라는 모노그라피(1991)는 발도르프교육학을 다루는 데 있어서 방향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글이다. 슈나이더의 논지는 일반 교육학과 발도르프교육 양측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발도르프교육학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상은 다른 현세에도 “존재하는” 무한한 존재인 반면 일반 교육학에서는 유한한 인간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인간상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두 갈래의 교육의 길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다. 슈타이너에게 교육은 바로 “사제의” 과제를 안고 있다. 원래의, 열려 있는, 만남과 대담의 교육적 관계가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정당성의 집행으로 이해되는 행위로 대체된다. 슈타이너는 1913년 한 강연에서 “완전히 결정된 진리”를, 아직 그것을 위해 성숙되지 않은 비인지학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경고하였다.

발도르프교육학을 둘러싼 논의들에서 여전히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그간의 논의가, 언급한 책들을 통하여 한 걸음 진전하였는가?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랬는가? 아니면 논의는 휴지 상태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어쩌면 서클 내에서만 맴돌고 있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비인지학권 사람들에게 발도르프학교, 그 학교의 실천 그리고 설립의 맥락에 관한 방향 안내의 지식을 넓혀 주었다. 또한 발도르프교육자들에게 교육학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수용하려는 노력들을 심어 주었다. 양측간의 “필요한 대화”를 열어 정보를 나누는 데는 한 걸음 나간 것 같지만 그러나 핵심 사안의 평가에서 만큼은, 서로 정하고 있는 경계선은 여전히 넘어서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인지학적 배경, 즉 세계관의 결정 및 신념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20년대(가령 F. Karsen 1923) 및 50년대(가령 Th. Wilhelm 1959)의 논증이나 Bohnsack/Kranich의 책(1990)의 논증을 비교해볼 때, 논의는 여전히 서클 내에서만 맴도는 것 같다.

한편 발도르프교육학 및 인지학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남서 독일 방송(SWR)의 정치 프로그램 “Report Mainz”에서 발도르프학교 교육 내용에 인종 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있다는 방송을 보낸 후 다시 불붙게 되었다. 이 보도는 1998년 “자유 발도르프학교에서의 담임교사(Klassenlehrer)의 과제 수행을 위한 문헌 목록”에도 제시되어 있는 인종 차별주의 관련 내용들이 담긴 책을 제시하였다. 슈타이너의 협력자인 윌리(Ernst Uehli)가 쓰고 1936년에 나온 『아틀란티스』(Atlantis)라는 제목의 책이 그것이다. 이 보도로 인해 슈타이너와 그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다시 불붙게 되었다. 더 나아가 발도르프 옹호자와 반대자 사이의 논쟁은 이 보도로 인해 히스테리적 차원에 도달했다고 2000년 7월 19일자 타게스차이퉁(Tageszeitung)지는 보고한다.

이로써 발도르프학교 또는 발도르프교육학이라는 테마를 다루게 되는 사람에게 분명한 것이 다시 확인되었다. 결단을 내리고 어느 한 편에 서라! 이것은 교육의 바른 길을 둘러싼 싸움이다. 발도르프교육 측(발도르프 옹호자)과 발도르프교육 반대측은 화해를 기대할 수 없는 진영을 이루어 서로 맞서고 있다.

발도르프학교 옹호자 입장에서 볼 때 이 학교는 학생들의 눈에서는 행복감이 넘실거리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자연적이고 진정 옳고 경이로운 동화의 세계이다. 반면 발도르프학교를 반대하고 분개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 학교는 종파적이고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비밀 결사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이들의 눈을 가리우고 천편일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악할 악몽의 세계이다(2000, 7, 19일자 die Tageszeitung).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에서의 인종 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논쟁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난다. 사실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어린이를 올바로 교육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교육(Bildung) 문제이다. 발도르프교육 반대측과 마찬가지로 발도르프교육 옹호자는 교육의 왕도를 찾고 있다. 양측은 모두 자신이 올바른 쪽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교육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하다”고 발도르프교육 측은 말한다. “웃기는 소리 말라”고 그 반대측은 응수한다. 공립학교에서는 자본주의 주입 교육이 지배한다고 개혁 교육자로서 발도르프교육 측은 말한다.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인지학 주입 교육이 지배한다고 발도르프교육 반대측은 말한다. 공립학교에서는 획일화되어 있고 체질하여(sieben) 선별당하며, 오직 힘겨루기만이 교육 목적이 되며, 사회적 능력은 완전히 부인된다며 다른 한쪽은 열을 올려 말한다(2000, 7, 19일자 die Tageszeitung).

양 전선 사이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필요한 것은 도야와 교육에서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교육학적 질문이다. 그렇기에 발도르프교육학에 관한 교육학적 토론은 인간은 누구인가에 관한 질문의 기초 위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토론이다. 이런 토론은 차이들을 캐물어야 하며, 그리고 그 점이 이 토론에 기대할 바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 실존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슈타이너를 논할 때 반드시 제기되어야 할 물음이다(참조. Wolfgang Schneider, 1992). 발도르프학교가 세계관 학교인지의 여부에 대한 논의와는 별도로 발도르프교육학의 인간상은 인지학의 인간상과 동일하다. 덧붙이자면 발도르프교육학의 인간상은 슈타이너의 교육 강연과 세미나에서 제시되었으며 발달되었다. 이는 넓게 보면 인지학적 인간학의 입문이다. 인지학과 발도르프교육학에 관한 비판적 연구를 시도할 때 이런 배경을 반드시 깔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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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글

 

분명 그 누구도 발도르프교육이 거두고 있는 성과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과가 슈타이너의 이론적 기초 설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발도르프교육자들이 관념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학교 교육에 쏟아 붓는 엄청난 노력과 에너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Oppolzer, S. 343) ; Salzmannn, S. 337). 발도르프 밖의 시각은, 발도르프교육 실천상의 성공은 참여 정신, 즉 발도르프학교 교사들의 높은 정도의 개인적 헌신 및 직업 윤리의 문제이며 교육적 구상의 폐쇄성과 관계된 것이지 배후에 있는 이론의 정당성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게 지배적이다. 확실히 모든 교사들이 같은 길을 가는 동지들이고 각각의 어린이에게 애정 넘치고 개인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을 하면, 학생들은 많은 갈등과 좌절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는 확실히 학습의 즐거움과 학습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천의 배후에 있는 인지학 이론의 의미를 과소평가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육 행위를 위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틀로서의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발도르프학교 교사들에게 적어도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기초 개념들을 숙지시키고 이렇게 해서 교사들로 하여금 의무감을 갖고 그 개념을 받아 내적으로 습득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큰 공적 및 인간다운 학교를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많은 발도르프교육자들의 노고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웃사이더는 발도르프학교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교육적 전체 분위기를 타당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서 내부에서만 볼 수 있는 면을 어쩌면 결여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사이더는 자기 세계 속에 파묻혀서
비판의 눈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안에서는 놓쳐버린, 밖의 시각에서 제기된 질문이 내적 발전을 위해 유익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발도르프교육계에서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멋있을지라도 고립 속에서는 대화가 싹트지 않는다. 내 세계 밖의 생각이나 입장에 대한 호기심을 보일 때 대화는 준비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외자의 눈으로 볼 때, 물론 슈타이너는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지만, 발도르프교육학은 발도르프교육자 및 발도르프학교 교사들에게는 신앙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결코 확실하지 않은 슈타이너의 언설들이, 그에 관해 슈타이너 역시 때에 따라 자신의 언설들이 “더욱 깊고 넓게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히 일반화되고, 추측에 근거하여 고안된 설명 모델이 타당하고 영원한 진리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지고, 교육 실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귀결들이 도출되고 있다(Salzmann, 1987: 337). 슈타이너의 시대 이후 거의 변화 없이 적용되는 방법과 규정들이 발도르프학교를 지배하고 있다. “인지학의 교의-이론적 이해”는 “부지불식중에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다. 슈타이너의 진술들이, 그것들이 “진리”일지라도, “교조들, 이론적 진리로서, 처방전으로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발도르프교육 측은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타이너의 인지학 또는 그가 했던 말들이 유일한 처방전으로서 발도르프학교에 군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슈타이너가 그렇게 말했다’라는 한 마디 말이 발도르프학교 내 논의를 끝내는 마침표이다.

교육 문제에서는 만병 통치약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교육 문제에 직면하여 발도르프교육학에서 만병 통치약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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