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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학교의 탄생 이야기와 새로운 100년에 대해 - 하르트비히 쉴러 본문

발도르프교육학

발도르프학교의 탄생 이야기와 새로운 100년에 대해 - 하르트비히 쉴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10. 16. 09:34

<발도르프 100주년 특별강연>

발도르프학교의 탄생 이야기와 새로운 100년에 대해

 

 

 

강연 : 하르트비히 쉴러

통역 : 이미영

날짜 : 201981510:00~16:00

장소 : 용산 전쟁기념관

기록 : 아이라움

 

 

 

 

이 특별한 순간, 특별한 장소 

 

한국은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3.1운동)을 맞이했고, 그리고 교육적으로도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100주년(발도르프학교 운동)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기념하는 장소에서 우리가 이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공동으로 평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장소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곳일 수 있겠어요. 자유에 대해,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되어져야 하는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 첫 발도르프학교는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듬해에 문을 열었다.

 

191997일에 첫 번째 발도르프학교가 열렸습니다. 오늘은 815일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죠? 우리가 너무 일찍 축제를 벌이는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한국의 3.1운동도 100주년이 되었다 해서 한날 한시에 그런 운동 -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발도르프학교도 하루가 아니라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창립하는 기간은 5월부터 9월까지 진행이 됩니다. 5월에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세 명의 남자분이 있었습니다. 이 세 명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슈투트가르트 포함)의 교육청으로 갑니다. 한 남자는 루돌프 슈타이너였고, 다른 남자는 에밀 몰트라고 불렸습니다. 세 번째 남자는 칼 슈톡마이어입니다. 이들은 교육청의 교육감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자유 발도르프학교 설립신청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 순간에 우리는 분명하게 하고 싶습니다. 1919519일입니다.

 

 

1918년 가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은 전쟁에서 졌습니다. 독일은 모든 것이 다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혁명도 일어났습니다. 거리에서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사회주의자들에게 총을 쏘고, 그 당시 새 정부가 있었습니다만 새로운 법률이 없었습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에도 교육과 관련된 법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루돌프 슈타이너와 에밀 몰트와 칼 슈톡마이어가 교육청을 찾아가서 우리는 새로운 학교를 만들겠어요라고 신청을 한 것이죠. 교육감이 그건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됩니다.” 라고 했어도 전혀 놀라운 대답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상당히 무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교육감이 학교를 허락해 줄 수 있겠어요. 법이 없는데... 더구나 슈타이너는 더 강한 요구를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특별한 우리만의 교육과정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학교에서 수업해야 하는지를 규정할 어떤 규정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우리는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쩌면 가장 큰 요구사항이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사를 스스로 고를 것입니다.”

 

지금 저는 네 번째 사람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학교설립에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교육감입니다. 베아톨트 하이만이라는 이름입니다. 베아톨트 하이만은 사회주의자였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세 남자가 자유로운 학교를 만들겠다고 왔습니다. 그것에 대한 허락을 사회주의자가 내려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규칙, 법률을 신뢰합니다. 그런데 베아톨트 하이만은 사회민주주의자였습니다. 그 사람은 극단적 좌익이 아니었습니다. 클라라 체트킨, 로자 룩셈부르크가 속해 있는 급진 좌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베아톨트 하이만은 제대로 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층에 따라 분리된 학교를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학교라는 것은 아이들이 모두가(전 학년이) 함께 통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가 된 학교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는 공동체 학교혹은 전 학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베아톨트 하이만은 그런 학교에 대해서 상당히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회주의자로서 공식적으로 이 학교를 인정해줄 수 있는가입니다.

 

왼쪽에서 5번째 인물이 베아톨트 하이만

 

루돌프 슈타이너가 특히 우리의 교사를 우리가 찾겠다는 요구를 했을 때 베아톨트 하이만은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너무 많이 나아간 거 아닌가.’ 갑자기 번개치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이런 자유를 주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상기한 것이 아직 새로운 법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법률 중 사립학교를 위한 법률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어요. 그래서 그 법률을 가져다가 여기에 적용했어요. 이러한 이유로 발도르프학교가 허가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루돌프 슈타이너를 생각하고, 에밀 몰트를 생각하고, 칼 슈톡마이어를 생각한다면 역시 베아톨트 하이만도 거기 속해야 합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의 창립에는 많은 운이 따랐다. 왜냐하면 법률의 구멍 사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새로운 학교령이나 법률이 있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에서 졌다는 것은 불운이었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런 행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전쟁기념관에서 한다는 것이 역설적이라고 저는 느껴집니다. 만약 베아톨트 하이만의 입장이 된다면 분명한 것은, 그런 결정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정당 안에서도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요. 루돌프 슈타이너는 학교가 세워질 때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의 교육과정은 다른 학교의 교육과정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수업방법도 부분적으로는 다를것이다. 그러나 일반학교가 가지고 있는 목표치는 항상 채울 것이다.”

 

그래서 3년마다 교육청에서 장학사를 보내 감독하게 했습니다. 학생들이 얼마나 잘 배웠나, 어떤 것을 배웠나, 심사를 했죠. 장학사는 문서로 보고합니다. 그 문서에 발도르프학교는 더 이상 선동하는 것이 필요 없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심사내용에는 학교에 대한 칭찬이 가득해서 공개하기만 하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 교사가 되어야 하는가였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교사가 되었냐면 국가고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발도르프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헤르타 퀘겔이라는 사람이 그 경우인데요, 그녀는 이혼한 부인이었습니다.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한 명의 아들은 나중에 슈투트가르트 두 번째 발도르프 학교의 창립멤버입니다. 편모이고 두 명의 아이가 있고 게다가 자격증도 없다면 일반학교에서는 채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학교든 발도르프학교에서든 헤르타 퀘겔은 자녀가 둘이니까 학교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술가이자 나무조각가이었습니다. 성공적인 조각가여서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교사자격증을 가진 교사보다 훨씬 더 훌륭한 조각가였고, 생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가지고 보았냐면 이것을 할 수 있는 전문능력이 있는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질적으로 자격이 있는가, 였습니다. 그래서 발도르프학교 교사가 된 사람들은 일반학교 교사보다 기준이 훨씬 더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가 가장 유명한 교사였냐고 질문한다면, 헤르바르트 한, 카롤리네 폰 하이데브란트, 칼 슈톡마이어 이렇게 세 분을 뽑 습니다. 이 세 사람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어서 ‘Dr. 누구라고 불렸습니다. 칼 슈톡마이어는 사범대학의 학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은 오랜 시간동안 슈타이너의 인지학과 작업했기 때문에 통상적인 자기 경력을 쌓는 길로 가지않고 새로운 학교로 왔습니다.

 

19195월에 발도르프학교 창립을 위한 결정적인 일 - 헤르바르트 한은 다른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헤르바르트 한은 원래 창립은 4개월 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슈타이너가 에밀 몰트의 담배공장으로 초대되었습니다. 담배공장 노동자들에게 위대한 슈타이너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담배공장에는 모든 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담배 홀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여기(전쟁기념관 이병형홀)보다 약간 클 것입니다. 그 안은 만들어진 담배로 가득 찬 공간입니다. 그리스로부터 온 담배, 터키로부터 온 담배, 불가리아로부터 온 담배, 미국에서 온 담배로 가득한 공간입니다. 상상해 볼 수 있겠어요? 어떤 냄새로 가득 차 있었을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담배 향으로 가득 차 있고 노동자들은 담배상자 위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에밀 몰트와 슈타이너가 들어옵니다. 에밀 몰트가 슈타이너를 소개합니다.

 

위대한 문화철학자인 슈타이너 박사~”

 

문화철학자라고 소개한 그 순간 분위기는 지하로 푹 꺼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담배공장에서 일하는데 문화철학이라니... 이 상황을 헤르바르트 한이 지켜보았습니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말을 하자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당시 시대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교육환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노동자에게 여러분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배웠는데도 여러분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을 사회공동체의 요구에 의해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미래의 교육이라면 성인이 되기까지 그 사람의 성장을 동행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헤르바르트 한(Herbert Hahn)

 

헤르바르트 한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아주 용감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내적인 고통을 감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노동자들을 수술하는 외과 의사처럼 등장했다라고도 썼습니다. 외과의사가 환자를 살필 때 어디가 부었는지,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어디가 문제인지, 먼저 점검을 합니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노동자들의 교육 상처에 대해 아주 섬세하게 접근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자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미래의 교육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노동자들로부터 따스한 온기의 흐름이 전해졌다고 했습니다. 헤르바르트 한은 바로 그 순간이 발도르프 학교의 창립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에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순간을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경영이사회는 에밀 몰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에밀 몰트씨, 우리가 저런 학교를 만들 수 없을까요?” 그래서 세 남자가 교육청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제는 학교 창립의 축제의 장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191997일입니다. 그때 슈타이너는 발도르프 교육의 세 가지 거대한 모티브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질문을 던집니다.

원래 학교라는 곳은 무엇인가?”

학교 자체의 본래 성격이나 목표에 맞는 학교란 무엇인가?”

교육적인 위임으로서 학교는 무엇인가?”

 

마치 사회적 생산품처럼 젊은이를 사회가 필요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학교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학교, 인간형성의 학교입니다. 인간형성. 단지 정보만을 전달하는 학교가 아닙니다. 인간되기. 사람의 태도를 훈련시키는 단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당연히 학교는 많은 것을 매개합니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 지식이라는 것의 가장 정형화된 형태는 무엇일까요? 학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학문에 대해 부적절한, 완전하지 않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학문을 사전처럼 생각합니다. 사전들은 점점 완벽하게 되어가기는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학문을 위키피디아(wikipedia)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결과를 고착화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가 굳어진 결과만을 매개로 한다면 이것은 아이들에게 특정한 외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학문이라는 것을 대입시험 치고 난 후의 삶을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역시 오류입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삶의 시작부터 있어온 것입니다. 단지 학문의 형태가 아이들을 위한 것과 성인을 위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들이 편한 미래로 학문을 계속 추구해 왔습니다.

 

첫 번째로 아이들이 하는 학문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중력을 이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어떻게 시도하는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균형을 잡기 위해서 어떤 싸움을 벌이는지 보아왔을 것입니다. 그 싸움이 몸을 똑바로 세울 때만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워 있는 상태에서 고개를 조금 들고 주변을 살펴볼 때부터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는지 쉽게 상상하실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잠수할 때 쓰는, 무거운 헬멧 - 30kg쯤 되는 것을 쓰고 침대에 누워서 머리 드는 것을 시도해 보세요. 아이가 조금 머리를 들려고 할 때의 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학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학문이기는 한데 실제 삶과 연결된 학문입니다. 그리고 이 학문은 첫 번째로 이루어낸 이 결과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전 과정에서 계속 변화가 됩니다.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의 학교가 얼마만큼 그것을 하고 있는지... 아이가 어느 지점에 도달했어요. 도달한 지점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움직이고 변화하기 위해서 학교가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이렇듯 학교가 진정으로 아이들을 이해한다면 모든 학교에서 당장 시험을 없앨 것입니다. 오로지 아이들이 도달한 지점에 대해서만 쓰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발전해 갈 수 있는지를 쓸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교육에서 필요한 것은 생생하게 되어가는 학문입니다. 학교가 해야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발전하는 학문입니다. 이 지점에 덧붙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이 있는데 수수께끼 같은 말입니다.

 

이 한 가지만은 전 삶을 통해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라는 개념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저는 며칠 전까지 양평에서 랜드아트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오래된 세계창조의 신화들을 말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창조신화도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특이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창조주 아버지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신이 인간을 만들고자 했으며 만들고 있을 때에 천사들이 주위에 있었습니다. 천사가 묻습니다.

 

이거 대체 뭐지요?”

사람?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주 회의적으로 물어보고 있어요.

대체 쟤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거야? 우리가 있는데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그런데 히브리신화에서는 신이 새끼손가락을 들어서 천사들에게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신은 사람 만들기를 계속 했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천사를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천사들은 다시 물어봅니다.

이거 도대체 뭐예요?”

신은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사람은 만들어졌고, 새로운 세대의 천사가 또 만들어졌습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친절해졌습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러자 천사들을 파라다이스로 데려가 모든 동물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신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동물은 이름이 무엇이냐?”

천사는 몰랐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어요...’

신은 사람을 불렀어요.

이 동물을 뭐라고 하지?”

늑대, , 당나귀, ... 사람은 이름을 정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천사들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람은 저걸 할 수 있구나. 저런 존재구나!”

천사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지을 줄은 몰랐습니다. 인간은 특별한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학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천사는 이런 의미에서 학문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살아가면서 전 생애를 걸쳐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잘났어. 대단해.’ 이렇게 말하기 위한 그런 의미로서 어떤 인간인가,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과제로서... 인간은 특정한 품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질문으로서의 이 과제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한 의식 그리고 스스로가 선택한 과제를 해결하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학문, 계속 확산되고 진전되는 앎, 이런 세상에 대한 의식을 통해 인간으로서 자신의 품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학교의 거대한 과제로서 학문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거대한 문화적 과제는 예술입니다. 예술은 무엇보다 사람이 스스로가 창조할 때 일어납니다. 특히 물질적인 재료의 세계에 특별한 것을 줄 때 그 재료가 특별한 형상을 지닙니다. 인간적인 힘의 작동으로 만들어진 형상, 예술이라는 것은 미라고 말하는, ‘아름답다라고 하는 모든 영역을 포함합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교육학문이라고 하지 않고 교육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이나 새로운 틀로 교육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창조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교육이 무엇을 길러내고자 하는지, 진정으로 슈타이너는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교육예술이라면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것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 과제라는 것이... 아이에게 어떠한 것도 해를 주어서는 안 되고, 외부적으로 아주 신중하게 다가가야 하고 퍼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육자들은 자기 자신이 뒤로 물러서서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겠죠. 동시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 않는 것도 역시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교육예술 없이, 성장시키는 자극 없이 자라게 되면 황폐화되게 됩니다. 아이가 성장하는 나이에 따라 생기는 과제는 달라집니다. 영아는 자기가 태어난 그곳을 알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양이 중요하고, 잠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잠이나 영양을 필요한 대로 채워준다는 것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아이가 부모의 의무로 주어지는 그런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이도 서서히 시기적인 것에 필요한 것을 채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기억합니다. 아이에겐 그것이 자기 존재론적인 싸움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이 아이에게 항상 무언가 하게끔 만들어 아이들이 잠을 잘 수 없다면... 모든 교육의 마지막에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아이들이 들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부모와 아이 사이에 벌어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싸움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건강한 리듬으로 지지해주어야 합니다.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어른들은 그것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아나 유아, 그런 어린아이들이 리듬을 가져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론적인 과제입니다. 교육예술이라는 것은 이렇게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면 모든 나이에 맞는 다른 요구들이 있겠습니다.

 

1학년을 맡은 첫 교사로서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새로운 언어는 우리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언어입니다. 내가 대학에서 배운 학문적인 언어를 쓴다면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1학년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더 이상 유치원에서 쓰는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 특별하게 언어수업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와의 접촉을 통해 저절로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예술이라고 합니다. 191995일에 슈타이너가 이야기했던 살아 있는 학문, 살아 있는 예술은 이러한 것입니다.

 

예술, 가장 섬세하고, 가장 살아 있고, 아주 작은 것까지 돌볼 수 있는 그런 예술이라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서서히 인류는 생태학적인 방향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연에게 과도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점점 의식하게 됩니다. 자연이 스스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점점 결실 맺는 것이 적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후까지도 민감하게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섬세하게 느끼고 있어요. 오늘날 1학년에 들어오는 학령기의 아이들은 제가 교사가 되었을 때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아이들은 훨씬 더 예민해졌습니다. 건강적인 면에서도 이전보다 그렇게 좋지 않아요. 그들은 훨씬 깨어 있습니다. 지적인 능력 면에서는 훨씬 어른스러워요.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교육학적인 열쇠를 도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달라진 아이들의 전제조건을 다루기 위해서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사양성과정에서 이렇게 달라진 아이들을 위해서 적합한 것을 배우고 있나요? 아니면 50년 전에 결론으로 내려졌던 그런 것들을 배우고 있나요? 요즘 아이들은 처음부터 훨씬 스스로가 자기 의식적입니다. 이전보다 수줍음이 많지 않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50년 전의 아이들은 수줍음이 훨씬 더 강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기본의 도덕적인 것을 아이들을 통해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감사하는 마음, 겸손, 외경, 존경, 섬세함, 감사함, 책임감 등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 되어가는 사람, 변화되는 사람을 다루기 위한 교육예술에 필요한 도구라는 것은 항상 변화되고 발전시켜 나가고 찾아야 합니다.

 

세 번째 것이 있습니다. 생생하게 되어가는, 살아 있는 종교입니다. 교육을 위한 세 가지 외침 중에서 종교가 가장 특이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특정한 세계관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슈타이너는 이 문을 닫고 있어요. 발도르프학교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쫓아가는 것, 특정한 생각, 특정한 세계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생생하게 되어가는 종교를 말할 때는 교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삶의 힘에 영향을 주는 정신적인 힘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쪽으로 시야를 넓히는 것, 슈타이너는 이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이전의 사람들은 제단 앞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런 희생하는 것이 올라가 신에게 다가가고, 신이 제물을 바친 사람에게 무언가 주기를 희망했습니다. 슈타이너가 말합니다.

 

새로운 의식을 발전시켜야만 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매일 아이들의 어떤 힘들이 자라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마치 은혜의 흐름이 와서 점점 자라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교사라는 존재는 제단에 제물을 바쳐 이 희생이 점점 올라가는 것처럼 은혜로움을 받는 아이들이 점점 성장 하게끔 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생생하게 되어가는 학문,

생생하게 되어가는 예술,

생생하게 되어가는 종교.

 

교육학적인 근본 힘으로서의 이 세 지점 중 어떠한 것도 특정한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에 관련된 것은 없습니다. 누구라도 교육자로서 교육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아이들과 생활하고자 한다면 이 세 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학교가 창립되던 1919년 당시에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교육적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동시대에 한국에서도 독립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죠. 이러한 전 세계적인 움직임을 개혁교육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작년 가을 한국에서 개혁교육에 대한 흐름을 저는 경험했습니다. 개혁교육학에는 중심 모티브가 있습니다. 모토가 있습니다. 그 모토는 여기 플랜카드에 씌여 있는 자유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모범, 신뢰, 전문 능력에 어울릴 만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토가 100년 정도 됐기 때문에 여기에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모토는 아름답고 의미가 있습니다.

 

독일교육학에서는 예전에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독일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한국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

한국에서는 이렇게 했을 겁니다.

무엇이 좋은 시민으로서 갖춰야 될 자질인가?”

어떤 것이 자기 나라를 지키는가?”

누가 또 무엇이 자유의 수호자인가?”

이런 모든 질문은 하나의 점으로 채워집니다. 100년 전의 독일황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강해지기를 원한다. 총을 잘 쏠 수 있도록, 목표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도록 건강한 눈을 원한다.”

오늘날에는 웃지만 그 당시에는 진심이었습니다. 황제가 말하면 사람들은 !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개혁교육을 했어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교육하고자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개혁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교육하고자 하는지 대답을 해야 하는 거죠. “아이들로부터라고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아이들로부터

아이들에게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육자로서 배워야합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되고자 하는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교육,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교육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교육 그것의 결과가 발도르프 학교입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생생하게 되어지는 학문, 교육예술, 아이들 앞에 서서 외경하는 것, 경외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 학교는 끊임없이 변화됩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한국 발도르프학교가 100년전 독일 발도르프 학교와 동일해야 된다, 그렇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루돌프 슈타이너가 진지하게 말한 중심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세대가 3번 바뀐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어야만 한다. 모든 것은 새롭게 창립되어야 한다.”

 

한 세대는 33년하고 몇 달 더입니다. 지금이 100년 후니까 그 시기가 온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예술로서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기념을 한다면 단지 돌아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무엇이 다가오는 100을 위한 우리의 과제인가. 아이들로부터 교육한다는 것에는 여전히 머무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끊임없이 바뀌어야 하고 삶과 연결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것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고, 하나는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출처 : 발도르프교육예술원 아이라움 http://cafe.daum.net/iraum/WdHt/359]

 

* 강연제목과 일부 단어를 수정하고 윤문한 부분이 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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