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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유치원의 열린 그리고 자유로운 교육 방안 - 볼프강 자스만스하우젠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유아교육

발도르프 유치원의 열린 그리고 자유로운 교육 방안 - 볼프강 자스만스하우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8. 28. 11:19

발도르프 유치원의 열린 그리고 자유로운 교육 방안

Das Konzept der offenen und freien Erziehung im Waldorfkindergarten

 

볼프강 자스만스하우젠 ( Wolfgang Sassmannshausen )

허영록(역) ( Heo Yeong Log )

1997.5.16. 열린유아교육연구 2권1호

 


1. 도입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자유, 개방성, 자치, 자율, 인권 등의 개념이 여느 때보다 아주 많이 사용되는 시대 공간이다. 동시에 이러한 개념의 움직임 안에서 자기 고유의 존재를 위하여 내적으로 경험된 토대를 만들어 내고, 또한 이러한 토대를 위하여 생겨나는 욕구들이 우리의 교육에 생겨나고, 이는 그러한 즉, 위에서 얘기한 인간의 질적 특성들에 관계하여 미성년들의 교육이 어디까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점을 만들어 내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러 가지 많은 교육의 방향들과 교육사조들이 여러 특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아이들의 존엄성과 그들의 조건들을 찾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내적인 비교성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먼저 하나의 주장(These) 세울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교육적인 행위와 구상이 (물론 어떠한 기타 인간의 표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인간 내면상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각기의 교육 구상과 행위를 이해하게끔 하는 근본적인 확언의 토대를 얻기 위한 내면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목하의 주제에 관계하여 발도르프 교육의 시각(관점)에서 보는 인간상의 근본을 설명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학교 입학 전 시기 교육의 구체적인 실마리를 위한 필연성을 표현하게 된다.


2. 발도르프 교육의 인간상

인간은 보통의 감각기관으로써 이해될 수 있는 물리적인 자연과 함께 또한 다른 점에서는 발전과 발달을 시간 안에서 하고 있다.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 끊임없는 합성과 해체는 생명체의 특성으로 나타내어진다. 물질-물리적 세계에서 존재하는 기계적인 원인-영향-관계에 근거하는 변화가 아니라, 유기적인 원리들에 근거하는 것들이, 다시 말해서 자기 스스로로부터 나오는 것들이, 모든 생명체의 독립적인 존재의 특성이다.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러한 특성을 독립적인 육체성/구체성(Leiblichkeit)이라고 칭하고, 물질적-물리적인 것(물질체)과는 다르게, 생명체(Lebensleib, 에테르체)로서 규명하고 있다. 이러한 생명체라는 것에는 인간과 관계해서는 몇 가지 본질적 부분이 있다. 그것은 시간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로서; 예로 습관, 기억력, 버릇, 성격, 기질 등등이다.

또 다른 특성으로는 인간의 표현가능성으로서,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받은 감명을 내적으로 대답하는 부분이다. 여기서는 영혼적으로 (심적으로/감성적으로) 지각하는 것(느끼는 것)과 자각하는 것(Bewusstsein)의 능력을 얘기하고 있다. 정확하게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러한 독립적인 존재성을 고유의 육체성으로서 영혼체(Seelenleib, 아스트랄체)라고 칭하며, 이것은 호감(Sympathie)과 반감(Antipathie)으로부터의 긴장상태 안에서 경험에 대한 대답으로서 접합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최고의 본질적 부분은 인간을 개성적으로 형성한 것이며, 인간을 개성적으로 형성되게 만드는 것이고, 목표를 미래로 형성하게 해 주는 것이며, 인간을 생애(Biographie)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며, 자유의 체험을 기초로 하게 하는 것이며, 그리고 결국은 모든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고, 이로서 마침내 인간을 측정/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부분을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아(Ich) 혹은 만약에 이러한 특수한 인간의 특성을 지니는 것을 칭한다면 자아-체라고 말한다.

이렇게 인간은 아주 상이한 본질 부분들로써 이루어진 것이고 그리고 이로써 조건분야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적인 면에 영향을 주고 이것은 말하자면 활동/행동범위로서 이 안에서 개성이 접합하게 된다. 인간교육은 위에서 얘기한 다른 본질 부분 안으로 자아가 닻을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으로서 단계적으로 더욱 더 개성화되기 위함이다.

하나의 열린 그리고 자유로운 인간 형태는, 인간이 지배(Regie)를 자기 자신 본연의 자아로부터 자신 고유의 본질 부분 안으로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유아기와 아동기(청소년기)는 위에서 얘기한 각각의 본질 부분이 먼저 단계적으로 발달하는 것을 통하여 특징짓게 되는데, 이는 성인으로서 성숙의 특징으로 인간적으로 충만해지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를 들어 에테르체가 모든 인간적 고유의 힘과 함께 먼저 신체적-감각적(Physisch-Sinnliche)인 것에 매달리려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를 우리는 학교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성장이라고 칭하며, 이때는 아이가 자기의 습관, 기질 혹은 기억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갖게 되는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는 예를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한 유치원에 실습교사와 현장 방문하게 됐는데, 이때 학교에 곧 가게 될 만큼 커보이는 아이가 실습교사와 나에게 다가와서는 인사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꼭 감을 수 있고요, 그리고 눈을 감고도 저 아저씨를 볼 수 있어요."(여기서 아저씨는 바로 나를 의미한다).

기억으로부터 그림들을 끌어내는 상상의 활동은 감각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예의 또 다른 예는 기질의 연속성이다: 한 아이가 그 전에는 여러 가지 기질의 우세성을 나타내 보였으나, 일곱 살부터는 한 가지 지배적인 기질을 뚜렷이 나타낸다.

신체적으로도 이러한 에테르체-형성력에 매달리는 것의 끝맺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이가 이제는 학교 가기 전 단계의 후반기에 자신의 모든 신체형성과 그리고 모든 유전된 신체적인 토대를 (첫 번째 형상 변화) 만들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몸의 본체가 아주 단단하게 될 수 있을 때까지, 치아의 법랑질이 만들어지기까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갈이의 시작을 신호로 이때가 바로 에테르체의 탄생 또는 학교에 갈 만큼 성장했음을 확인하는 시점이다.

마치 태아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아직도 엄마 뱃속의 관계(탯줄)에 존속되어 있는 것처럼, 아이의 에테르체도 자기 고유의 발전을 스스로 하기 전까지는 아직도 엄마의 보호에 연결되어 있고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3. 아이를 위한 인간학적 상황의 의미

습관/버릇들을 지배하는 것들과 함께 공생관계 안에서 산다는 결론은 이제까지 설명된 아이의 발전상황은 어린아이가 자기가 사는 주위 안에서 얻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태아가 앞으로 커 나갈 자신의 개성에 따라서 발전하고, 그는 그의 엄마가 아니며, 그럼으로써 아이는 스스로 성장하는 에테르체 안에서 자립적이라는 것, 그러나 그 주위 환경의 삶에 따른 버릇/습관과 함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한 건강하고 힘찬 엄마의 몸(모체) 태아에게 자기 고유의 구성력인 자유와 개방성을 준다. 그래서 아이의 일상적인 주위 환경은 학교 가기 전 시기에 성장하는 아이의 운명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바로 이 나이 때 아이의 개방성과 자유는 교육자(양육자)들의 생활 습관/버릇들이 인간적인 주위 환경으로서 어떠한 질적 특성으로써 주어졌는가에 따라 매우 존속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루돌프 슈타이너는 본보기-모방관계라고 성격짓고 있다. 결국은 어른으로부터 본보기로 보여지는 그 질적 특성이 흉내내고 모방하는 아이의 삶과 성장에 좋은 약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이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깊은 연결(결합;Verbindung)관계이고, 이러한 연결관계는 영혼적으로(심적으로) 경험된 자각의 내면 층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른의 측면에서 볼 때 학습과정에서나 지식에 근거한 계획들을 통하여 형성될 수 있는 영역보다 훨씬 더 깊이 놓여 있다. 아이의 반려자(Partner)는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삶의 성취에 관계한 습관적인 범위 안의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른에 대한 아이의 관계는 나중에 다가오는 삶의 시기보다 훨씬 더 섬세하다. 어떠한 다른 인간적인 관계보다 어른의 상황은 이러한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관계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 인간의 습관들 안에서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형태를, 그러니까 그의 존재의 동기를, 그리고 그의 가장 본연의 모습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터득하려는 자발성(Initiative)을 경험할 수 있다. 무엇인가 그의 삶 안에서 바꾸려고 하고 또 이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시도/의도까지 어른은 스스럼없이 그리고 심도 있게 스스로 그 자신을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영역에서 우리는 가장 뚜렷하게 인간적인 자유의 동기(Motiv) 경험할 수 있다.

유아기의 개방성과 자유는 자기 고유의 습관적인 삶의 성취를 이루는 어른의 자유에 따라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렇게 하는 확실한 교육방법이 아이의 자유를 존중하는 요소로써 될 수 있는데 예로; 유치원의 한 그룹에서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리듬적인 윤무(輪舞), 식탁에서의 기도 혹은 이야기 등으로서 이는 어른의 경직되고 내면화된 습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날 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교육대책이 역시 경직되고 고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이에 따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이는 오직 한 부분의 목표에만 집착되어 프로그램화될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자유와 개방성은 교육적으로 제기되는 가치가 아니라, 교육하는 어른의 어느 특정한 삶의 종류와 인격의 동기(Personlichkeitsmotive)를 표현하는 것이다. 같은 것은 오직 같은 것을 통하여 형성된다. 이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치료 및 교육원리와 같다. 이것은 아주 탁월하게도 유아기의 교육에 유효한 것이다.


4. 유치원 교육을 위한 필연의 결과들(Konsequenzen)

만약 위에서 얘기한 인간학적인 관찰의 의미 안에서 항상 좋은 교육 의도가 유치원의 동기가 될 수 없을 경우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아이에게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직 어른으로부터 마련된 일상적 공간만이 아이에게 자극과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발도르프 유치원 교육의 방법적-교수법적(methodisch-didaktische) 방안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모든 내용이 교환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다른 교육자/교사들이 여러 다른 사회-문화적, 생애적,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 일을 위하여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 인격의 자아로부터 형성된 습관들이 일상의 기초/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전 세계에 있는 약 1400개의 발도르프 유치원이 같은 것이다.

아래에서는 몇 가지 관점들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설명한다.

4.1 공간적인 질서(Ordnung)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 정도 나이의 아이들은 '세상은 질서 안에 있다'라고 믿고 이 세상을 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아이에게는 하나이고,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깊은 것이다. 아이는 자기 스스로와 세상 사이에서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고, 그는 그의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만큼 그 크기 안의 주위 환경과 함께 일치하여 결합된 것으로 체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 배가 아파서 울고 있는 아이를 어른이 그 아이에게 근처에 앉아 있는 새를 보여줌으로써 달랠 수 있는데, 이는 그 아이를 자기도 속해 있는 다른 것과 연결하는 것이다. 자기 주위 환경의 세상으로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빠져 들어가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놀이 안에서 보여지는데, 이 놀이는 아이의 주위 환경에서 쉽게 접하고 손 닿을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지고, 이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놀고, 이것은 상상에 따라 이름 지을 수 있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이러한 놀이를 통한 아이의 행위는 한편으로는 내면에서 나오는 독창적인 창조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위 환경으로부터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느낌/인상/감명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아이는 공간적-감각적인 세상에서는 연속성(지속성)이 지배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깊이 숙고하여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아주 자연스럽게 (즉흥적으로), 예를 들면 유치원에서 한 아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색연필이 놓여 있는 선반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흥분해서 교사에게 오는데, 왜냐하면 오늘은 바로 그곳에 색연필이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다(종종 교사 실습지를 방문했을 때 일어나는 상황이다). 교사는 색연필이 선반 위에 항상 놓여 있는 통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지만, 그 통이 평상시보다 약 80cm떨어진 다른 쪽에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보기에서 보면 자유롭고 개성적인 창조력이 아이 주위의 주어진 질서에 의하여 예속(존속)되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나무들을 가지고 논다. 간단히 잘라지고 다듬어진 나뭇가지들이다. 오랜 시간 그것을 가지고 놀다가 아이들은 다른 놀이를 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놀던 그 장소는 무질서하게 된 상태로 남겨지게 된다. 이곳을 지나치게 되는 다른 아이들은 어지럽게 놓여 있는 이 나무들을 밟게 되고, 한 아이는 나무 하나를 던지려고 한다. 이때 교사는 눈에 띄지 않게 그곳으로 다가가서 널부러진 나무들을 모아 원래 지정되었던 바구니 안에 모두 집어 넣고는 다시 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이들이 오고 이 나무들을 가지고 뭔가 다시 창조적인 놀이를 하게 된다.

아이들은 항상 가득한 것으로부터 길어 내려고 하는 요구를 가지고 있다. 창조적인 것을 행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질서를 잡는 그런 행위는 이러한 나이에 적합하지 않지만, 부분적인 경우로는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의 아이에게 있을 수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른의 과제는 공간적으로 질서감을 유지하기 위한 눈을 일상의 습관 안에서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눈에 띄지 않는 행위로서, 이는 삶의 행위에서 생겨나는 무질서와 꼼꼼함과 모범적인 형식주의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일상적인 것의 친밀하고 깊은 의미를 보여주는데, 이는 말하자면 아이들의 감각적이고 사물적인 세상을 인간화하는 것이다.

유치원에서 실습하는 대학생들은 과제(임무)를 갖게 되는데, 이는 아침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도착하기 전에 유치원 공간에 미리 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서 다시 한 번 아이들의 놀이공간을 살펴보는 것인데 필요에 따라서는 질서 있게 준비를 할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 예를 들면, 인형집 안의 작은 의자와 탁자들을 적당하게 배치하거나, 놀이 가게의 부분들을 다시 정리하고 혹은 나뭇가지, 보자기, 밤송이, 조개껍질 또는 다른 자연적인 재료들의 아이들 놀이감이 들어 있는 바구니 안을 제대로 있는지 등등을 살펴본다.

결과는 모든 대학생들에게 놀라운 것인데: 아이들은 이러한 준비가 없었던 때보다 이렇게 준비되고 가지런한 공간에서는 훨씬 더 깊이 있게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에 사실상 특별히 새로운 것을 하지는 않았고 그저 전날의 마지막의 상황에 적합하도록 가지런히 놓았을 뿐이다.

그러면 물리-물질적 질서의 핵심적인 것은 어른이 물리적인 공간을 아주 깊히 관여하여 그 공간이 그에게 잘 맞고 어울리는 옷과 같은 외피처럼 돼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질서는 삶의 과제에 맞게 그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공간은 아이들에게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안정감을 주게 되는데, 이로써 자발적인 행위를 아이에 맞는 감성적인 영역으로부터 자유롭고 열린 그리고 이에 따라 창의적으로 이 공간 안에서 할 수 있게 된다.

4.2 시간적인 질서 리듬

삶의 과정은 항상 리듬적이다. 이것은 상반되는 몸짓들이 스스로 높은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하루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통하여 충만해지는 사건들로 이루어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은 외부로부터 오는 감명들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감성적인 활동의 힘에 의하여 몰두하는 순간들이 지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의 감명에 의하여 완전히 후퇴함이 지배하는 단계가 위주인 부분들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반복운동/진자운동(Pendelschlag)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며,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며, 결국은 삶의 능력이 없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삶의 과정으로부터의 이러한 양극적인 과정을 위한 건강한 관계는 수치적으로 표시될 수는 있지만, (예로 잠자기와 깨어나기의 관계, 심장박동과 동맥박동 등) 이러한 판단기준은 삶의 어떠한 순간에도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삶의 과정이지, 정확하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박자를 실현하는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삶의 과정은 그외에도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그 과정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하고, 일단 높은 감각(Sinn) 안에서 조화되고 균형 있는 것으로서 다시 나타내려는 것이다. 하루에서 특별히 생겼던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루는 것과 같은 삶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 조화(Harmonie)는 아마도 리듬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다시 생각나고 다시 없어지는 안에서 생겨나고, 아마도 밤잠 동안에 이를 다시 소비하게 된다.

건강한 삶이라는 것은 각각의 영향을 주는 시간의 질들에 대한 법칙을 고려/반영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하나의 확실한 조화를 높은 단위로서 구체화하는 것이다. 귀결(필연;Konsequenz)은 인간이 이러한 조화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서 삶의 안정감과 신뢰감을 스스로 지니고, 그것과 함께 목하의 삶의 과제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어린(젊은) 인간일수록 더욱 중요하다. 아이에게서는 특히 미취학시기에 있는 아이는 시간의 관계에 대해 아직 추상적인 인식이 안 되어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예;어제-오늘-내일 등), 그러나 시간-리듬적인 삶의 감각은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한 유치원에서는 규칙적으로 수요일마다 아침식사를 위하여 빵을 굽고 있었다. 어느 한 수요일에는 빵을 굽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아이의 아버지가 그 아이의 생일인 관계로 사전에 얘기 없이 케잌을 한 쟁반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전 중에 몇몇의 아이들이 교사에게 와서  묻기를, 오늘이 빵 굽는 날이 아니었나요, 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들은 주일 계획을 추상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그들은 습관적으로 시간적인 질서 안에서 살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그들의 행위를 자유롭게 하여 주는 안정감을 발전시키고 있다.

유치원에서 자주 그리고 항상 다시 놀랄 만한 경험은 일 년에 대한 아이들의 익숙해진 안정감이다.

한 교사가 오전 중에 축제나 사육제(謝肉祭)를 위한 장식 만들기를 시작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곁에 있던 다섯 살 두 아이는 이제 장미공주의 성이 다시 만들어질 것이고 이것은 작년에 있었던 것들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들은 즐겁게 작년에 했던 노래들을 조용히 부르고 있다.

체험했던 것들은 아주 깊히 내면화됐고 이것들은 다시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기억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추상적인 질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어났던 일들의 반복으로써 경험된 것들이 리듬적인 연속으로서 다시 기억되는 것이다.

아이는 시간적인 질서의 경험된 질적 특성을 아주 깊이 자신의 삶의 느낌 안으로 그리고 삶의 습관 안으로 내면화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위한 안정감을 연결시켜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서 어른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하루의 경과, 일주일의 경과, 일년의 경과에 대한 관점(Aspekt)을 고려한 시간적인 질서 안으로 형성해 주어야 하는 교육적인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조화된 리듬을 위한 감각(느낌)을 얻는 것을 의미하며, 자기의 고유한 삶의 조직 안에 뿌리를 내리게 하며, 이것은 바로 두 번째 외피를 만들기 위함이다.

4.3 영혼적인(심적인) 질서 기쁨, 감사, 경탄감, 자유

예전에는 교육자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유효한 도덕적인 가치와 기준의 대표자였던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가치는 일반적으로 유효한 성질을 가졌었다; 이는 하나의 중심적인 교육의 임무(과제)로서 개인이나 개성을 넘어서는 질서를 수행하는 것이었고 이 질서 안에서 그 사회의 인간들이 만났다. 이는 평화, 조화 그리고 사회화를 위한 보증이었다.

이러한 결속 있는 가치와 기준의 상실이야말로 이 현대 사회를 특징짓게 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가치에 대해 아주 개인적이고 개성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에 더욱 더 의존되어 있고, 이러한 것을 통하여 그는 자신 고유의 삶 속에서 내적인 방향과 목표 설정을 찾고 있다. 자기 고유의 생애를 만드는 것이 현대인의 중심적인 과제로 되었다.

유치원에서나 학교에서는 가치를 추구하는 교육이 뒷전으로 물러나 있고, 그리고 그 대신에 조기 교육의 나이에 대한 비판적인 논쟁이 지배적인데 이것은 피상적으로 유효하고 일반적으로 유효한 표준의 대변자로서의 위상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준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만약 이러한 것이 교육의 행위 안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은 주입(Indoktrination)과 조작(Manipulation)으로써 평가될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육의 표어는 가치 상실의 교육이 되었다.

비록 일반적으로 유효한 가치가, 그러니까 외부로부터 내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견(주의)이 사라졌다는 것에 일치한다고 해도, 그러나 각각의 인간은 사람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스스로를 위한 주요한 가치를 찾고자 하는 물음점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다. 자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삶의 느낌, 삶의 방법 그리고 세계관은 그에게 중요한 가치 규범의 표현이고, 이것은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꼭 아이에 관계한 교육이 아니더라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학교 취학전 연령의 아이는 완전한/순수한 감각기관(Sinnesorgan)이다, 라고 루돌프 슈타이너가 수차 얘기하는 것은 아이의 세계 경험의 수용에 관련하여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는 감각적인 느낌 안에서 받은 감명을 다시 자기 것으로 뭔가 만드는 내적인 동기를, 인간적인 자세(Gestus)를, 스스로 완전하게 하는 인간적인 가치를 경험한다. 감각적 느낌과 내적으로 형성하려는 동기의 통일된 체험 속에서 아이는 인간적인 만남의 안정감과 아이가 디디고 밟을 수 있는 세계로의 신뢰감을 경험한다.

언제 이러한 양성적인 의미로서의 느낌이 생겨나는가? 이것은 어른이 스스로를 넘어서서 세상 안의 다른 것을 볼 수 있고, 아이에게 기쁨, 존경과 경외로서 설 수 있고, 어른이 고귀한 것에 대한 중요한 열망에 전력을 다하여 사는 것을 아이가 경험할 때 생겨난다.


아이는 인간으로부터 얻어진 이상적인 가치가 현실화된 주위 환경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어른이 자신의 삶에서 실질적으로 얻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적인 이상들이 속해지며 나아가서는 예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나타나는 높은 것(고귀한 것)에 대한 경외들이 바로 그러한 주위 환경일 수 있다. 모든 이러한 질적 특성의 기본토대는 자기 고유의 운명에 대한 정체성(Identitat)의 느낌이 기초로 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는 전체 삶의 상황에 대한 감사의 근본적인 자세이며, 이러한 상황 안에는 어른이 서 있다.

어른이 어떠한 구체적인 높은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가는 그렇게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개성적-개인적인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행하는 사실은 아이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른의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를 통하여 아이를 조작하고 확정하려고 한다는 이론(異論)은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터득된 가치가 다른 것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하나의 유효한 표준 안으로 끌어들여 맞추려고 하는 의도가 먼저 생겨났다면, 이것은 아이의 개성에 대해 자유롭지 않은 인상이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어떠한 한 형태의 가르침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의 기본적인 자세(Grundstimmung)로부터 나오는 스스로 명백한 삶의 형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어느 한 유치원에서는 세계2차대전 때에 굶주림과 위기를 많이 경험한 한 여교사가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생활식품 빵에 대한 그녀의 주의는 특별한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아침식사를 위하여 빵을 만드는 일은 이 그룹에서는 매우 각별한 일이었다. 모든 아이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빵 만드는 일에 참여하여 빵 만드는 과정과 그 후의 소중함들을 직접 경험하여 생활화하고 있었다. 이 그룹을 어느 날 내가 방문하였을 때 이러한 빵 만드는 일의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아마 그들의 빵 만드는 일 과정에 맞지 않게 하였을 때, 한 네 살짜리의 아이가 조용히 그리고 꾸지람 없이 나에게 얘기했다: "여기서는 선생님이 하는 것하고는 다르게 해요. 이러한 것을 선생님은 배워야 해요."

발도르프 유치원의 실질적인 일로서 또 다른 보기는 계절탁자다. 이 탁자 위에는 그때그때 다가오는 자연적인 분위기에 따라 예술적으로 멋지게 가꾸어진 자연적인 요소들과 그때의 계절과 관계된 문화적인 산물로써 장식이 되어 있어 분위기를 더욱 고조하게 된다.

아이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특별히 주의를 주어 유도하지 않았어도, 이 공간의 구석을(계절탁자가 있는 곳) 그들의 부산한 놀이 가운데서도 보호하며, 이것을 그들의 주위에서 보존하며,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를 하는 것을 확인하듯이 항상 관찰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어른들이 어떠한 구체적인 가치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어른이 그러한 가치로부터 하루의 일들을 하나의 높은 관계 안으로 접속해 나가고, 그럼으로써 내적인 동기에 따라서 실질적으로 살아나가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매우 주요한 요소인 것으로서 이는 아이를 인간적으로 꾸려나가는 세계 안에서 안전하고 자유롭게 느끼게 한다.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행위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다. 이는 주입하고 조작되어졌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기서 한국에는 예로 유럽이나 아프리카와는 아주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아주 개성적인 요점이 나타나는 것은 아주 명백해진다.

 


5. 결론

아이 스스로가 자유롭고 열려 있고 개성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며 고유의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기 위하여는 아이는 만들어진 주위 환경에 의존해 있다. 교육은 어른이나 그 누구가 아이에게나 그 누구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허용하는 그런 직접적인 과정이 아니고, 관계가 잘 맞을 때 동반자적인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관계가 잘 맞는다는 것은 책임이 있는 어른이 스스로 연결된 외피를 잘 발전시키는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한 보호된 발달 공간이 아이를 위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외피의 형성은 어른 스스로가 그것과 함께 행동하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가 물질-물리적, 시간적 그리고 영혼적인(감성적인) 세계에 대한 관계 안에서 주도적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의 지위를 존경하는 현대교육의 표어는 이에 따라서 교사의 자기교육이다.

한 유치원은 교사가 자기 스스로의 행동에 따라서의 공간을 여는 규모 안에서 열려 있고, 이것과 함께 아이의 발달 수준에 상응하는 사회적인 자궁을 만들고, 이 안에서 아이는 자신의 개성을 다 끌어낼 수 있으며, 그리고 동시에 개성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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