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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왜 잘못이 바로 잡히지 않을까? - 김문영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왜 잘못이 바로 잡히지 않을까? - 김문영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10. 1. 11:31

왜 잘못이 바로 잡히지 않을까?

 

 


글 김문영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가정과 학교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걸쳐 크고 작은 범죄가 들끓고 있습니다. 근래 들어 우리 사회 정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언제 어디서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아무나 믿을 수 없고, 마음 편히 다닐 수 없는 지경입니다.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이 강력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더 복잡해진 사회구조 때문일까요?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있는 걸까요?

최근 처벌을 통해 원상회복과 보상 문제를 처리하는 응보적 정의를 넘어서 ‘관계 회복 중심의 회복적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화두입니다. 가해자 중심의 처벌과 교정 프로그램만으로는 잘못을 바로잡고 복잡하게 얽힌 구조적인 사회악, 폐단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지탱하는 기본가치이자 자산인 사회적 신뢰 관계가 심각하게 손상되어서입니다. 그 파란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강타하고 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역력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부산가정법원 천종호 부장판사는 한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회복적 정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15세의 소년이 몇 건의 절도 비행을 저질러 재판을 받았다. 비행전력은 많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서 멈추지 않으면 더 나빠질 것 같기에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피해를 변상하고 용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소년은 보호자와 함께 그대로 이행하고 그 증거로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 가운데 ‘절도 피해를 본 후 다시 피해를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집을 비우기가 겁이 났고, 밤에 잠을 잘 때도 너무 불안해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그런데 피해보상을 위해 찾아온 범인이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마음이 놓인다’라고 기재된 탄원서가 눈에 띄었다. (중략) 사법정의가 가해자에 대한 응보에 만 머무르면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시정적 정의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피해자들의 회복이 오히려 더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 착안해 최근 사법영역에서는 회복적 정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앞서 언급한 사례에서 비행소년으로 하여금 피해자를 찾아가 피해를 변상하고 용서를 빌고 오라는 것도 회복적 정의 측면에서 보면 그 의의가 크다. (중략) 응보와 회복은 정의 실현에 있어 바늘과 실이 되어야 한다. 응보에만 치중하지 않고 응보를 하기 전후에 사회적 관계의 회복까지 도모하는 회복적 정의가 우리 사회 전반에 정착되어 가기를 소망한다.


<출처_국제신문 오피니언 2016.09.25.>



우리 사회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처신하는 중립을 완전하게 유지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과 중립’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땅에 실현하기를 갈망하는 정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치열하게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요?


회복적 정의에 대한 논의와 가능성은 아직 더 가야할 길이 남아있고, 열려있는 정의의 패러다임입니다. 우리는 회복적 정의가 무엇이고, 그 지향점이 무엇인지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 <월간 아버지> 2017년 3월호 http://www.father.or.kr/board/read.action?id=zine&pageNum=2&sm=060300&p_del_chk=N&no=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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