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갈등을 이해하는 일이 삶을 사랑하는 일이다 본문
갈등을 이해하는 일이 삶을 사랑하는 일이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실 대단한 행복이 아닐 것이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불행하지 않게 사는 것? 괴롭거나 두려운 일에 휘말리지 않고 일상의 평온을 유지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누구나 꿈꾸는 행복의 모습이 아닐까?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인격적으로 성장한다거나 살림살이가 이전보다 나아지는 것도 꿈꿀 수 있겠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이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자라는 것일 테고.
우리의 삶은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를 실현하고 성취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욕구의 추구’이다. 우리는 누구나 욕구를 갖고 산다. 어떤 사람은 그 욕구가 매우 강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욕구가 있는 듯 없는 듯 약할 수도 있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일 텐데, 아이들 역시 그렇다. 욕구가 아예 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속세를 초월한 성인이거나 무기력증에 빠진 병자일 것이다(대체로 후자일 것이다). 욕구가 있음에도 없는 것처럼, 또는 당연한 섭리인 것마냥 말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보통 이럴 때 갈등이 많이 생긴다. 갈등은 욕구와 욕구가 부딪힐 때 벌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욕구를 가진 우리 인간이 갈등 없길 바라는 건 사실 말이 안 된다.
갈등에는 내적 갈등도 있다. 우리 내면에는 여러 욕구가 다양한 층위에서 올라오기 마련이다. 아이들 같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잘 보고 싶기도 하지만 당장은 게임을 하고 싶기도 하다.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여유 있게 등교를 준비하고 싶기도 하지만 10분만 더 자고 싶기도 하다. 이런 식이다. 동쪽으로도 가고 싶고 서쪽으로도 가고 싶은 이 마음을 우리는 ‘욕심’이라고 부른다. 욕구는 여럿일 수 있지만 현실은 하나이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하는데, 무엇 하나 내려놓기 어려우니 갈등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갈등이 벌어지면 무엇보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까닭에 누구도 갈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이라면 감정을 감출 수도 있고, 마음을 억누를 수도 있으니 갈등 자체를 만들지 않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런 통제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하나, 많아 봐야 둘 또는 셋 정도의 형제자매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갈등 경험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아 어떻게 갈등을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이가 늘었다. 누구도 손해보려 하지 않는 세태의 영향도 크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갈등을 이해하고 예방하며 잘 해결하는 일이 교육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띠게 되었다. 이제는 교과수업만큼이나 관계형성이 학교교육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사람이 동물과 다른 건 생각을 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물도 사람처럼 욕구가 있으니 갈등이 벌어지곤 한다. 그때 동물들은 대체로 힘을 과시하고 몸으로 부딪치기 일쑤다. 물론 사람도 마찬가지 모습이긴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다. 대화를 통해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일에 익숙한가? 동양,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감정과 욕구는 고사하고 자기 생각도 명료하게 언어화하는 훈련이 잘 안 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니 작은 갈등이 금세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극단화되는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거나 예방하려면 일단 우리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 마음을 잘 표현하고 듣는 훈련이 생활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사고와 감정, 의지로 이루어졌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생각, 느낌, 욕구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내적으로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따져보고, 감정에 사로잡히며,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욕구를 갖고 있다. 이 욕구가 가장 심층적인 마음의 작용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고 되고 싶고 갖고 싶은 마음이 욕구이며, 욕구가 강하게 드러날 때 의지도 강해진다. 그렇다면 갈등이 벌어졌을 때 무엇부터 살펴야 할까? 그 순서는 약간 달라져도 좋지만, 일단 감정(느낌) 또는 기분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감정을 알아주는 것이 곧 공감이다. 1. “지금 기분이 어때? 화가 났니? 속상하고 답답하니? 짜증이 나?” 어린아이라면 가만히 안아주고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것도 좋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인지를 묻는다. 2. “무슨 일이야? 네 입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있는 그대로 편하게 말해 봐.” 상황을 정확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파악할수록 좋다. 판단이나 평가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상황을 떠올리는 작업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사자 아이들의 이야기들, 부족하다면 주변 아이들의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서 명료하게 정리해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아, 그런(구체적으로 재구성해서 표현해주면 더 좋다) 일이 있어서 그렇게 속상했구나.” 다음으로 바라는 걸 묻는다. 3. “네가 바라는 건 뭐야? 쟤한테 바라는 거 말고 네가 정말 바라는 게 무엇인지 말해 볼래?” 감정의 원인은 의외로 상대방의 자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구에 있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본래 욕구가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았을 때 떠오르는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만약 “쟤가 전학가는 거요”라거나 “죽었으면 좋겠어요”라는 표현을 한다면, 그 마음은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되 좀 더 물어 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 네가 정말 바라는 건 뭘까? 교실에서 어떻게 지내고 싶니? 친구들이랑 어떻게 지내고 싶어? 네 기분이 더 편해지려면 무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앞의 표현이 삶은 달걀의 딱딱한 껍데기와 같은 입장이라면, 뒤의 질문에 따른 대답은 흰자위처럼 부드럽고 연한 실익 또는 진정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딱딱한 입장의 껍데기를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 마음과 마음이 만날 수 있다. 다만 피해자가 명확한 폭력적 사건의 경우에는 상황 파악과 함께 어떻게 사과받고 싶은지, 재발방지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관계설정), 그리고 구체적으로 원하는 보상은 무엇인지 짚어야 한다. 그래야 일을 제대로 매듭지을 수 있다.
교실에 갈등이 넘쳐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시대가 예민해서인지, 조금도 손해볼 수 없다는 사회풍조 때문인지 작은 일도 쉽게 학교폭력으로 규정되는 듯하다. 금세 감정이 심각해지고 학폭위가 열리고 고소 고발이 난무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강인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강인하면서도 평온한 마음 없이는, 지금까지 말한 해결방법이 다 무소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실에서 교사는, 또 가정에서 부모는 스스로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따로 조용한 시간을 내어 묻는 것이다. 1. “지금 내 마음(감정, 기분)이 어떻지?” 2. “이 생각을 계속 하는 게 어떤 도움이 될까?” 3. “내가 정말 바라는 게 뭘까?”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벌이냐 회복이냐 - 회복적 사법에 대하여 (조균석) (0) | 2019.10.01 |
---|---|
왜 잘못이 바로 잡히지 않을까? - 김문영 (0) | 2019.10.01 |
'사랑의 매'가 효과 없는 이유 (동아사이언스) (0) | 2019.08.15 |
의사소통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 - 박수선 (0) | 2019.07.24 |
반감 없이 아이와 대화하기 (0) | 2019.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