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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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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반감 없이 아이와 대화하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7. 8. 16:39

반감 없이 아이와 대화하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사람들은 교사가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일 뿐, 정작 그 교사가 한 인간이자 교사로서 어떤 사람인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모른다.”

 

만약 다른 이들이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더 정확히는 아직 나의 내적 지배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오직 나 자신의 선택에 따라 외부 세계로부터 나에게 다가오는 감각 인상을 받아들이는 내적 능력을 발달시켜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인지학의 수행자가 될 수 있다.”

 

 

위 두 이야기는 제가 늘 마음에 새기는 슈타이너의 말입니다.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가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중요하겠지만 그 행동도 얼마든지 꾸밀 수 있으니까요. 발도르프학교의 8년 담임제가 놀라운 것은 그 기간 동안 완벽한 교사가 줄기차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부족한 교사가 8년 동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함께 성장한다는 게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 기질의 아이를 만나기도 하고 온갖 사건 사고를 겪으며 날마다 수업을 하는 교사의 모습은 사실 부모와 유사합니다. 부모 역시 아이와 기질이 안 맞을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부모는 아이를 바꾸지 않고(!) 스스로 성장하며 아이를 돌봅니다. 그러려면 아이의 기질뿐 아니라 부모 자신의 기질을 파악해야 하고, 미숙한 기질에서 성숙한 기질로 성장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자기에게 부족한 기질을 계발하여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네 가지 기질이 잘 계발된 사람은 어떤 상황이 되어도 걸림 없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몹시 어려울 것입니다.

 

 

마음에서 반감과 호감의 관계

 

저는 한동안 어떤 갈등을 겪으며 반감이 강해져서 내적 평안을 잃었다가 얼마 전 회복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호감과 반감의 작용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반감은 우리를 깨어나게 하지만 지나치면 마음을 거칠게 합니다. 반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보통 내가 옳다는 한 생각입니다. 이때 내가 싫은 건 틀린 것입니다. 내가 옳으니 상대방은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과는 상관없이 반감이 강할 때 그런 마음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갈등 관계에 놓인 사람들은 서로 비슷해지게 됩니다.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등은 금세 고조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일단 멈추는 게 좋습니다. 옛말에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지요. (갈등의 1단계는 경직 또는 긴장이고 2단계는 논쟁, 즉 말싸움입니다. 3단계부터 말보다 행동이 나오며 갈등은 기정사실화됩니다. 4단계에 가면 약간 위험해지는데 상대를 이미지화하고 패거리를 형성해 집단 싸움을 도모하려 듭니다. 5단계에서는 공공연히 상대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6단계에서는 위협을 하거나 협박을 합니다. 7단계부터는 폭력적 행위가 나옵니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호감을 가질 때 우리의 마음은 살짝 들뜹니다. 이럴 때 분석적 사고는 불가능합니다. 상대가 그저 좋고 무조건 편을 들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좋으면 다 옳다고 여깁니다. 객관적으로 따져보기보다 주관적으로 좋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하면 맹신으로 갑니다.) 부모나 교사로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이런 호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아이들은 대체로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을 퍼부어 주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감싸기만 하면 아이의 인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이일수록 약간 무심하게, 너무 완벽하게 잘해 주려고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말을 안 듣거나 말썽을 부리면 반감이 나오겠지요. 그럴 때 체벌을 하면서 사랑의 매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저 화가 났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때리는 것입니다. 만약 교사가 자기 반 아이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생활한다면 교사를 그만 두거나 스스로 바뀌거나 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욕구를 언어로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기의 욕구 불만을 비언어적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발달단계와 기질적 특성을 잘 관찰하여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잘 제공해 주고 있다면 아이들은 훈계하지 않아도 잘 클 것입니다.

 

반감은 밀어내는 힘인 동시에 미워하는 감정이 될 수 있습니다. 강렬한 반감을 통해 우리는 대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예리하게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균형을 잃으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기 쉽습니다. (호감과 반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보통은 안 좋은 점을 찾기 위해 집요해집니다. 반감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지만 반감이 강해지면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압도하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서 분노와 혐오 같은 부정적 감정이 마음을 채워버리기도 합니다. 대화를 할 때도 자기 주장을 하거나 설득을 하려 할 때는 반감이 우세해집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깨어납니다. 그러나 이내 상대방 역시 압도당하는 느낌 속에서 반감이 생기고 의식이 깨어나는데, 반대쪽에서는 의식적으로 잠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가 이어집니다. 100분 토론 같은 데에서 정치인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다들 깨어 있기만 합니다. 그래서 듣지를 않습니다. 상대방의 말에서 꼬투리나 잡으려 하고 논점을 이탈해 어떻게든 공격해 승기를 잡으려고 할 뿐입니다. 잘 들으려면 의식적으로 잠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비우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정신 문제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오늘날 호감보다 반감이 강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인류가 지성혼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점점 더 물질화되고 개인주의화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인류 차원에서 깊이 육화된다는 말인데, 미운 네 살 또는 사춘기 때처럼 자의식이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보다 개인인 자기 자신이 중요해지면서 기존의 도덕 의식이 약화되고, 아무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가 만연해진 모습을 반감의 강화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어른들도 대부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지요.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관철하는 것은 좋아하지만요. 그래서 학교 교육에서 듣기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서클을 만들어서 둥글게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게 의미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반감을 다스리는 것은 저에게도 중요한 과제인데요, 개인적으로 제가 연구하는 분야 중 하나가 과학철학입니다. 요근래 기승을 부리는 가짜뉴스와 유사과학, 반지성주의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면 울화가 치밀곤 합니다. 뉴스를 보는 게 힘이 들기도 합니다. 온갖 범죄 문제도 있지만 우익정당과 그 추종자들이 생산해내는 가짜뉴스의 공해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수언론이 합세해 우리의 정신생활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팟캐스트의 시대도 가고 유튜브의 시대가 왔지요. 예전 같으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극단주의자들의 정신 나간 헛소리들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돈벌이 수단이 되어 있습니다. 자극적일수록 광고 수입이 늘어납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고방식은 유사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확산됩니다. 아무런 실험이나 검증 과정 없이 그럴 듯한 개똥철학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이 역시 이윤 추구, 즉 자본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막강한 자본을 바탕으로 유수의 과학자들마저 참여하는 유사과학 컨퍼런스가 지난 정권에서는 정부 지원으로 개최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반감이 차오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신생활은 생각보다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게 사회학자들의 판단입니다. 적폐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잔인한 권력형 범죄뿐 아니라 청소년들이 벌이는 폭력행위 역시 오염된 정신생활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인류의 역사가 대체로 허위의식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21세기 들어서 전세계적으로 탈진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평가를 많이 듣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극우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학문적으로는 상대주의가 판 칩니다. 일베나 워마드 같이 혐오를 조장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활개를 칩니다. 여기에는 경제적 요인 역시 크게 작용할 텐데 자본주의가 더 이상 신자유주의조차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시스템 붕괴의 위기에 다다랐다는 관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인종주의, 여성 및 난민·성소수자 혐오 같은 반지성주의 단계입니다. 흔히 사회가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지요. 뭔가 미워할 대상을 찾습니다. 우익 정치인들이 여기에 편승하고요. 파시즘의 토양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후 변화는 체감할 정도로 심각해졌고,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피로하고 예민하며 불안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을 한 마디로 짚는다면 그 키워드는 이기주의가 될 것입니다. 사회가 너무나 병들어 여기저기에서 파열음이 들려왔습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나 우리나라 세월호 참사는 그 징후였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교육은 그동안 우민화를 통해 대중의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게 막아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 목표가 '빨리 출세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라'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알았습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감의 힘이 필요합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하신 말씀, “아무것도 못하겠으면 벽을 보고 욕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반감은 공감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지만 내적 평화 없이 세상의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 세상을 바꾸었지만 분노로 가득 찬 세상을 꿈꾸었던 건 아닙니다. 물론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반감이 필요합니다. 그저 좋게 좋게, 호감으로 접근해서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쯤 되면 알아서 개혁하겠지, 하고 마음을 놓았다가 뒤통수를 맞은 사례가 많습니다. 국민 여론이 잠잠해지면 다시 군림하려 드는 그들의 속성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대중의 의식이 굉장히 높아져서 적당히 해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가 그들에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정치적 실천은 우리의 일상 영역까지 와야 합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권력적 우위에 서고 싶은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인은 흑인에 대해, 부자는 빈자에 대해, 원주민은 이주민에 대해(예전 아메리카의 경우는 다르지만요), 남성은 여성에 대해, 어른은 아이에 대해 억압하고 도덕적 편견을 심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감의 대화

 

인간의 지성혼은 늘 감각혼과 의식혼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합니다. 영혼 영역의 세 단계는 그러나 도식적인 관계는 아니어서 어떨 때 우리는 감각혼 수준에 떨어지고 어떨 때는 의식혼 수준에서 상황을 바라보며 이해하려 합니다. 건강하게 생각하 살아가려면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의 마음 상태를 늘상 알아차릴 때 나의 내적 지배자는 가 됩니다. 이와 달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감정과 욕구에 휩쓸릴 때 우리의 내적 지배자는 내가 될 수 없습니다. 특히 반감에 집착할 때 가장 낮은 단계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정말 화가 나서 화를 내는 것과 화를 낼 필요가 있기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한 채로) 화를 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감정에 사로잡혀 혼내는 것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혼내는 것을 귀신처럼 압니다. 전자의 경우 아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화가 났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정이 식기를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감정과 욕구가 올라올 때 알아차리고 끄달려가지 않으려면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대화에서 공감이란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입니다. 나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는 게 자기 공감이라면 타인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것이 공감적 대화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힘겨워할 때 위로를 한답시고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건네곤 합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화만 돋구는 말을 더 많이 합니다.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하거나 한술 더 떠 다그치거나 가르치려 드는 것은 공감으로 연결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최선을 다했어.” 이런 식으로 무작정 위로하는 것도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참 안 됐다. 어쩌면 좋니.” 하고 동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폭력 대화법을 만든 마셜 로젠버그는 힘들어 하는 사람이 하소연할 때 다른 이야기를 꺼내거나 말을 끊고 따져 묻거나 바로잡으려 드는 행위가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알려 줍니다. 그가 예로 든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교의 한 랍비는 자신의 아들이 죽어갈 때 사람들이 위로로 해 준 말들이 듣기에 몹시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동안 자신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식으로 위로의 말을 해 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욕구가 있고, 욕구가 있기에 갈등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갈등은 욕구와 욕구가 부딪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욕구가 있는 한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큰 갈등이 되지 않도록 작은 갈등일 때 드러내는 게 좋고, 이왕이면 대화의 방식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게 좋겠지요. 많은 분이 욕구가 전혀 없는 아이보다 차라리 욕구가 강한 아이를 대하는 게 낫다고들 하십니다. 욕구가 강한 아이는 갈등도 많이 일으키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해서 대화하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그렇다고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욕구가 없어 보이는 아이는 무기력하게 느껴지고 스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마음을 알아 주기 참 어렵습니다. 이 부분은 기질 파악을 해 보면 도움을 얻을 수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아이의 욕구와 감정을 읽어 주는 것입니다. 감정의 뿌리인 욕구에 집중하다 보면 공감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동생을 때려?”라고 말하기보다 동생이 허락 없이 네 물건을 가져가서 화가 났니? 허락받지 않고 네 물건을 가져가는 게 싫은 거야? 그래서 동생을 때렸어?”라고 말하는 게 공감입니다. “엄마, 아빠랑 더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실망했니?” 또는 친구들이 이름을 불러 주길 바랬는데 별명을 불러서 속상한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게 넌 왜 맨날 떼를 써?”라거나 별명 좀 들었다고 그렇게 우니?”라는 말보다 위로가 될 것입니다.

 

공감은 반감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생겨납니다. 반감이 강한 사람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비난할 것입니다. 판단하거나 평가하려는 반감을 내려놓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 나아가 자기 자신과 상대방의 감정과 욕구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하려는 자세는 갈등으로 경직된 마음을 풀고 그 자리에 사랑과 연민이 자라나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 의미를 찾으려 하고 존재 가치를 존중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그렇습니다.

 

악(惡)은 적을 필요로 하지만 선(善)은 벗을 필요로 합니다. (악의 반대는 또 다른 악이며, 선이란 양극단의 악을 벗어난 균형 또는 건강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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