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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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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회복적 정의와 직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5. 19. 16:15

회복적 정의와 직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직면한다는 것, 이것은 내게 늘 두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직면하는 순간 물러설 수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 많은 사람이 평화를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몰라서가 아니다. 직면하는 순간 나는 나의 책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 삶은 나의 것이고, 그것이 고난일지라도 헤쳐나갈 사람은 결국 나이다. 직면이란 결국 나 자신의 진실에 직면하는 것, 즉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진실은 그다지 아름답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어찌할 수 없는 갈등처럼 위기 상황이 되어야 진실의 윤곽이 또렷해지는 탓이다. 그래서 공동체로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갈등에 직면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면 없이 공감이나 인정은 없다. 용서나 화해는 말할 것도 없다. 스스로 진실하지 않을 때 우리는 ‘나이스’해지고 만다. 가짜가 되는 것이다."

- <회복적 정의와 실천 워크숍 통합과정 1,2> 참가후기 중에서

 

 

"직면이 가장 큰 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갈등이 악화되는 첫 번째 이유는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도 사건의 실체를 마주 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사실 그 일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더 어려운 법입니다. 회복적 정의는 갈등으로 가해자·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 처벌로써 해결하려 하기보다, 피해자의 피해가 회복되고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도록 돕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갈등으로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영향받은 공동체가 회복되는 새로운 정의 패러다임이 바로 회복적 정의입니다. 가해자는 직면, 즉 자신의 잘못을 마주 해야만 진정으로 사과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고, 자발적 책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을 만나는 일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1974년 캐나다 엘마이라에서 난동을 부리고 공범과 함께 경찰에 잡혀간 러스 켈리는 훗날 자전적 에세이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얼마나 심각한 짓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로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결과를 직면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다." 그들이 벌인 잘못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버튼을 누르면 날이 튀어나오는 칼을 가졌고, 내 공범은 날카로운 부엌칼을 들었다. 우리는 승용차 24대의 타이어를 터뜨렸다. 카시트를 칼로 찢었고, 차의 냉각기를 부숴버렸다. 돌을 던져서 가정집의 커다란 유리창을 깼다. 마찬가지로 지역의 맥줏집 창문들도 깨버렸다. 보트를 길거리로 끌고 와 구멍을 내고 뒤집어 놓았다. 전망대를 망가뜨리고, 교차로에 있는 신호등을 박살냈으며, 지역 교회에 세워진 십자가를 꺾어버렸다. 승용차의 사이드 미러와 앞유리를 맥주병으로 내리쳤다. 정원 탁자를 연못에 빠트렸고, 울타리를 망가뜨렸다. 모두 합해 스물두 가정의 재산에 해를 입혔다." 만약 그와 그의 공범이 재판을 통해 감옥에 수감되는 것으로만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면,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잘못을 직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직면이 있어야 공감이 가능합니다. 사건의 가해자는 자기 잘못을 직면하고 인식한 뒤에야 피해자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피해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때에만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뉘우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잘못을 부정하고 발뺌을 합니다. 직면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복적 정의에서 조정자는 당사자가 문제를 직면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에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직면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입니다. 직면과 공감, 그리고 인정이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존중을 배우는 과정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뒤 상황을 수용하며 문제해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은 책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 조정자의 입장에서 당사자가 말하는 걸 무조건 인정해 주는 것은 공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한 것, 그 안에 담긴 느낌에 대해 확인해 주는 게 공감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지루해서 또는 피곤해서 몸부림을 치거나 스마트폰을 볼 때 "선생님, 지금 피곤하시군요" 이렇게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느낌인지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공감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용서와 화해는 선물과 같은 일이어서 당연한 게 아닙니다. 회복적 정의는 용서와 화해를 명시적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직면 이후 자발적 책임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내가 입힌 피해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인식과 직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피해를 이해하며(공감), 자기 행동의 결과를 받아들입니다(인정과 수용). 그리고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찾고(참여), 변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합니다(회복). 용서(Forgiveness)는 먼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화해(Reconciliation)는 용서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등지고 있던 사람들이 함께 90도씩 방향을 바꾸어 다시(re-) 동행(conciliation)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진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통해 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순간순간 진실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진리 탐구(과학적인 태도)와 느낌으로서의 진리 감정(종교적 심성)을 갖는 것, 그리고 불굴의 의지(소명 의식)를 필요로 합니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되 지성과 사랑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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