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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회복적 정의를 세우는 길 - 이재영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회복적 정의를 세우는 길 - 이재영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10. 1. 11:53

회복적 정의를 세우는 길

 

 

이재영 |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
취재 글 김문영 / 사진 김승범

 

 

‘정의’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얻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불안정한 시국에 강렬해지기만 하는 정의에 대한 열망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이재영 원장은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는 기본 원리이자 사람을 대하는 삶의 자세로서의 회복적 정의’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먼저 학교나 가정, 일반 조직 같은 일상의 영역에서 회복적 정의의 원칙과 철학을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회복적 정의의 뿌리 : 상식적 질문에 대하여 

 

응보적 정의는 문제를 가해자 중심으로 해결하는 데서 오는 한계를 피할 수 없다.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상식이라면, ‘피해자의 필요는 무엇이며 어떻게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도 나와야 한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대부분 ‘가해자가 누구고, 어떤 처벌이 합당한지’로 귀결되기에 ‘피해자의 회복’이 소외되는 문제가 심각하다. 여기서 온정주의나 가해자 처벌 회피라는 오해가 생긴다. 회복적 정의는 엄벌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이 피해 회복과 무관할 때 생기는 문제에 반문한다. 벌을 받아 죗값을 치르는데, 그것이 피해자 회복과 무관하다면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의 중요한 절반을 놓치는 것이다. 처벌이 가해자의 행동을 개선할지 몰라도, 근본 목적인 당사자들의 필요와 회복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상식적 질문은 ‘잘못을 바로잡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사회의 온갖 문제가 전문권한을 가진 소수, 해석권, 강제권을 행사하는 국가, 정부에게 넘어가다 보니 함께 잘못을 바로잡고 평화를 추구해야 할 공동체가 약화된다.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 회복을 중심에 두고, 공동체와 깨어진 관계를 다시 세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당사자 간 만남과 대화, 자발적 책임, 공동체의 참여를 중시”한다.

 


평화와 화해는 출발점이다 : 함께 평화를 건축하자 

 

나는 평화를 말할 때 ‘피스 빌딩 peace building’, ‘평화를 짓다, 건축하다’라는 표현을 쓴다.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형상으로서 ‘기초공사부터 차근차근 세워감, 혼자 이룰 수 없음’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평화와 화해는 우리가 함께할 삶의 치열한 운동이다.


예수님은 본질을 잃어버린 법과 정의에 끊임없이 충돌하셨다. 간음한 여인을 군중이 돌로 쳐 죽이려 할 때도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하셨다. 이는 함께 죄를 지은 남성은 제외하고 약자인 여성만 처벌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본질을 잃은 법에 대한 재해석이다. 예수님은 율법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라 하셨다. 즉 율법은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회복적 정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뿌리를 두고, 어느 편에 치우치지 않으며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 모두가 회복되는 정의의 실현을 지향한다.


평화와 화해는 목표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평화와 화해는 삶의 기본, 바탕으로써 우리 시대의 인식 체계, 생활양식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평화와 화해를 우선가치로 체득한 개인, 가정, 사회, 국가가 삶의 여러 영역에서 양보와 배려를 실천하고 불의에 대응할 수 있다.

 

 

삶의 통제력 회복 : 피해자와 가해자의 회복적 대화 

 

요즘 폭력, 갈등, 분쟁 등의 문제로 평화훈련원의 문을 두드리는 학교나 단체가 늘고 있다. 극적으로 회복된 사례가 많지만, 그 가운데 한 고등학생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같은 반 학생에게 1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학기 초에 시비가 붙었고 힘겨루기에서 진 피해 학생은 그날부터 잔인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도움을 구할 생각조차 못했고, 친구가 억지로 끌고 가서야 신고를 했다. 이후 피해 학생은 여느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안심하다가, 불안과 분노 증세로 넘어갔다. 피해 상황은 끝났어도 피해자의 심리 기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빼앗겨버린 ‘자기 삶의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어떤 비슷한 상황에 부딪히면 가해자에 대한 분노보다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학교, 부모에 대한 분노가 마구 돌출했다.


나는 상담 끝에 가해 학생과 만날 것을 제안했다. 삶의 통제력을 회복하려면 남이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것만으로 넘을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해야하기 때문이다. 열에 아홉은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가해자를 만나게 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짓이라고 한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지만, 분명 피해자가 한계에 직면하도록 도와줄 필요도 있다. 피해 학생이 상담사, 담임교사, 친구, 엄마와 같이 나가면 괜찮겠다고 겨우 허락하여, 소년법정 화해 권고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피해 학생은 자신이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얼마나 억울했는지 어떤 고통을 느꼈고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미리 써온 글을 절절하게 읽었다. 사건 자료만으로는 천분의 일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참여한 모든 이가 아이의 고통에 공감했다. 가해 학생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 연발했다. 가해자 측 아버지가 피해 학생과 나 사이에 무릎을 꿇고 “내가 잘못 키운 탓이다. 할 수만 있다면 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떼어내 주고 싶다”라며 말을 잇지 못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 피해 학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환경은 어렵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


피해자의 회복은 그의 필요를 어떻게 공동체가 채워줄 것인지 이야기할 안전한 공간만 주어져도 훨씬 도움이 된다. 피해자를 내버려 두는 사회구조와 풍토에서 회복적 정의는 불가능하다.

 

 

질문을 바꾸자 : 회복적 질문으로 

 

최근 경기도 교육청과 몇몇 지역교육청에서 생활지도를 ‘회복적 생활교육’으로 전환했는데, 그 가운데 한 교사가 반성문에 ‘회복적 질문’을 적용해봤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나의 반성문’을 완성하여 학교마다 활용해보도록 권하고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피해를 입었는지’, ‘자신의 행동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행동으로 발생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인지’,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본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주변에서 본인에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의 기분, 심정은 어떤지’ 등 ‘상황 이해, 피해 초점, 자발적 책임, 관계 회복, 공동체 참여, 갈등 전환’을 핵심으로 한 회복적 질문을 담았다.


반성문 한 장으로 아이들이 확 바뀌지는 않겠지만, 예전의 반성문이 유죄를 확정하고 처벌하기 위한 응보적 질문이었다면, 회복적 질문을 담은 반성문은 ‘진정한 배움-교육’이 일어나는 가능성을 열어준 의미가 크다. 회복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을 이루는 첫 번째 실천이다.

 


회복적 가정의 기초를 세우라 : 회복적 질문을 선택하라 

 

가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누가 그랬어?”라는 질문부터 던진다. 여기서 ‘누가’가 밝혀지면 그를 처리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생활의 여러 문제를 다룰 때 첫 질문을 바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회복적 질문을 더 많이 쓸 것인가 훈련할 필요가 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심판자 역할을 많이 하는데,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여러 사례를 관찰해 보면 응보적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아버지처럼 안 하겠다’ 하지만, 결국 어떤 갈등에 놓이면 자기가 경험한 아버지의 방식대로 반응했다. 몸에 익숙해져 버린 응보의 옷을 벗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가 회복적 차원에서 잘못을 바로잡는 길을 인식하고 의지적으로 회복적 질문, 대화를 선택해야 한다. 가정에서 회복적 가정을 세우지 못하면 회복적 학교, 회복적 도시, 회복적 나라를 만들기 어렵다. 회복적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회복적 학교, 도시, 나라를 이루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응보적 질문으로 자녀의 무엇이 훼손되는지 철저하게 돌아보아야 뿌리부터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불편하더라도 남에게 문제를 떠넘기고 해결해주도록 내버려두지 말자. 스스로 갈등이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의지가 회복적 정의를 이루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출처 : <월간 아버지> 2017년 3월호 http://www.father.or.kr/board/read.action?id=zine&pageNum=2&sm=060300&p_del_chk=N&no=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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