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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음모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1. 17. 10:40

음모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기본적으로 음모론은 단순한 논리이다. 믿기 힘든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어진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독특한 특징으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 때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종의 방어기제에서 음모론은 출발하는 셈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간은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싶어한다. 이야기를 지어내서라도 말이다.

자기완결성에 대한 욕구가 충분히 과학적 합리성을 갖추지 못할 때 우리는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고대인들이 삶의 모든 상황에 신적 요소를 집어넣은 것은 그래서이다. 벼락이 떨어지고 천둥이 치는 기상현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떠올렸다. 자기 내면의 공포를 외부 자연에 투사하는 방식이다. 이후에 등장한 철학자들은 사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제한된 감각기관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제한된 배경지식으로 현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루돌프 슈타이너처럼 초감각적 기관을 계발한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는 제한성의 빈 공간을 남겨 두며 갈 수밖에 없다.

음모론자들은 유독 결정론을 좋아한다. (결정론 :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일정한 인과 관계에 따른 법칙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우연이나 선택의 자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이론) 결정론은 일단 우리를 안심시키고 본다. 우리가 아는 선에서 이야기가 짜맞추어지고 그게 맞다고 확신까지 주니,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불투명했던 사건이 명확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기계적 결정론은 관념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사건의 복잡한 맥락은 제거되고 머리로 지어낸 익숙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 억지 논리가 나오고, 이것이 고착화되면 맹목적 믿음이 된다. 현대과학은 세상이 우연의 산물임을 가리킨다. 모든 게 다 무의미한 우연이라는 게 아니라 우연의 요소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길을 가다 넘어졌다면 조상을 잘못 섬겼다거나 전생의 업보 같은 게 아니라 한눈 팔다가 우연히 돌부리에 걸렸을 뿐인 것이다.

인간중심주의와 자기중심성

오랜 세월 인류가 극복해야 할 사고방식은 인간중심주의였다.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보았던 것처럼 세상의 중심을 인간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성의 발로이며, 성숙한 관점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비판적으로 성찰되어야 할 문제였다.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정신적 존재의 위치는 엄밀하게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인간만이 절대적이고 유일하게 고귀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나’라고 하는 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해서 비가 오는 게 아니다. 내가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고 해서 우리 팀이 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미숙함은 무책임한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자아를 가진 유일한 존재로서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고 싶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쉽게 말해, 잘나고 싶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책임지기는 싫다. 자신의 훌륭한 모습은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지만, 부족한 모습은 감추고 합리화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기 일쑤다. 예외는 없다. 누구나 그렇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힘껏 반성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권력과 비대한 자아

물론 권력이 주어질수록 인간은 반성에 취약해진다. 제법 훌륭한 인격자였더라도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지기 쉬운 것은, 반성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자아는 팽창할 뿐 성찰하지 못한다. 내적으로 성숙해지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권력을 바라는 욕구가 있는 인간은 모순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상태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할 때 현상을 왜곡한다는 데에 있다. 이제 진리는 믿음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비대한 자아는 보잘것없는 믿음을 진리로 확대해석한다. 그리고 비루한 자신의 지성을 자기 믿음의 합리화에 사용하며 세력을 얻고자 한다. 소위 이단이거나 이단에 가까운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 벌이는 행태를 보면, 자기중심성도 극복하지 못하고 합리성도 획득하지 못한 망상의 추악함을 목격할 수 있다. 비단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발도르프 교육이나 인지학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회복적 정의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비폭력 대화에 심취한 사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있다. 어느 순간 추구하고자 했던 고귀한 가치가 비대한 자아의 겉옷 정도로 전락해버린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겸손한 척하지 않는 이상) 그런 사람은 늘 성찰이라는 결계를 치며 자아의 팽창을 막는다. 음모론에 빠지는 사람 중에 겸손한 사람이 있을까? 자기가 틀렸을 거라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엄밀한 사고를 추구하는 사람이 과연 음모론에 빠질 수 있을까? 대체로 음모론에 빠진 사람은 자아가 비대하며 분노와 혐오, 불안과 공포 같은 부정적 감정에 빠져 있다. 이들의 동력은 반감이다. 자기 믿음의 절대성을 훼손하려는 자들에 대한 맹렬한 증오, 이것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

음모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

따라서 음모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1) 나는 무책임해지고 싶은가, 책임 있게 행동하고 싶은가? 2) 이것은 합리적 믿음인가, 비합리적 맹신인가? 3) 나는 자기중심적인가,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려 하는가? 4) 나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는가, 편안한가? 5) 나는 겸손한가, 오만한가? 

우리 시대의 희망은 다시 과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과학이란 벌어진 현상의 인과적 힘을 찾는 작업이고, 세상의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가치를 내포한다. 과학은 주관성이라는 경로를 거쳐 궁극적으로 객관성을 얻어낸다. 주관적 관찰과 경험, 사고를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으로 토론해야 하고 반복적으로 실험해야 하며 누구에게나 탐구의 장이 열려야 한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자연적 필연성을 밝혀내는 작업이야말로 정신적인 일이다. 비록 자연과학이 물질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 귀결은 우주 섭리를 파악하는 정신에 있을 것이다. 음모론은 편협한 믿음의 압박에 우리를 가두지만(누군가는 거기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아 상실, 자아 도피의 편안함!) 진정한 과학은 우리를 주관적 편협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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