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연결된다면 (1) 본문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연결된다면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행복에 대한 담론은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항상 인기 주제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 싶다. 저마다 행복의 빛깔이 다를지언정 인간은 기본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만약 스스로 불행해지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아닐 것이다. 누구도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 이것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그렇다.
행복이라는 개념의 핵심에는 욕구(needs)가 있다. 바라는 게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럴 때 만족과 기쁨이 차오른다. 그런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욕구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어 복잡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욕구를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면? 절망감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분노가 차오르거나, 최소한 슬픔이 깃든다. 김수영의 짧은 시 ‘거미’에는 욕구가 좌절된 이의 심정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채 자란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 흔히 말하는 인성 문제는 부모의 양육 방식에서 시작한다. 어린아이의 기본 욕구는 단순하다. 먹고 싸고 자는 생리적 욕구를 제외한다면 아이들은 누구나 사랑받길 원하고, 생활이 안정되길 원하며, 마음껏 놀 수 있기를 원한다. 여기에서 사랑의 구체적 의미는 대체로 촉각적 경험과 함께한다. 아이는 만져지길 원하고 만지고 싶어한다. 아주 어린 아이라면 물고 빨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부모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차라리 말없이 아이를 안아주고 쓰다듬어줄 때 아이는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규칙적인 생활 리듬과 자유로운 놀이에 대한 욕구 역시 사랑의 욕구만큼이나 크고 중요하다.
만일 모든 가정에서 아이들의 이러한 기본 욕구가 충분히 채워진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인간적이고 건강해질 것이다. 유년기를 그런 방식으로 충만하게 보낸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던 아이들보다 행복하게 살 확률이 분명히 클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아이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어 양육을 하는 가정은 드물다. 의외로 많은 부모가 아이를 위해 들이는 시간을 아까워한다. 자기 휴식과 업무, 학업을 위해 아이에게 충분히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함께 있는 시간에도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주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일찍부터 온갖 학습을 강요하며, 또는 학습이 아니라 ‘놀이’라고 기만을 하면서 조기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누군가 항변하며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을 한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우선 어른과 아이는 같은 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이다. 어른은 신체 발달도 완성되고 자아의식도 확립된 존재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다. 어른이 되어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많은 도움과 교육이 필요하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아이는 자기중심적 존재이고, 생존과 성장의 관점에서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어쩌면 당연하다. 이에 비해 자아가 독립한 어른은 자기인식이 가능해야 하며,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물론 아이도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여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게 사회화의 중요한 과제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배움의 과정일 뿐이다. 아이는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과도한 책임을 요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른은 아이와 달리 자기중심적 행복만을 추구할 수 없다. 더욱이 부모라면, 기본적으로 아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게 도리다.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릴수록 더욱 그렇다. 그때 아이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어 정성을 기울일수록, 사춘기가 되어 반감이 강해지는 시기에도 아이와 잘 지낼 수 있게 된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에 따르면 욕구 또는 의지에는 7가지 층위가 있다. 가장 낮은 수준이 본능, 그 위로 충동, 그 다음에 욕망이 있고, 자아가 확립되어 가면서 동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위의 세 층위와 네 번째 수준인 동기가 다른 지점은 자기인식의 유무이다. 동기란 스스로 인식할 수 있고 의미를 발견해내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사춘기 이전에는 주로 외적 동기가 주어진다면 자기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사춘기 이후에는 내적 동기가 대단히 중요해진다. 내적 동기에 따른 삶이란 자기 이유를 갖는 것이다. 모든 행동에 자기 이유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가르치는 자기 이유가 있어야 한다. ‘나는 왜 이 수업을 하는가?’ 이에 대한 스스로의 답 없이, 국가교육과정이 시키는 대로 진도를 나가는 것이 곧 수업이라고 믿는다면 교사는 로봇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 노래를 하나 하더라도 이 노래를 왜 이 학년 아이들과, 어떤 이유로 부르는 것인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 주도성을 가져갈 수 있다. 내적 동기에 따라 창조적인 수업을 하는 교사와 외부에서 시키는 대로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가 더욱 성숙해진다면 동기를 넘어서는 소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이웃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곧 소망이다. 자연이 회복되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것 역시 커다란 소망이다. 소망은 나를 넘어선다. 이것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 의도이고, 확고한 의지가 되어 내적 결실을 맺는 것이 결단이다.
1) 본능
2) 충동
3) 욕망
4) 동기
5) 소망
6) 의도
7) 결단
소망과 의도, 결단은 우리의 정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준으로 올라갈 때 우리는 자연스레 감사함을 느낀다. 동기에 따른 자유로운 삶에서 자기중심성을 극복한 소망과 의도, 결단으로의 성장은 자기통제력과 자아감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킨다. 욕구에 따라 끄달려가는 수동적 삶이 아니라 내가 내 욕구를 이끌어가는 능동적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이의 손길을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손길을 뻗는 것, 이것은 금강경에 나오는 "바라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경지와 같다. 행복은 이제 내 본능과 충동, 욕망이 충족되길 바라는 것이라기보다,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실천하는 나의 의지적 행위로 변형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적극적 행복(Eudaimonia)일 것이다.
(이어서)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회와 회복적 정의 (0) | 2021.05.27 |
---|---|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연결된다면 (2) (0) | 2021.05.13 |
회복적 삶에 대하여 (2020. 5. 19) (2) | 2021.01.31 |
음모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 (0) | 2021.01.17 |
인지학과 음모론 (0) | 2021.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