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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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회복적 정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올해 우리는 광복 76주년을 맞는다. 치욕적인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 빛을 회복했다는 광복절은, 그러나 독립기념일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는 연합군에 의해 패망했고, 우리는 도둑처럼 해방을 맞았다. (물론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니다. 아쉽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온전한 독립국가로 회복되지 못했다. 해방 이후 한국은 하나의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실패했고, 국제적인 냉전 질서 속에서 분단과 내전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민중은 일제 때 못지않은 수많은 국가폭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해방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일제 잔재는 많이 극복했다 하더라도, 같은 인간을 노예로 여기는 식민지 시절의 비인간적 문화에서 우리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으로부터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통일에 근접하지 못했다. 또 촛불혁명 이후에도 국민주권이 완전히 보장되는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일제 때부터 이어져온 기득권세력은 체제유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성범죄자가 국외도피를 시도했으나 검찰 고위간부였다는 이유로 오히려 그것을 막아낸 사람들이 기소되고 있다. 언론은 명백히 검찰의 편에 서서 여론을 호도한다. 재미있게도 그런 언론마저 검찰을 비난할 때가 있다. 국내 최대기업의 사주가 구속될 때이다. 누군가는 영화 대사처럼 이렇게 자조할 것이다. “정의? 대한민국에 그리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긴 한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많은 이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국가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우리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일터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동성애자와 여성 같은 약자가 차별과 혐오를 당하는 일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술을 마시다가 물에 빠져 숨진 의대생의 뉴스가 연일 주요뉴스로 다뤄지는 것에 비해 항만에서 하역노동을 하다가 컨테이너에 깔려 숨진 청년의 이야기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받은 군인이 군대에서 쫓겨나 자살을 하는 일이 벌어져도 국방부는 사과하지 않는다. 되려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문화가 존재하며, 유튜브에서는 그런 행위로 돈을 버는 자들마저 있다. 강력한 중대재해처벌법과 혐오방지법, 차별금지법 등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함을 드러낸다.
한국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다른 방향에서 던져볼 수 있겠다. 주류 기득권세력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회 변화를 막아왔을까? 한국은 해방 이후 일본과 마찬가지로 과거사 청산을 포기한 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남한과 북한의 기득권세력은 전쟁 이후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루며 체제를 유지해왔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여순사건, 제주 4.3, 6.25(민간인 학살, 빨치산 토벌), 5.18 등을 겪었고, 독재정권 아래서 수많은 시국사건, 간첩조작사건, 노동조합탄압사건, 의문사사건 등이 벌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과거사 청산 요구가 크게 대두되었으며, 점진적이었지만 소기의 성과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보수정권 아래서는 기존의 성과를 훼손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기도 했다.
과거사 청산을 방해하는 한국사회의 기득권세력은 반공주의와 보수적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기독교는 인간해방의 이념으로 들어왔지만 오늘날에 이르는 동안 그 주류는 독재세력과 타협했고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권력이 되었다. 주류 기독교의 성장에는 반공주의가 또 다른 동력으로 작용했다. 6.25를 전후해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한국 기독교 팽창의 주역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 또는 북한은 악마의 다른 이름이며,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해치는 이는 모두 빨갱이, 친북세력으로 호명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나 법의 지배라는 가치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회복적 정의에 관심을 표하는 이들마저 응보적 정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아야 회복적 정의도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가장 성공적으로 막아낸 국가 중 하나로 인정받는 한국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욱 성장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국가적 이상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온전한 독립국가로 회복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탄압하고 체제의 모순을 감추는 데에 여전히 반공주의가 사용된다. 분단에서 통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반공주의의 광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분단체제가 해체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윤보다 생명을 지향하자"고 두려움 없이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광기는 우리를 각자도생의 비참한 생존 문화에 빠지게 했다. 공동체의 안위보다 당장 나 자신의 생존이 절박한 사회에서 회복적 정의는 너무나 먼 이상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회복적 정의야말로 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 분열을 낳는 분단체제를 넘고 불평등을 양산하는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설 때, 그래서 하나의 국가공동체를 회복하고 상호부조의 경제체제를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비전을 공유하고 함께 실천하는 과정이 빛을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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