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혐오문화와 회복적 정의] 혐오문화에 정의가 있을 수 있을까?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혐오문화와 회복적 정의] 혐오문화에 정의가 있을 수 있을까?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9. 7. 21:37

혐오문화에 정의가 있을 수 있을까?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 혐오라는 유령이...” 우리는 불의한 일을 볼 때 분노를 느낀다. 대기업 총수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가석방될 때, 말과 행동이 다른 비리 정치인이 열변을 토할 때, 남성에 의해 여성이 계속해서 살해당하는데 뚜렷한 대책이 없을 때 우리는 화가 난다. 개인의 분노는 별다른 힘이 없지만 조직된 분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이 분노는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치에 맞지 않거나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한 집단적 분노는 여론의 외면을 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정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분노가 언어적이든 물리적이든 폭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의 분노는 정의라는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터져나오는 감정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정의로운 사회로의 변화이지, 응보적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정의롭게 바꾸어 내는 것, 즉 사회 정의의 회복이다. 따라서 범죄를 저지른 대기업 총수나 비리 정치인에 대한 응보 감정은 사회 구조의 문제로 시선이 옮겨져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분노라는 감정적 에너지를 합리적 이성으로, 또 조직된 의지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올바른 정치 행위일 것이다.

정치의 본래 역할은 대중의 욕구를 폭넓게 청취하고 타협점을 찾아 갈등을 줄이며, 다수의 욕구를 실현하면서도 소수의 욕구를 차별하지 않는 데 있다. 때로는 다수가 원치 않는다 해도 인권의 원칙에 따라 규범을 새롭게 수정할 필요도 있다. 정치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차별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야지, 확대시키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 불평등과 차별이 확대 또는 은폐될수록 정의는 사라지고 공동체 구성원 다수가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불평등과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사회 속에 살면서 사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그렇게 된 거라고 핏대를 세우는 이들이 그렇다. 가난한 사람이 게으를 수도 있겠지만, 게으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실 아무리 노력해도 비참한 생활이 나아질 기미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 그것은 구조적 불평등 탓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 너무 많은 힘이 주어져 있고, 오랫동안 견제되지 않았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수많은 기득권이 있다. 모피아라 불리는 경제부 관료들, 원전 마피아 세력들, 기레기라는 멸칭이 생긴 언론계, 검찰과 법원 같은 사법계, 의료계, 경제계, 정치계, 체육계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기득권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나 노련한 기득권은 뛰어난 전략이 있는데,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약자에 대한 혐오로 전치(轉置)시킨다.

한때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으로 인정받던 일본이 깊은 수렁에 빠져든 것은 극우 정권의 장기 집권 탓이 크다.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그들이 쓰는 전략 중 하나는 혐한, 즉 한국을 혐오하는 것이다. 일본의 서점에는 혐한서적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보수 정권 당시 정부에서 극우 커뮤니티를 지원했던 전례가 있다. 그들은 입에 담지 못할 언어로 특정 지역민들을 욕되게 했고, 세월호 참사 직후에는 단식농성장 앞에서 ‘폭식 투쟁’이라는 패륜적 집단 행위를 하기도 했다. 소위 ‘일베’라 불리는 이들은 이후 사회 곳곳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번 올림픽 보도에서도 드러났듯이(문화방송) 사회 전방위적인 커뮤니티에 ‘일베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과 20대를 중심으로 최소한의 도덕적 선조차 붕괴되고, 혐오를 놀이화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20대 남성의 우경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물론 20대 남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흔히 개혁 세력이라고 믿어왔던 젊은 남성들에게서 우경화의 흐름이 뚜렷해진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들은 페미니즘을 증오하고 조선족을 무시하며 난민을 거부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는 일들에 공감하지는 못하면서 무임승차 문제에는 매우 민감하다. 남성이 100만원을 벌 때 64만원밖에 못 버는 여성이 오히려 우대받고 있다고 느낀다. 민식이법이 잘못되었다며 아이들이 운전자를 위협한다고 분개한다. 카페나 식당에 시끄러운 아이들을 들이지 말라며 노키즈존의 확대를 주장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공정하지 않다고 욕설을 퍼붓는다. 언제부턴가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정당한 분노보다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분노를 자주 목격한다. 그리고 거의 틀림없이 거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혐오의 정서가 녹아 있다.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어린이나 여성, 이주민 같은 약자를 대놓고 혐오한다면, 이것은 심각하게 병리적인 현상이다. 기성세대보다 풍요롭게 살 수 없다며 기성세대를 미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당연히 당사자 개인의 삶도 나아질 수 없다. 취업난과 집값 폭등 같은 문제는 사회적 문제이므로 연대를 통해 싸워나가야지, 약자나 소수자, 기성세대, 특히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위선’을 까발린다며 극우적인 집단에 영혼을 위탁하는 것은 자기파괴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손쉬운 혐오문화에 빠져든 것은 아무래도 미디어의 영향이 매우 클 것이다. 그런데 미디어에 혐오문화가 퍼지도록 방치한 것은 누구일까? 앞서 말한 기득권 세력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분노가 사회적 감정이라면 혐오는 동물적 감정에 가깝다. 분노에는 이유가 있지만 혐오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 단지 내가 억울하고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자기중심주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세대를 이렇게 만든 데에는 기성세대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온 국민이 자녀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입시 경쟁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건강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 있나? 그저 신생아 때부터 스마트폰을 쥐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 또 이들에게 대학만 잘 가면, 성적만 좋으면 만사가 해결될 거라고 타이르며 여전히 입시교육을 강제하지는 않았나?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삶의 조건에 분노할 여유마저 빼앗은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분노에 재를 뿌리면 고약한 혐오의 연기가 피어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시, 제대로 분노했으면 한다. 특히 젊은 세대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분노했으면 좋겠다. (약자나 소수자를) 혐오하지 말고 (부조리한 사회에) 분노하며, 이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에 자기 목소리를 냈으면 한다. 그것이 스스로의 영혼을 회복하는 길이고, 사회 정의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