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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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존엄과 존중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세상에 존엄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존엄하지 않은 사람, 또는 덜 존엄한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자신의 인권 의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차별은 평등해야 할 인간의 존엄에 위계를 둘 때 발생한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 성별, 나이, 국적, 피부색, 성적 지향, 재산 유무 등을 떠나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다. 심지어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빼앗길 수 없다.
형사사법은 가해자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전근대 또는 근대 초기에 피의자는 별다른 제재 없이 고문을 당했고 대중 앞에서 사형이 자행되곤 했다. 근대사법이 놓쳐온 것은 오히려 피해자의 존엄이었다. 가해자 중심의 법정은 피해자를 소외시켜 왔다. 회복적 사법은 당사자들의 존엄, 특히 피해자의 존엄에 초점을 맞춘다. 피해자는 가해자에 의해 인간적 존엄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존엄의 회복이 사법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욕구가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가해자에게는 자발적 책임이 요구된다.
범죄 사건이 아니어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너무나 쉽게 누군가의 존엄을 훼손하는 말을 한다. 부모가 아이를 비난하는 말들, 형제자매 사이에 핀잔하는 말들, 친구 사이에 무심코 던지는 혐오의 말들을 구체화해보면 대상의 존재를 말살하는 표현이 상당히 많다. "너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나가버려" "넌 구제불능이구나" 같은 말은 오히려 순한 축에 속한다. 폭행과 살인을 암시하는 표현이 여전히 남발된다.
인간 존재를 소외시키는 말은 파괴적 갈등 문화에 기반한다.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 하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서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 경쟁은 당연한 것이고 인간 사회는 근본적으로 약육강식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나의 존재성을 돋보이게 하려면 타인의 존재성을 깎아내려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낙후된 문화의 소산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간은 존엄한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한 자아가 있고, 각자 삶의 주인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삶을 잘 살고 싶다. 행복하게, 자기답게, 자유롭게 살고 싶지,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거나 억압받으며 가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정신적 자아가 있는 존재로서 우리는 존엄성을 인정받고 싶다.
존엄한 존재들끼리 관계는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존중이다. 존중의 바탕에는 존엄에 대한 인정이 있고, 실천적으로는 공감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심지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지만 대체로 그렇다. 마음을 알아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마음을 알아줘야 한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도.
그러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 마음도 정확히 알기 어려운데 어떻게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까?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복잡미묘한 마음을 정확하게 추측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물어야 한다. 두루뭉실하지 않고 정확하게! 마음은 사고 감정 의지 또는 생각 느낌 욕구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가 지식이나 정보의 교류 차원에 머무를 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한 사람의 판단이나 평가는 껍데기 같은 겉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감정과 욕구가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감정과 욕구는 우리의 속마음이고, 존중의 대화는 이 속마음을 물어보고 표현하며 연결되는 것이다.
자아를 가진 인간은 누구나 자아감, 자존감, 존재감을 느끼고 싶다. 자기만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존엄성이 훼손된 사람일수록 존재감을 부정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존중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기 어렵다. 흔히 인간 사회에서 이것은 악순환으로 자리잡는다. 그것이 파괴적 갈등의 문화이다. 그러니 교육을 통해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새로운 문화, 갈등이 성숙한 관계를 가능케 하는 건설적 갈등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교육은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교육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핵심에 두는 것이 진정한 인간교육이다. 따라서 모든 교육 행위에 존중이 녹아 있어야 한다. 마주 앉아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문화가 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존중이고 마음을 알아주는 행위이다. 교육은 궁극적으로 참된 인간 존재가 되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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