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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동체와 회복적 정의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불교공동체와 회복적 정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12. 2. 00:21

불교공동체와 회복적 정의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불자는 절에 갔을 때 불상 앞에서 3배를 드린다. 절을 할 때 차례대로 이렇게 읊조린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 법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제도종교로서 불교는 교조인 부처, 교리인 불법, 교단인 승가, 이렇게 3요소를 갖는데 불자는 절을 하며 자신의 믿음과 의지처를 확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갈등과 고통을 어떻게 바라볼까?

부처 또는 붓다(Buddha)는 고대 인도에서 ‘깨달은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널리 쓰이다가 훗날 불교의 교조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싯다르타는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는 삶의 근본 문제인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 출가를 하고 6년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삶의 고통에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 외에 네 가지가 더 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는 것. 원증회고(怨憎會苦),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사는 것. 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지만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오온성고(五蘊盛苦), 자기중심적으로 집착을 하는 것 등이다.

우리 일상 속에서 갈등이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들이 욕구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갈등의 본질은 욕구와 욕구의 충돌이며,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있고 싶고, 싫거나 미운 사람은 멀리하고 싶으며, 내가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지길 바라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중심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핵심 문제이다. 우리는 욕구 충족을 통해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 세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지 않기에 번민에 빠진다. 이에 대해 부처는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라고 말한다. 진리는 밝게 드러나 있지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 참된 실상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통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  물론 사회 구조적인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궁극적으로 무아(無我)의 존재로 본다. 무아를 단순히 ‘자아가 없다’로 해석하기보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된 사람은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이 관계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관계 속의 존재이지, 단독의 실체가 아니다. 삼라만상은 본래 인연에 따라 관계 맺고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는 법이다. 오로지 자기중심성에 빠진 인간만이 수많은 욕구와 집착으로 갈등과 번민에 빠진다. 무명에 의해 탐욕을 일으키고, 분노하며, 온갖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탐진치). 그렇다면 욕구를 버리면 해결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욕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에너지이자 불씨와 같다. 욕구를 잃은 사람은 삶에 대한 열의가 사라져 무의미하고 공허해질 가능성이 크다. 욕구는 갖고 있되 무명에서 벗어나 밝아지면(明) 된다.

불교의 공동체, 승가(僧伽, samga)

무명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계의 실상을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나 이것은 산속에 들어가 가부좌를 튼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깨달음 역시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수행의 연속이며 수행이란 반드시 이웃을 필요로 한다. 불교에서는 수행의 벗을 도반(道伴), 즉 ‘함께 구도의 길을 가는 동무’라고 불렀다. 이를 확장하여 이해하면 우리 자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이 우리의 도반이 될 수 있다. 가족, 친구, 동료, 지역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도반인 것이다.

부처는 제자 아난다에게 도반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아난다야, 너에게 좋은 벗이 있고 그 벗과 함께 있게 되면 수행의 절반을 이룬 게 아니라 전부를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순수하고 원만하고 깨끗하고 바른 행동은 언제나 좋은 벗을 따라다니지만 나쁜 벗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좋은 벗과 사귀고 좋은 벗과 함께 있어야 한다.”

한국 불교에서는 보통 승가를 ‘스님들’로 번역해 사용하지만 정확히는 수행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출가한 비구, 비구니뿐 아니라 세속에서 수행하는 우바새, 우바이까지 사부대중이 모두 승가의 구성원인 것이다.** 회복적 정의 운동이 이제 회복적 가정, 회복적 마을, 회복적 도시 등 공동체 회복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고 관계 형성과 관계 회복에 집중하는 것처럼 불교에서도 도반과 공동체는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이다. 다만 불교에서 강조하는 용어는 정의보다 진리이고, 회복보다 화합이라고 할 수 있다.

**  비구는 남자 스님, 비구니는 여자 스님이며, 우바새는 남자 신도, 우바이는 여자 신도를 뜻한다.


부처는 생전에 제자들과 일반 대중에게 화합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육화법, 즉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잊지 않고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이 있다. 이 여섯 가지 실천으로써 서로 화합하여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첫째, 함께 같은 계율을 지켜라. 둘째, 대중의 합의에 맞추어 행동하라. 셋째, 받은 공양을 똑같이 나누어라. 넷째, 한 장소에 모여서 살아라. 다섯째, 항상 말을 자비롭게 하라. 여섯째, 항상 남의 뜻을 존중하라.”

불교의 계율은 주로 오계를 말하는데, 다섯 가지 계율이란 살생하지 말고(不殺生) 평화로울 것, 도적질하지 말고(不偸盜) 보시할 것, 간음하지 말고(不淫) 청정을 지킬 것, 헛된 말을 하지 말고(不妄語) 참말만 할 것, 어떤 것에도 중독되지 말고(不飮酒) 정신을 맑게 할 것 등이다. 불교의 수행공동체가 계율과 함께 추구하는 것은 무명에서 벗어나는 해탈, 즉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삶에서 만족과 평화와 지혜로움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은 출가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각자 삶의 위치에서 다른 구성원(도반)들과 함께 대화로 합의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타파하며, 자비롭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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