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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와 한글 창제의 과학성 (2019. 8. 4) 본문
영화 <나랏말싸미>와 한글 창제의 과학성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백성들이 쉽게 배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 싶다... 영화는 묵직했고, 아름다웠다. 말년의 세종은 한글 창제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 1443년 12월 30일의 기록 전문이다.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그러나 이날 이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한글과 관련해 단서가 될 만한 그 어떤 기록도 없다. 영화는 이 역사의 공백을 상상으로 채운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그랬듯이.)
그동안 한글은 세종의 명을 받고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게 통설이었다. 3년 뒤에 나온 <훈민정음해례>를 세종의 명에 의해 정인지와 집현전 학자들이 편찬했고, 이후 보급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집현전이 관여했다거나 도움을 주었다는 기사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창제한 날의 기록이나 <훈민정음해례>에도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은 상소를 올려 '언문'이 사대에 어긋나고, 오랑캐와 같아질 수 있으며, 설총이 만든 이두가 이미 있으니 불필요한 데다 학문에 방해가 되고 정치에 무익한, '새롭고 기이한 기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를 했다. 최만리는 당시에 집현전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의 상소문을 보면 어떤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자신도 모르게 한글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알았다면 결사 반대를 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감독의 상상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세종이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해도, 아무도 몰래 새로운 문자를 혼자 만들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산스크리트어뿐 아니라 티벳어, 몽골어까지 능통했다는 신미 스님을 내세운다. 일설에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가 도왔다고도 하던데, 나중에 정의공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나와도 좋을 것이다. 어찌됐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상영 전 자막을 통해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일 뿐이며,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라고 밝히고 있으니 역사왜곡 논란은 무의미해 보인다. 신미 스님이 도왔다고 해서 세종이 무능하게 묘사된 것도 아니다. 세종은 실제로 운서에 정통했으며 중국의 각종 언어학 서적을 섭렵했다. 그는 언어전문가 신미와 대화와 토론이 가능한 인물로 묘사된다.
농업과 의학, 천문, 과학기술, 역사,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인 대왕으로서 세종은 그러한 분야 모두에 조예가 깊었지만, 그 분야 전문가들을 신뢰했고 필요하다면 전권을 주었다. 그는 재주가 있으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두루 인재를 썼다. 아마 사대 문제를 비껴가기 위해 한글 창제의 과정을 철저히 비밀로 붙인 게 아니었을까. 영화에도 나오지만 당시 조선은 유학자들의 나라였다. 이들은 소중화, 즉 스스로를 작은 중화로 여겼고, 한자가 아닌 문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들에게 조선인의 주체성이란 무엄하고 망측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세종은 왜 문자를 만드려고 하느냐는 신미의 질문에 "망하지 않으려고"라고 답한다. 배우기 쉬운 문자를 통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백성 모두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게 세종의 뜻이었다. 그래야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이 제대로 배워 올바로 사고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작금의 일본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한줌의 권력자들은 지식을 자기들끼리만 소유하고자 한다. 왜냐면 지식, 곧 아는 게 힘이기 때문이다. 신분제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유학자들에게 누구나 배우기 쉬운 문자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글 창제는 위대한 혁명이었다.
영화에 자세히 묘사되는데,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훈민정음해례>에는 성리학의 인식 틀에 따라 일목요연한 해설이 달려 있다. 그러나 음양오행과 천지인이라는 세계관이 있다고 해서 새로운 문자가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세종과 신미는 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어를 기초로 언어의 음운학적 구조를 탐색해 나간다. 이들이 구체화한 구조는 오늘날의 음운학과 비교해 보아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과학적으로 탁월하다. 물론 음운 구조를 잘 안다고 해서 한글처럼 '쉽고 간단한' 문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높은 창조성이 요구된다. 한글의 원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컬럼비아대학 게리 레드야드 교수는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자 모양과 기능을 관련시킨다는 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유구하고 다양한 문자의 역사에서 그런 일은 있어 본 적이 없다. 소리 종류에 따라 글자 모양을 체계화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그 글자 모양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조음(造音) 기관을 본뜬 것이라니! 이것은 견줄 데 없는 언어학적 호사(豪奢)다.”
한글의 자음은 조음 기관을 본뜬 기본 글자 다섯(ㄱ ㄴ ㅁ ㅅ ㅇ)에 한 획씩 더하는 방식으로 글자를 생성하여 그 글자들이 계열화를 이루게 하였다. 예컨대 연구개음(여린입천장소리)인 ‘ㄱ’에 획을 더해 같은 연구개음이되 거센소리 글자인 ‘ㅋ’을 만들고, 입술소리인 ‘ㅁ’에 획을 차례로 더해 같은 입술소리이되 새로운 자질(資質)이 더해진 ‘ㅂ’과 ‘ㅍ’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점은 로마 문자와 비교해 보면 한글에 함축된 음운학 지식이 얼마나 깊고 정교한지 금세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나 잇몸에 혀를 댔다 떼면서 내는 소리들을 로마 문자로는 ‘N, D, T’로 표시하지만, 이 글자들 사이에는 형태적 유사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한글은 이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글자를 ‘ㄴ, ㄷ, ㅌ’처럼 형태적으로 비슷하게 계열화함으로써, 이 소리들이 비록 자질은 다르지만 소리나는 곳은 같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 준다. 이 말은 이미 한글 창제자들이 음소(音素) 단위의 분석에서 더 나아가, 현대 언어학자들과 같이 음소를 다시 자질로 나눌 줄 알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모음을 생성하는 방식도 매우 과학적임을 알 수 있다. 자음과 마찬가지로 모음의 기본자( · ㅡ ㅣ)를 만든 후, 이 기본자의 어울림으로 초출자(ㅗ, ㅏ, ㅜ, ㅓ)를 만들고, 이 단모음 7자를 다양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글자 모양과 소리(이중‧삼중 모음)를 생성한 것이다. 여기에다 빼놓을 수 없는 한글의 장점은, 모음의 소리값이 항상 일정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모음은 축약(縮約)의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 어느 때라도 일정한 소리를 유지하게 되어 있다. 영어 ‘A, E, I, O, U’가 각종 단어에서 얼마나 다양한 소리를 내는지를 고려해 보면 한글이 얼마나 익히기 쉬운 우수한 문자인가를 알 수 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는 이러한 창제 과정을 관념이 아닌 실재로써, 언어의 정신성이 어떻게 육체를 얻어가는지를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른 문자들의 원리에 대한 고증에서부터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며 실험 결과에 대해 토론을 하는 치열한 실증의 과정뿐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우연의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글 창제가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기보다 음운 구조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직관적 통찰, 그리고 우연적 요소의 수용을 포함하는 창조적인 예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신미를 비롯한 승려들과 세종, 왕자들의 고군분투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생산했고, 그 속에서 직관적 창조가 가능했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유교든 불교든 기존의 모든 관념체계를 내려놓고 전혀 다르게 시도해 보는 노력이 있었기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종 결과물의 해설(과 작명까지)을 주류학자들에게 맡겨 기득권층의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한 장면도 설득력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우주의 모든 천체가 완전한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원이야말로 완벽한 도형이었기 때문이다. 기하학을 특히 중요시 여겼던 플라톤주의자들은 우주가 기하학적으로 이상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천문학자 케플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연구 초기에 태양계에 행성이 6개밖에 없는 이유를 정다면체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에 따르면 수성에 외접하는 정다면체가 있고, 그 정다면체에 외접하는 금성이 있으며, 그 금성에 외접하는 정다면체와 그에 외접하는 지구 등등으로 설명했다. 정다면체는 다섯 개밖에 없으니 그것에 내접하거나 외접하는 행성은 여섯 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뢰하는 관측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엄청난 자료를 통해 화성이나 목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케플러는 자신의 신념과 관측 자료가 보여 주는 실제 모습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하지만 마침내 행성들이 타원운동을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발표한다. 이것이 과학이고 혁명이다. 만일 그가 기존의 관념에 사로잡혀서 실측 자료를 부정하고 계속 원운동을 주장했다면, 이후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한글 역시 창제자들이 기존의 성리학적 도그마에 빠져 있었다면 근본적으로 창제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편견이나 이론, 세계관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은 과학적으로 창제할 수 있었고, 한글 창제를 통해 오히려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혁신이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가 인간 세종을 보여 주어서 좋았다. 그는 신이 아니었다. 마음이 여리고 곧았던 그에게 궁궐 정치는 가혹한 일이었다. 병든 몸과 복잡한 정치 현실 속에서도 그는 올바르게 사고하려고 애쓴다. 원칙주의자인 신미에게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는 자기 할 일을 해내고 만다. 한글은 세종 혼자 창조한 것이라며 영화가 역사왜곡을 한다는 주장들은 세종의 신격화와 맥이 닿아 있어 보인다. 세종에게는 장영실이나 박연 같은 천재가 있었다. 꼭 신미가 아니었어도 그는 언어 분야의 천재를 썼을 것이다. 좋은 영화가 이런 식으로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
2019. 8. 4.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고종석, "한글, 언어학적 호사의 극치"
박재용, "과학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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