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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포럼]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에 대한 이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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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포럼]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에 대한 이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3. 23. 16:06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에 대한 이해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독일어 ‘Geisteswissenschaft’의 번역어인 정신과학은 본래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과 대비하여 법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역사학 등 인문·사회과학에 속하는 여러 분과 학문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학계에서 '자연과학'과 대비되는 개념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지만, 학문의 분화가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19세기 독일에서는 인문·사회과학에 속하는 여러 학문이 모두 '정신과학'으로 불렸다. '정신과학'은 현재에도 독일어권 학계에서는 통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자신의 사상인 인지학(Anthroposophie)을 일컬어 '정신과학'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자연(Narur)' 또는 '물질(Materie)'과 대립되는 개념인 '정신(Geist)'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과학'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독일어권 학계에서 말하는 '정신'은 자연과 대립되는 유개념, 즉 '인간', '문화', '사회', '역사'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에 따르면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은 다양한 의미로 구성되는데, 정신적 의미로 이루어진 인간의 삶이 외적으로 표현된 것이 '문화'이다. 그리고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인간의 삶이 타인의 삶과 더불어 전개되는 터전이 바로 '사회'이며, 타인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고 전개된 인간의 공동체적 삶이 바로 '역사'이다. 따라서 인간과 관련된 모든 분야는 '정신과학'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심리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에 대한 구분이 모호하며, 정신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뭉뚱그려 파악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과학' 또는 '인문과학'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human science'가 ‘Geisteswissenschaft’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두루 쓰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human science'를 과연 '과학'의 한 분과라고 할 수 있느냐이다. 이것은 'Wissenschaft'라는 용어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독일어 'Wissenschaft'는 '과학'의 의미뿐 아니라 '학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지식'을 뜻하는 'Wissen'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schaft'가 합쳐진 이 말은 다양한 종류의 지식 일반을 지칭하는 '학문' 또는 지식을 추구하는 활동 일반으로서의 '연구'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에 비해 라틴어 'scientia(지식)'를 어원으로 하는 영어 'science'는 '학문'이라는 뜻보다 '과학', 특히 '자연과학'의 의미가 강하다. 정신과학의 계보에 있는 빈델반트와 리케르트, 딜타이, 후설 등은 모두 형이상학으로서의 자연주의와 실증주의에 맞서,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으로 포섭되거나 환원되지 않고 독자적인 학문으로 존립할 수 있도록 노력한 철학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정신과학은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삶을 다루는 정신학, 즉 정신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슈타이너는 여러 차례 자신의 인지학을 자연과학과 다르지 않은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근대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을 철학이 아닌 과학으로 천명한 바 있다. 사실상 근대철학은 '과학'이라는 학문을 규정하기 위한 탐구라고 할 수 있는데, 정신세계 역시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으며 그 탐구의 도구는 인간 자신의 고차적 감각이라는 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정신과 참된 감각의 세계에서, 진정한 과학자라면 감각계의 여러 사실에 기초한 자신의 과학과 초감각적 세계를 연구하는 방법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과학자는 특정한 도구와 방법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는 자신의 도구를 '자연'이 그에게 제공한 것을 변화시켜 만들어 낸다. 초감각적 인식 역시 도구를 사용한다. 그 도구는 인간 그 자신이다. 이 도구 또한 고차적인 연구를 위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인간의 도움 없이, 자연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과 힘을, 더욱 고차적인 역량과 힘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감각적 세계를 연구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 수 있다."

- 신비학 개요(Die Geheimwissenschaft im Umriß)


그러나 슈타이너는 철학자들이 비판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과학, 다시 말해 '경험주의 과학'이 갖고 있는 편협함을 지적했다. 아직도 우리는 '과학' 하면 경험주의 또는 실증주의 과학의 개념을 떠올리는데, 이러한 사조는 자연과학만이 유일하고 진정한 지식의 탐구방식이며, 감각적 관찰에 기반한 경험이 없는 탐구를 사이비 과학이라고 폄하한다. 과학철학에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는 논리실증주의, 반증주의, 협약주의 그리고 상대주의로 이어진다. 베이컨, 로크, 흄의 경험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콩트와 밀의 실증주의가 마흐와 퍼어슨을 거쳐서 발전하여 20세기의 현대 논리학과 결합된 것이 논리실증주의이다. 슐릭, 카르납, 노이라트, 파이글 등 논리실증주의자들 역시 경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을 비판한 포퍼의 반증주의 역시 경험주의를 전제하는데, 이러한 경험주의의 한계는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넘어서는 인과적 힘에 대한 탐구를 방해하고 과학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는 데에 있다. 슈타이너는 바로 이 점을 비판한다.


"우리가 신봉하는 현대과학은 오히려 영적(정신적) 눈을 뜨는 데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과학은 일상의 감각에 통용되는 것만을 '현실(실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현실 인식이 인류에게 많은 편리를 제공했지만, 자신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만을 모든 지식의 기준으로 삼는 과학은 고차적 감각에 이르는 통로를 가로막는 무수한 편견을 낳고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인식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그 '한계'를 무시하는 모든 인식 행위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판단되는 어떤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제 주제를 모른다고 비난한다. 그 사람은 고차적 인식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고차적 인식 능력을 개발하면 우리의 인식 범위에 들어올 수 있다."

- 신지학(Theosophie)


경험주의 또는 실증주의 연구 방법들은 칸트의 사상처럼 인식에 한계를 두기 때문에 인간 영혼의 주관적인 체험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모두 배제시킨다는 게 슈타이너의 통찰이었다. 다시 말해, 근대 과학이 초감각적인 것의 경계 앞에 멈추어서 초감각적 영역을 모두 신비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슈타이너가 보기에 초감각적 힘들의 작용 역시 물리적 자연력과 똑같이 하나의 현상이기에 모두 인식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는 감각적인 현상뿐 아니라 초감각적 현상 또한 인간 내부의 새로운 기관의 발달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내적 수련을 강조했다.


"... 괴테아눔에서 행하는 통찰 방식은 현대 자연과학 연구의 관점을 온전히 긍정하고 그 가운데 올바른 것을 인정한다. 이 방식에서는 단순히 영혼적 통찰을 위해 엄격하게 정해진 훈련을 행함으로써 초감각적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교한 결과를 얻으려 한다. 그런 객관적이고 정밀한 결과라고 인정되는 것은 영혼의 통찰을 통해 얻는 것 가운데 그 영혼적·정신적인 기관이 수학적 문제처럼 명백하게 드러내 보인 결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먼저 그 기관을 과학적으로 오류 없이 통찰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기관을 '정신의 눈(영안)'이라고 한다면, 수학자가 수학 문제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탐구하는 사람도 자신만의 '정신의 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철학·우주론·종교(Philosophie, Kosmologie, Religion)


슈타이너의 인지학, 즉 정신과학에서 다루는 정신세계는 단순히 인간세계만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근원이 되는 비물질적 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감각적인 것에 관한 과학이 인식적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 정신과학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혼과 구별되는 정신(Geist)은 객관적이며 늘 진리가 유지되는 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지상의 모든 현상과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인지학은 자연과학의 각 영역뿐 아니라 의학, 교육, 예술, 건축, 농법, 도덕, 사회, 종교체험 등에서도 활발히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인지학을 신비주의 쪽으로 끌고 가는 흐름과 물질주의 쪽으로 끌고 가는 흐름을 경계하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특히 엄밀하지 않은 방식으로(예를 들어, 지나친 비약과 무리한 연결을 통해) 동양사상이나 무속신앙과 접합하려는 흐름이 강하다. 슈타이너를 신비주의 사상가로 여긴다든지, 한민족이 소위 '이스라엘에 이은 성배의 민족'이라고 슈타이너가 예언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유포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동양사상이나 무속신앙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지학을 진지한 학문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열린 사고와 자유로운 진리 감정"을 갖는 것과 동시에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탐구하려는 자세일 것이다. 슈타이너는 고차적 세계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이르는 감각이 열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정신세계 역시 하나의 '과학'이 필요하며, 정신적인 눈만 열려 있다고 해서 정신세계를 통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눈이 열렸지만 과학이 없는 경우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고, 정신적인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과학에만 매달릴 경우 인지학은 도그마가 될 것이다. 정신적인 눈,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인지학은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신지학』의 서론에 슈타이너는 이렇게 기술한다. "나는 스스로 체험하고 인식한 것만을 말했다. 특히 이런 분야의 글은 자신의 체험만이 표현 대상이 되어야 한다."




참고 문헌

루돌프 슈타이너, 『신지학』, 『철학·우주론·종교』, 『신비학 개요』(미번역)

김훈태, 『교사를 위한 인간학』

신호재, 『정신과학의 철학』

여상훈 번역, 『철학도해사전』, 『신 인간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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