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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트라우테 페이지와 백장미 (1) 본문

인지학

트라우테 페이지와 백장미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3. 13. 01:00

트라우테 페이지와 백장미

 

2019. 2. 15

미국인지학협회, John H. Beck

<being human spring issue 2019>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옮김

 

이 글에는 서평, 저항단체 '백장미'에 대한 회고, 100세 생일을 맞은 트라우테 라프렌츠 페이지 박사에 대한 감사가 포함되어 있다. 페이지 박사는 1990년대에 미국인지학협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자유여, 영원하라! - 트라우테 라프렌츠와 백장미>, 피터 노만 와게 지음, 디마리 베일리 옮김(Cuidano Press, Brooklyn, NY, 2018)

 



니카노르 펄라스의 신간 <인류 최후의 저항>은 인간의 가치와 존재에 대한 엄청난 도전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정말 중요한 것일까? 앞으로 몇 년 동안 어떻게 결판이 날까? 펄라스는 일찍이 <세계화의 형성 Shaping Globalization>(2000)에서 사회적 리더십은 아이디어, 가치, 양심, 신념 등 문화의 영역에서 비롯되며, 이는 개인들의 적극적인 의식 공유(the active sharing of consciousness)를 통해 살아나고 성장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자유여, 영원하라!>는 "인류 최후의 저항"이라는 제목이 붙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피터 노먼 와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절정기에 '문화'가 어떻게 몇몇 젊은이들을 연결하고, 그들이 엄숙하고 치명적인 반대의견을 표명할 수 있도록 지원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양면으로 된 간단한 전단지를 작성하여 배포했는데, 19세기 초 인간 정신을 고양시켰던 '독일 이상주의'라는 민족적 문화 이해의 깊은 코드를 건드린 탓에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정권을 겁에 질리게 했다.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휴머니즘 문화의 빛이 이 젊은이들에게도 비춰졌다. 이들이 '백장미'로 활동하던 몇 달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어간 독일군의 비참한 러시아 침공과 맞물려 있었다.

이 작은 단체에 대해 많은 글이 쓰여졌다. "백장미"는 공식적인 명칭도 아니었다. 그들의 전단지는 1942-43년에 봉기를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히틀러 시대의 심연을 뚫고 후대에 진정한 독일적-인간적 문화 유산을 회상하게 하는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부제인 "트라우테 라프렌츠와 백장미"는 문화 속에 살아 숨쉬는 정신이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타올라 다른 사람에게로 퍼져나가고, 마침내 용감한 행동으로 사상의 결정체를 녹여내는지에 대한 와게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작업과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연결을 만든다.

 

와게는 2019년 5월에 100번째 생일을 맞는 트라우테 라프렌츠, 결혼을 하면서 미국에서는 페이지(Page)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녀로부터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페이지 박사는 75년 전의 이 사건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해 왔으며, 자신이 영웅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어 반갑다. 백장미단의 문화적 뿌리에 대한 이 책에서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트라우테 :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저는 겨우 14살이었지만, 다른 학생들과 저는 새로운 정권이 얼마나 압제적인지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기존 선생님들을 대신해 새로 부임한 선생님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갈 때 "히틀러 만세!"를 외치라고 했지요. ... 저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새 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 그곳에서 훌륭한 새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에르나 스탈(Erna Stahl)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오래도록 지속될 선물...

 

에르나 스탈(1900–1980)은 1928년부터 함부르크의 리히트바르크 학교에서 근무한 개혁적인 교육자였다. 1933년 나치가 제3제국의 교육체계를 완전히 개편했을 때 에르나 스탈은 이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분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일을 하고,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폐해를 줄일 수 있기를 바랐지요."라고 1980년 에르나 스탈의 80세 생일을 맞아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인 칼 클라센이 썼다. "안타깝게도 그분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 적었고, 선생님은 곧 해임되었습니다."

 

트라우테 : 히틀러가 처음 집권했을 때 히틀러를 꿰뚫어보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나라가 혼란에 빠져 폐허가 된 상태였으니까요. 그때 질서를 회복하고 독일을 강하게 만들겠다고 말한 사람이 등장했지요.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어요. ... 저는 제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고 볼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나치가 독일을 점령했을 때 선생님의 나이는 33세였고,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셨죠. 선생님은 독립적인 사고를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적 실천을 통해 자신의 통찰력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습니다. 어쨌든 그분은 저를 깨웠습니다. 저는 이전까지 몽상가였거든요. 그분의 가르침은 제 평생에 걸쳐 지속될 선물이었습니다.

 

전에는 지루해서 학교 가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반항했는데... 에르나 스탈 선생님의 수업에서는 반항할 필요가 없었어요. 학생들 사이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태도가 있었고, 선생님들, 특히 에르나 스탈 선생님의 진정한 참여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예술과 문화의 역사, 일반 역사,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

 

우리 반에 나중에 화가가 된 매우 재능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그는 말을 더듬고 듣는 것도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에 어떤 것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성인이 되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에르나 스탈 선생님과 함께 여행 중 방문했던 성당을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공기 중에 흩날리는 먼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대한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멈칫하며 말했습니다: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열네 살 때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다시는 볼 수 없잖아. 그 나이에 심상은 깊고 지속적인 인상을 남기니까." 그렇게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에르나 스탈 선생님을 만난 것입니다. ...

에르나 스탈 선생님은 발도르프(슈타이너) 교육학에서 영감을 받았고, 발도르프 교육의 일부 요소를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 그녀가 루돌프 슈타이너도 읽었다는 사실은 제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나중에 인지학을 계속 공부한 사람은 저뿐입니다. 사실 저는 학교를 떠난 직후부터 <자유의 철학>을 읽기 시작했어요. 한스[숄]에게 인지학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원치 않았어요!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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