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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동물도 고통 느끼는 존재” 어떤 판사의 양형이유 본문
“동물도 고통 느끼는 존재” 어떤 판사의 양형이유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입력 : 2020.06.03
울산지법 유정우 판사, 동물학대범에 벌금 아닌 이례적 징역형 선고
“학대 방지는 소수자 보호와 연결”…장문의 ‘양형이유’ 적시
“동물 역시 생명체로서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 동물에 대한 생명침해 행위나 학대 행위가 있을 경우 동물 역시 그러한 고통을 느끼면서 소리나 몸짓으로 이를 표현하며 고통을 호소하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학대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생명체에 대한 존중의식이 미약하거나 결여돼 있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동물학대 행위를 단순히 권리의 객체인 물건의 손괴 행위로 인식할 수는 없으며 특히 가학적, 충동적으로 동물을 학대하는 행위는 생명체에 대한 심각한 경시 행위에 해당하므로 이에 대하여는 더욱 엄격히 죄책을 물어야 함이 타당하다.”
울산지방법원의 유정우 판사가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ㄱ씨 판결문의 양형이유에 쓴 내용이다. 지역주택조합 조합장인 ㄱ씨는 시공사에 대한 불만을 품다가 시공사의 현장책임자가 기르는 진돗개를 약 6개월에 걸쳐 학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진돗개의 목줄을 발로 밟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찬 혐의를 받았다. 진돗개는 생후 4~5개월의 강아지였다. 동물보호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동물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거나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금지한다. ㄱ씨는 경찰 조사에서 학대가 아니고 단순한 장난이었다고 진술했다.
검사는 벌금 200만원을 구형했다. 서울 마포구 경의선 숲길에서 고양이 ‘자두’를 죽인 사건과 같이 언론에 보도돼 논란이 된 극히 일부 사건에서 실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있지만, 동물 학대로 기소되는 사람들은 법원에서 통상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유 판사는 지난달 8일 ㄱ씨에게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벌금형보다 중한 징역형을 선택한 것이다.
유 판사는 양형이유에 왜 ㄱ씨의 동물학대에 대해 엄정한 형사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를 썼다. ㄱ씨 판결문은 양형이유만 3000자가 넘는다. 200자 원고지로 15매 분량이다. 형사 판결문, 특히 동물보호법 위반 사건의 판결문에 이렇게 긴 양형이유가 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장 미약한 존재에 대한 폭력
유 판사는 먼저 동물권을 둘러싼 그간 논의를 짚었다. ‘인간의 식량과 의류를 위한 자원’이라는 동물에 대한 인식은 1970년대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동물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호하고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운동이 펼쳐졌다. 1978년엔 모든 동물이 생태계에서 존재할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유네스코 세계동물권리선언이 나왔다. 선언에는 모든 동물의 삶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부당하게 취급되거나 잔인하게 학대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독일은 1990년 동물은 ‘물건’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민법을 개정했다.
한국에서는 1991년 동물보호법이 만들어졌다. 동물보호법 1조는 이 법의 목적을 동물에 대한 학대행위 방지 등을 통해 동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생명 존중 등 국민의 정서 함양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라고 규정한다. 2007년 개정된 동물보호법에서는 동물학대 처벌 수위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높아졌다. 유 판사는 “전 세계 및 우리나라의 동물에 대한 인식 변화와 이를 반영한 입법 내용 및 동물보호법의 목적과 체계 등을 살펴볼 때 이제는 동물의 생명 및 신체의 온전성도 보호법익으로서 소중히 다뤄져야 할 가치에 해당한다”며 “동물의 생명이나 신체를 침해하거나 학대하는 행위의 위법성을 더 이상 간과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유 판사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이 인간을 대상으로는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는 점에 주목했다. 강호순, 유영철 등 연쇄살인범들은 개를 죽이는 것에서 범행이 시작됐다. 생명체에 대한 존중의식이 없는 사람은 동물 학대를 함으로써 그러한 인식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인식은 언제든 사람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유 판사는 “동물학대 행위를 방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나 생태적으로 가장 미약한 존재에 대한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 판사는 “최소한 우리 곁에 살고 있는 개,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일원에 포함시킨다고 가정하면 반려동물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일 것”이라며 “동물학대 행위는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존재에 대한 혐오 내지 차별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동물학대의 위법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것은 사회가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나 차별적·폭력적 행동을 간과하거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고 유 판사는 지적했다. 유 판사는 “동물 학대를 막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생명을 가지고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라는 관점과 연결되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단순히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존중과 보호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분풀이로 동물 학대하는 인간
사람들은 왜 동물 학대를 할까. 최근 법원에서 나온 판결 중 동물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사례를 살펴봤다. 피고인들이 동물을 죽인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다른 인간에 대한 분노를 동물에게 푸는 형태다. 분풀이, 화풀이로 동물을 학대하는 게 가장 대표적이다. ㄴ씨는 평소 고양이를 좋아하는 딸이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고 어버이날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가 나 길고양이 네 마리를 나무 몽둥이로 내리쳐 죽게 해 재판에 넘겨졌다. ㄴ씨에게는 벌금 500만원이 내려졌다.
ㄷ씨는 다른 남자와 연락한다는 이유로 화가 나 지인이 키우던 말티즈 강아지를 벽에 던져 죽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아내가 파산·회생 등을 신청해 가정경제 상황이 어려운데도 개 두 마리에게 밥을 주며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 그 중 말티즈 한 마리를 8층 베란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던진 ㄹ씨 사건도 있다. ㅁ씨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염소 사육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을 받자 염소를 망치로 내리찍어 죽인 다음 지적한 사람의 집 앞에 염소 사체를 갖다 놓은 혐의로 기소됐다.
두 번째는 동물이 시끄럽다거나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죽인 경우이다. ㅂ씨는 이웃의 개가 시끄럽게 짖는다는 이유로 도끼로 개를 내리쳐 죽였다. 벌금 100만원이었다. ㅅ씨는 13년간 기르던 개가 노쇠해 눈이 보이지 않자 치료를 해주고 싶었으나 병원비를 구하지 못했다. 아픈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개를 창밖으로 집어던져 1층 화단에 떨어지게 해 죽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세 번째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경우다. 술에 취해 아무런 이유 없이 남의 요크셔테리어 강아지의 목을 수건으로 감아 조르는 방법으로 죽인 혐의로 기소된 ㅇ씨는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ㅈ씨는 고양이 집에 목줄을 묶어 기르던 고양이의 머리를 별다른 이유 없이 벽돌로 내리찍어 죽였다. ㅈ씨는 여러 차례 폭력 범죄로 처벌 받은 상태에서 또 이 같은 범행을 저질러 징역 10월의 실형을 받았다. 그 밖에 먹기 위해서, 먹는 사람에게 팔기 위해서 등의 사유로 동물을 죽인 사례가 있었다.
동물은 한국에선 법적으로 ‘물건’ 취급된다. 2017년 물건을 정의하는 규정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라는 내용을 추가하는 취지의 민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6031400001&code=940100#csidxc2264cc1d4a516e9d33651993ffb2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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