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 교육 : 아동발달이 교육과정을 결정한다 - 볼프강 자스만스하우젠 본문
발도르프 교육 : 아동발달이 교육과정을 결정한다
- 취학연령에서 사춘기 전까지의 초등교육에 대한 고찰
볼프강 자스만스하우젠 박사
Dr. Saβmannshausen/Dortmund
도르트문트 발도르프 사범대학 교수
김경숙 譯 주한 독일 문화원
1996.9.16. 독일문화원에서 발표
1919년 루돌프 슈타이너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처음으로 발도르프학교를 세웠을 때 새로운 학교의 설립과 관련한 논의에서 항상 강조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학교 및 교육의 기본 원리로서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가 온전히 자유로운 정신의 삶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치고 교육되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성장 과정 중에 있는 인간(werdender Mensch)에 대한 인식과 각 개개인의 소질(천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가르침과 수업의 기본 바탕은 참된 인간학을 근거로 해야 한다. 기존의 사회질서를 위하여 인간은 무엇을 알아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를 묻지 말고 그 인간에게 어떤 소질이 있으며 무엇이 그 속에서 개발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자라나는 세대로부터 항상새로운 힘이 사회질서에 공급될 수 있고 또 이 질서 속으로 들어오는 온전한 인간 (全人, Vollmensch)이 자신으로부터 만들어 내는 것이 그 질서 속에 살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 질서가 자라나는 세대로부터 만들고자 하는 것은 자라나는 세대로부터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기본 원칙은 두 가지 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첫째는 학교 조직과 운영의 독자성이다.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운영자들(교육자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업무 과제를 자신의 책임 하에 스스로 결정하며 그에 대한 평가(Controlling과 evaluation) 역시 자율적으로 행한다. 이 원칙은 오늘날 비록 교육의 자율화와 학교 제도에 대한 논의에서는 언급되고 있는 바이나 현실에서는 거의 전세계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장학(奬學)과 학교 제도라는 명목 하에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사항이다.
둘째는 교육 그 자체이다. 학교교육의 방법론과 교수법은 성장하는 작은 인간(werdender junger Mensch)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며 어떤 다른 특정한 주의 주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을 잠깐 살펴보면, 학생 내면에 근거하지 않는 수업 목표는 아동에게는 낯선 것에 대한 적응을 의미한다. 인간관(Menschenbild)이라는 의미에서 말하자면 인간다움(Menschsein)의 성취라는 것을 인간의 내면에서가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진 목적에 둔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인간을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자유를 향한 기본자세를 갖춘 존재가 아니라 그의 주변에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자기 스스로부터만 구속을 받는, 즉 자유로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자 하는 인간은 이 같은 능력을 자신 내면에서 스스로 발견해야만 한다. 이 인간은 이러한 신체적이고 영혼적이며 정신적인 힘을 발전시켜서 이 힘들이 자아의 도구가 될 때 정체성을 가진 유일무이한 한 인간으로서 시대와 세계의 요청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능력은 매우 흥미로운 내밀한 변화와 발전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자아가 자신의 존재를 외부로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빛을 발하고자 한다면, 주어진 것을 통해서 존경과 관심을 체험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동 발달을 살펴보면 바로 취학연령에서 사춘기 전까지의 초등학교 시기가 바로 이러한 존경과 인간적인 관심을 자신의 삶 속에서 깊숙이 체험하는 시기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내면으로부터의 관계는 이 세상이 존경 받는 인물을 통하여 소개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아동에게 세상은 흥미로운 곳이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아동에 의해 존경을 받고 평가 받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아동의 관심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살펴보자.
세상의 내용, 즉 자연, 문화, 종교, 학문 등등을 아동이 감성(Gefuhl, 느낌)을 통해서 파악하게 될 때, 즉 아동은 감정적인 이끌림에 따라 또는 반감으로 거부하면서 주변 환경과 만나게 되는데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이 같은 세상에 대한 경험과 세상과의 관계는 아동의 시각에서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체험함으로써 일어나는 미적 감성 판단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자에게 이 말은 인간은 세상을 자신의 감성(느낌)으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또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인간은 모든 무상한 것에서 단지 인간 자신과 동일한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동일한 것은 그것을 공감하는 영혼에게만 현존한다. 그러니까 세상은 인간의 상(像, Bild)으로 파악되며 인간이 이 상을 자신의 감성에 맞게 인간의 것으로 만들어 나갈 때 인간은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 역주: 인간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 소우주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의 본질과 동일한 것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우주는 인간의 모습으로 파악된다는 의미이다.
교육자에게 수업을 위한 중요한 도구는 자신의 느낌(人象)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그의 언어이다. 어느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 간의 일체감(Verbundenheit, 내면적인 연결 관계) 속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학생들에게 표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럼으로써 학생과 교사간에는 매우 긴밀한 유대감이 생겨나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간의 이 관계는 긴 시간 동안 유지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담임교사(Klassenlehrer)는 초기 8학년까지의 인물중심학습(personenorientiertes Lernen)기간 동안 학생들과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어린이와 성인간의 학습 관계의 기초는 지식을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학습 방식에 있다. 바로 이와 같이 발도르프 학교의 수업은 아동이 갖고 있는 특별한 장기적인 학습 과정을 전제로 한다.
학습행위 중 관찰하는 것이 중심이 되고 있는 수업, 소위 말하는 모든 학문적인 과목(wissenschaftliche Facher), 즉 실질적인 연습이 중심이 되는 예술 과목과 외국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은 주기수업방식(Epochenprinzip)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 말은 한 수업의 내용을 장기적으로 그러니까 3,4주 동안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그 후에 이 수업은 중단되고 기억 속에서 사라지도록 한다.
망각은 의식적으로 계획해 놓은 어린이 학습 행동의 일부분이다. 음식을 몸 속에 섭취할 때와 같이 음식은 우리의 많은 감각 기관들을 자극하고 개발시킨다. 소화와 신진대사의 과정은 의식의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몸의 피와 살을 만드는 개개인 자기화를 의미한다.
수업을 통한 영혼의 양식도 이와 유사하다. 소화를 위한 망각의 시간은 배운 내용의 자기화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즉 이 배운 내용은 내면화한 능력으로 성숙되며 변형을 위한 출발점, 즉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동이 배우고 익히는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감성의 기초(직관적 판단의 기초)를 형성하기 위한 출발점을 만들게 된다.
취학 연령과 사춘기 사이의 시기는 발도르프 교육적 의미에서 주관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시기인데 그 이유는 우선 장(場, Spjare)에 있는데 수업은 감성(직관)의 장에서 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또 아동과 교사간의 관계가 영적이며 감성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같은 관계들을 사무적으로 객관화하려는 경향들, 즉 중앙에 의해서 결정되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교과과정이나 수업 목표들 또는 외적인 조건에 따라 자격증을 받는 교사들이 누구로도 대치될 수 있는 무명(無名)의 기능자가 되어 버리는 식의 경향들은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사라지고 그 대신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관과 자신만이 개인적인 감성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 교육자가 중심이 되고 있다.
인식론적인 면에서 즉 철학으로 볼 때 이 말은 세상을 사는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세상에 대한 체험을 통한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라는 것이다. 이는 루돌프 슈타이너가 말한 인지학(人智學)을 의미하는 말로서 세상에 대한 정의 내려진 지식이 아닌 인간의 감성을 통한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 즉 말하자면 소화(消化)라는 의미의 고요의 장에서 나오는 지혜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내용이 아닌 방법이 문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루돌프 슈타이너가 발도르프 학교를 세우면서 여러 번 강조한 것은 발도르프 학교가 내용적으로 세계관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방법론을 가르치는 학교라고 하는 것이다.
취학 연령에서 사춘기 사이의 담임교사 학년들의 학업 시기를 살펴보자.
발달심리학적으로 취학연령이란 어린이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본능적 직관적 감각의 공간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 말은 예를 들면 어린이는 이제 기억을 의식을 가지고 확실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5세의 어린이는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오늘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동화를 읽어 주었는지 하는 질문에 자신이 동화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빛내며 아니오라고 답을 할 수 있다. 7세의 어린이는 그러나 영혼의 내면에서 이 질문에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동시에 이를 통해서 주변 세계를 알고자 하는 배움의 의욕, 예를 들면 문화적인 기술들, 읽기, 쓰기, 계산하기 등을 배우려고 하게 된다. 이때의 교육의 교수법이나 방법론의 과제는 배움의 의욕을 고취시킴으로써 위에서 언급한 세상에 대한 감성(직관력)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예를 들면 글은 추상적이며 인위적인 표기 체제로서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단순히 배워서 익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학습은 좁은 의미에서 교육적인 가치가 없다. 그러나 학생들이 문자를 감각적인 형태에서 추상적인 형태로 유기적으로 발전시켜 갈 수 있도록 예술적으로 지도한다면 어린이는 내면적으로 수련의 과정 내지는 삶의 과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쓰기라는 일상적인 삶의 행위가 갖고 있는 진정한 내면적 의미가 체험되고 이를 통해서 어린이의 감성 속에는 배운 것에 대한 내면적인 일체감(一體感, innere Verbindung 역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참된 이해)이 생겨나게 된다.
수를 익히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에 대한 비유적인 이해는 수학의 기초로서 이를 위해서는 수의 개념, 수의 내적인 의미에 대한 느낌을 키워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교사는 어린이에게 창조의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모든 수의 출발점이며 모든 것이 내재한 모든 변화의 파생점으로서 단일의 개념을 가르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린이는 1이라는 숫자를 이해할 때 1이라는 수는 변화를 통해 새로운 숫자들이 파생되어 나오는 자연수의 순서가 만들어지는 가장 큰 숫자로 배운다. 그러니까 2(Zwei)라는 숫자는 의혹(Zweifel)이나 이원론(Zweiheit), 불화(Zwietracht)와 같은 단어의 의미로 또 대립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밤과 낮, 좌우 등등을 표현하는데 쓰이는 숫자임을 배우게 된다.
어린이는 실질적 체험을 통해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문화의 원리와 문화의 기본 기술을 배운다. 동시에 자신의 영혼 속에서 체험되어지는 것이 이 세상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 감성 내지는 직관력을 배운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어린이의 체험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며 어린이의 세상은 서로 하나로 연결된다.
미취학 아동들은 행위를 통해서, 감각 기관을 통해서 주변 환경과 연결되어 있으나 초기 초등학년에서는 이 연결이 영혼의 내면에서 체험된 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위기는 9/10살 때 뚜렷이 나타난다. 감성(직관)으로 체험된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어린이는 그 이유를 묻게 된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내밀한 불안의 표시이며 생존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인 것이다. 예를 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문 뒤에 또는 침대 밑에 낯선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며 또는 자신이 부모의 친자식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뒤바뀐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신이 어딘가 다른 곳에 속하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질문을 갖게 된다. 세계관 내지는 자아관 전체가 하나의 도약을 경험하게 된다.
교육자는 이시기에 있는 아동에게 이제까지 통일되어 있던 세계의 해체의 의미와 뜻을 삶의 현상들을 통해서 제시함으로써 이 같은 정신적 육체적 변화에 대한 해답을 준다. 이 같은 수업의 예를 들자면 분수를 배우는 것이다. 분수에서는 자연수의 고통스러운 파괴가 일어나며 수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표현해서 이것은 어린이의 자아의식 속에서 단일했던 세상이 해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해체 속에는 보다 확대된 세계관에 대한 열쇠가 놓여 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이어서 배우게 되는 식물과 동물학이다. 식물은 인간에 대립되는 객관성으로서 대지의 기후와 지리학적인 상황에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고 있다. 동물은 각각의 종에 따른 특성에 따라 각기 하나의 능력을 최상의 상태로 발전시켜서 전체적으로 인간 발달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연학은 모든 것이 통합되고 내면에는 자유를 간직한 채 모든 차이를 조화롭고 온전한 하나로 발전시키고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그 최고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형식적인 분류 및 체계화는 아동에게는 낯선 것으로 세상과의 대립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는 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체험, 세상 속에서 인간과 동질적인 것을 발견하는 체험이 교육의 목표이다. 결국 아동이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며 이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현재와 미래에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장으로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세계 시민이고자 하는 감성이 배움의 목표(Lernziel)이며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의식을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동기를 더 예를 들자면 12세가 되면 새로운 불안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 불안은 좁은 의미에서 사춘기(약 14세)때 최고에 달하게 된다. 이 불안은 특히 아동의 신체적 외양과 움직임에서 읽을 수 있다. 신체의 비례가 변하게 되고 아동은 자신의 신체의 움직임을 새로이 익혀야만 한다. 아동의 신체의 역학은 새로이 변화하게 되며 아동은 이 새로운 상황에 적절한 당위성을 구체적으로 습득해야만 한다.
성장 중에 있는 인간의 발달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움직임은 물리, 화학 또는 역사 수업에서 외적으로 다루어진다. 인과관계, 역학적인 당위성을 알게 되고 동시에 인간에게 이 같은 체험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그 과정을 배우게 된다. 이 같은 수업을 통해서 아동은 각자 내면적인 발달을 위한 이해를 얻게 된다.
이같은 위기는 영적인 영역에서는 특히 사춘기 때 대략 14세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주변 세계와의 공감 체험은 사라지고 영혼의 문은 잠시 동안 닫혀지게 된다. 청소년이 된 아동은 내면적으로 주변환경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눈에 띄게 개인화하며 자신만의 관심사가 뚜렷하게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아동들은 이제 세상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영혼을 가진 그 속에서 공감을 느끼고 그 체험에 동참하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생각을 분명하게 인식하며 이를 자신의 행동의 기본으로 삼는 성인을 파트너로 찾게 된다. 성인과의 만남에서 청소년들이 갖게 되는 동경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함으로써 삶의 다양한 영역을 이해하며 자신의 내면적인 인식의 과정 속에서 체험한 진실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아동기가 끝날 때 감성을 통하여 의미를 경험하는 세상도 문을 닫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통한 자신만의 판단력으로 이 세상의 의미들을 새로이 경험하는 것이다.
아동은 이제 스스로 인물 중심의 학습 시기의 담임교사가 더 이상 자신의 파트너가 아님을 인식한다. 이제는 위에서 언급한 바 대로 각 분야에 따른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다.
발도르프 실습 교육의 특성을 언급하자면 1학년부터 배우게 되어 있는 외국어 수업에 대한 생각을 들 수 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2개의 외국어를 배우게 되어 있다. 이유는 조기교육을 통해서 중요한 외국어를 많이 오래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모든 언어는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언어의 구조를 예를 들자면 7가지의 격(格)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4가지 격만이 존재하는 언어만을 알고 있는 사람과는 사물에 대해서 전혀 다른, 내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알렉산더 훔볼트가 말한 언어의 세계관이란 개념은 바로 언어가 가진 이 같은 면을 아주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어린이가 나중에 4학년에 가서 언어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우기 전에 첫 3학년까지 놀이와 시와 노래를 통해서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교육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동과 학급, 교사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어린이는 성인의 도움과 지도를 필요로 한다. 교육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관계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동일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은 자명하고 의미 있는 세계관으로 보호되어 있음을 느낄 때 성인과 아동과의 학습관계는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해도 직접적인 관계(unmittelbare Beziehung)가 된다. 성인은 교사로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세계관과 도덕관, 규범 그리고 사고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이 가치관과 일체가 되어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인성으로 교사 내지는 교육자로서의 나름의 철학과 행동 양식을 만들어 나간다. 그 내용은 현대인의 의식으로는 낯선 것일지 모른다. 마치 중세 시대나 고대 시대의 학교 학습이 오늘날에는 매우 낯선 것이듯이. 그러나 교육자와 아동간의 상호관계는 이와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자명하고도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세계관은 오늘날 더 이상 교육자의 영혼에서 나오는 원칙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육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 옳은 것은 무엇이며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내면의 질문이다. 여기에 외부로부터의 낯선 교육의 목표와 이해가 침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직업 현장으로부터의 요구 사항들, 직업을 위한 기초 교육이 규격화되고 계층화된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요구함으로써 인성과 무관한 능력 위주의 사고방식이 교육의 풍토를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의 학교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거나 반 정도밖에는 없는 교육자들을 수용함으로써 살아 있는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의 교사의 가치가 소홀히 되고 교사의 정체성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교육이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의미에서 자신의 일의 동기를 아동의 시각에서 찾는 교육자는 자아 발견에 대한 인식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관을 실천하는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럼으로써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통해서 자아 발견과 자신의 인식 내지는 자아 교육의 과정을 밟게 되며 그 판단 기준은 오로지 자신에게서만 나오게 된다.
[출처 : https://m.blog.daum.net/cleanmountain/10135132?category=8935]
'발도르프교육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네켄 선생님의 인간학 강의 (1) (0) | 2022.11.05 |
---|---|
모방과 심심함의 가치 - 베르너 쿠푸스 (0) | 2022.06.21 |
[강의노트] 코로나 팬데믹, 교사와 학생은 어떻게 만나야 할까? (2) (0) | 2021.08.30 |
[강의노트] 코로나 팬데믹, 교사와 학생은 어떻게 만나야 할까? (1) (0) | 2021.08.26 |
발도르프교육학을 세운 원동력의 빛 속에서 들여다본 교사회의 과제 (4) (0) | 2021.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