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역사와 회복적 정의] 광주 민간인학살 증언한 최영신 선생의 강연 본문
최영신입니다.
나는 지난 광주평화기행에서 이재영 원장을 만나 회복적 정의라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이 시대에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이번 강연 요청을 받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야기는 누군가 들어야 하고 공감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용기를 냈습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 투입된 군인은 어림잡아 약1만 명입니다. 조심스럽지만 타의로 투입된 군인들도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23명의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을 입은 군인도 많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거나 알코올중독 등으로 어려운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민 끝에 이번 강연을 수락한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원통하게 죽은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원한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입니다. 당시 군인이었다고 모든 상황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는 주남마을 학살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준비한 자료는 국회 속기록도 참고했습니다. 이 시간에 제가 이야기 하는 내용을 통해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고 이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공감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근 저는 가족도 모르게 광주 MBC 공익광고도 찍었습니다. 광주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는 실종자문제입니다. 당시 신고 된 실종자는 380여명에 달합니다. 83명은 까다로운 인후보증과 DNA 검사를 통해 실종자로 인정되었지만 아직도 수백 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습니다. 실종자 가족은 자식이 행여 돌아올까 지금도 대문을 열어놓고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어르신들이 한을 품고 돌아 가셨고 생존해있는 부모님들은 이미 80세가 넘은 고령입니다. 국회에서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지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조사위는 하루 빨리 실종자들의 생존여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산 자들의 의무입니다.
개인이야기
나는 1975년 7월 논산훈련소에 일반병으로 입대했으나 가려움증으로 의무대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파견 나온 공수부대의 베레모의 멋진 모습에 끌려 파견 나온 모병관을 통해 공수부대에 지원했고, 4년 6개월을 계약했지만 1979년 10월 26 사건이 일어나 4개월을 더 복무하고 5월 28일에 전역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정해진 날짜에 전역만 했어도 광주와 인연이 없었을 것입니다.
광주 투입과 역할
1980년 5월 28일 전역하는 대기병들은 부대에서 진행된 진압훈련에 열외 되어 텃밭에서 고구마를 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5월 17일 저녁 갑자기 비상이 걸려 어디론가 실려 간 곳이 전남대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광주는 태어나서 처음 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진압훈련을 했는데 저는 출동병력과 달리 운동장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18일 오전 경 군용트럭에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차례에 걸쳐 실려 왔고 저는 그 사람들이 꼼짝하지 못하도록 얼차려를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커튼이 쳐진 커다란 버스가 와서 잡혀온 시민들을 계속해서 어디론가 실어갔습니다. 당시 기억으로는 하나같이 머리에 피를 흘렸고 어떤 젊은이는 머리가 깨지고 실신하여 같이 잡혀 온 청년의 도움으로 응급처치를 한 일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몇 명은 저의 직권으로 둑방을 통해 훈방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후 조선대학교로 옮겨서는 트럭에 식사를 싣고 대대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금남로에 식사배달을 하는 선임탑승의 역할도 했습니다. 조선대학교에 주둔할 때는 대대장 옆에서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시내에 배치된 공수부대 움직임을 무전기 소리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린다." "북한무장공비가 출몰했다."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시위대가 조선대학교를 에워싸고 밤낮으로 데모를 할 때 시위를 이끄는 여학생의 소리가 카랑카랑한 북한 말씨로 들려 내심 불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주남마을 학살사건
이제 본격적으로 주남마을 학살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살을 명령한 사람도, 총을 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광주청문회에서 2명의 젊은이를 후송했다는 11여단 62대대장의 증언은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5월 21일 19:30경 조선대학교에 주둔한 공수부대 전원은 무등산 줄기를 타고 군사용어로 도피 및 탈출을 해서 다음날 새벽 2시 주남마을 뒷산 7부 능선에 도착했습니다. 부대에 내려진 명령은 은폐 엄폐된 장소에서 대기 상태로 잠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4일 새벽으로 기억합니다. 아래 논바닥에서 소리가 나서 몇 명과 함께 내려갔습니다. 리어카에 교련복을 입은 두 명이 피를 흘리며 포개져 누워있었고 그 옆에는 여고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손에 총상을 입고 붕대를 감은 채 손을 올린 채 서 있었습니다.
11여단의 지역 대장으로 보이는 소령이 총을 쐈는지 여부를 취조를 하고 소지품 검사를 하는데 칼빈 소총의 실탄이 나오자 소령이 "없애버려."라고 짜증스럽게 명령을 했고 서너 명의 병사들이 리어카를 끌고 50미터를 끌고 내려갔는데 얼마 후 총소리가 나서 그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사들에게 물어보니 총으로 사살하고 암매장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날 오전 철수명령이 내려와 하산하면서 총격이 있었던 자리를 봤는데 핏자국이 흥건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내려왔습니다.
이후 청문회에서 알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23일 주남마을 진입로에서 18명이 탄 미니버스를 계엄군이 집중사격 하여 15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부상당한 2명의 남자와 여고생 1명을 11여단의 병사들이 우리가 주둔한 주남마을 뒷산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님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 직후 응급차가 오고 간호사가 응급처치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홍금숙씨는 병원으로 데려다 주길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부상자들과 함께 여단 본부가 있었던 주남마을 뒷산으로 왔던 것입니다.
주남마을학살사건은 저항할 수 없는 부상자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젊은이를 명령에 의해 사살하여 암매장한 사건입니다. 전쟁 중에도 부상당한 사람은 병원으로 보내는데…
나는 지난 5월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홍금숙씨를 만났습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반가웠습니다. 저는 지휘관도 당사자도 아닌 목격자에 불과하지만 홍금숙씨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부상당한 손을 잡고 위로해드렸습니다.
홍금숙씨는 오히려 저를 걱정하며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양심선언 이후 저에게 가해진 온갖 협박과 조롱, 여러 정보기관에서 사찰하는 등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증언 동기
나는 군에서 전역하고 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했습니다. 매년 5월이 되면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오월제가 열리는데 광주와 관련된 많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군인으로 광주에 투입된 나 자신이 죄스럽고 말할 수 없는 비굴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대학의 교직원으로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면서 야간에는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당시 광주청문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원생 중 평민당 인권위원으로 계시는 분께 무심결에 광주문제를 이야기 한 것이 커졌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아내와 어머님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청문회를 보면서 지휘관들이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군인인줄 알았으면 쏘지 않았다."는 말에 놀라고 화가 나서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기로 한 결심을 아내가 힘들어하며 말렸습니다. "왜 당신이어야 하는가? 누군가 얘기할 것이다. 왜 당신이 총대를 메어야하나?" 그러나 저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둘 각오로 당시 평화민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양심선언을 하고 광주특위에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남마을민간인학살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는데 특전사전투상보일지 어디에도 없는 사건입니다. 당시 사살을 명령한 소령과 총을 쏜 하사의 소식을 들었는데 하사는 사망했고 소령은 아직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증언이후
증언 후 당시 군 동료들이 뒤이어 증언을 할 줄 알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없습니다. 증언 이후 선후배들을 만났지만 광주518은 금기사항으로 일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의 입장을 지지하는 동기와 후배들도 있지만 어떨 때는 저에게 왜 그랬냐며 따지기도 합니다. 저는 군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진압군에 불과합니다.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이죠.
양심선언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지만 개인적으로는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는 5살 난 아이와 친척집으로 가고 저는 지방의 공사현장을 전전하며 방랑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비어 있는 부천의 집에 무장한 군인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어느 부대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에 잡혔다면 죽을 수도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정보기관에서 사찰을 하는 등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김대중 총재를 만나 신변보호 차원에서 입당을 권유받아 무급에 가까운 정당생활을 10여년, 유급인 정책연구위원으로 8년을 일했습니다. 사실 가족들에게 해준 것이 없어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당시 엄마 뱃속에 있었던 막내가 장성해서 얼마 전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 누구도 양심고백하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의 원통함과 남은 자들의 슬픔도 위로받지 못하고 여전히 조롱당했을지도 모르죠. 용기내서 말해준 그 누군가가 아버지라서 자랑스럽습니다.”
북한군 개입설과 청문회 당시 속기록
만약 북한군 약600명이 당시 광주에 투입된 것이 사실이라면 지휘관들은 훈장을 반납하고 구속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미국 CIA도 북한군 개입이 없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당시의 광주 상황은 1만여 명이나 투입되어 지역 전체를 감싸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두차례나 군인들 간 오인사격으로 사망자도 발생한 상황이었습니다. 지만원씨의 지속적인 공비 주장은 허위로 밝혀지고 결국 법적 책임까지 물게 되지 않았습니까?
북한군의 개입설이 왜 나왔을까요? 19일 3공수여단에 의한 유혈진압이 시작되고 20일부터 대치하던 상황에 21일 도청 앞에서는 장갑차에 깔려 군인들이 사망하고, 54명의 시민이 사망했습니다. 21일 밤부터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으로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오인사격까지 벌어져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이 책임을 피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북한군 개입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맺는 말
올해 처음 5.18단체의 초청으로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회복적정의라는 생소한 개념도 접했습니다. 이제 국가공권력에 의한 국민의 희생을 과감하게 밝혀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보상할 것은 보상해야 합니다. 제주4.3 그리고 여순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더 적극 나서 진상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일부 정치인들과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에 의해 광주정신이 폄훼되고 조롱받고 있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수많은 희생자가 있는데 가해자가 없습니다. 총을 쏘라고 지시한 사람도 없고, 자위권을 명령한 사람도 없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홍금숙씨를 비롯한 광주의 피해자들은 지금이라도 과거를 털어놓고 용서를 빈다면 다 용서해주겠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광주정신을 공유하고 자발적으로 망월동에 와서 참배할 수 있길 바랍니다. 반쪽 5.18은 더 이상 안 됩니다.
1980년 5월 당시 모든 군대는 계엄 하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에 투입된 군인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마주했다고 생각합니다. 잊고 싶고 감추고 싶더라도 보고 들은 것을 이제라도 밝혀야 합니다. 증언을 듣는 국민들은 공감할 것이고 용기에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당사자들의 증언만큼 힘이 있는 것이 또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안전과 미래에 대한 염려 없이 소상하게 진상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와 국가 차원에서 보상을 마련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공감하며 경청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년 10월 14일
최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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