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회복적 정의는 범죄자 처벌에 반대할까? 본문
회복적 정의는 범죄자 처벌에 반대할까?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몬스터 주식회사>라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산해경>에 나올 법한 괴물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들은 비밀의 문을 통해 잠자는 인간 아이들에게 나타난다. 왜? 아이들을 놀래켜 아이들이 지르는 비명을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괴물 직원들은 무서운 표정을 짓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노력한다. 몬스터 주식회사는 이런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다. 그런데 우연히 비밀의 문을 통해 따라 들어온 어린아이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아이가 즐거워서 내는 웃음소리가 비명소리보다 수천, 수만 배의 에너지를 갖는 것이었다. 이후 회사는 아이들을 잘 웃길 수 있는 직원을 중용한다.
한국 사회는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일까? 아이들에게 기쁨의 환경을 주고자 할까, 공포의 환경을 주고자 할까? 가정의 달에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일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민식이법’(도로교통법 개정안)은 아이들이 다니는 스쿨존에서 과속으로 사고를 내면 과중처벌하는 법이다. 이것은 스쿨존에서 아이를 잃은 유가족 부모가 처절하게 싸워서 얻어낸 성과다. 민식이의 엄마 아빠는 법 통과를 탐탁치 않아 하는 보수 정치인들에게 울면서 무릎까지 꿇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 법에 대한 비난 여론이 여전히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운전자가 억울하다는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아이도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철저하게 어른 운전자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심지어는 이 법을 조롱하는 게임까지 출시되었다. 어린아이의 특성을 이해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얼마 전 울산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남교사가 속옷을 빨고 사진을 찍어 보내라는 과제를 내주었다가 큰 이슈가 되었다. 1학년 아이에게 자기 속옷 빨기라는 숙제를 내주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 교사의 처신에 있다. 인터넷 상에 ‘섹시 팬티’라는 이름의 동영상을 만들어 올리고, 여자아이에게 ‘울 공주님 분홍색 속옷 이뻐요’, ‘이쁜 잠옷, 이쁜 속옷(?) 부끄부끄’와 같은 댓글을 달았다. 또 온라인 개학과 함께 학급 밴드에서 인사를 하면서 학생들 사진에 ‘매력적이고 섹시한 XX’, ‘우리 반에 미인이 많다’는 등의 글도 올렸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 교사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짐승남’이라고 칭했던 그는 피해의식에 빠져 학부모와 대중을 비난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문화가 남성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극우사이트인 일베에서 벌어지는 여성혐오나 여아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이런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이 와닿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더 큰 범죄의 형태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다크웹에서 아동 관련 성적 동영상을 유포한 손정우라든지, 여성 청소년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범죄를 저지른 n번방 사태는 우리 사회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말 심각한 것은 이러한 범죄를 주도한 남성들의 나이가 20대 초반, 심지어 10대도 다수라는 점이다. 대체 우리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젊은 범죄자들은 나이 든 범죄자들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장자연 씨가 죽음으로 고발하려 했지만 결국 제대로 처벌할 수 없었던 재벌, 언론, 검찰 등 권력층의 성적 탐욕, 여성을 성적 도구로 이용하여 영상물까지 만들었지만 무죄로 풀려난 김학의 같은 사례는 젊은 세대에게 어떤 메시지가 되었을까? 분명히 사회적 정의에 대해 코웃음을 치게 하였을 것이다. 이런 도덕적 타락이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산의 형제복지원 사례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한국 사회는 오래 전부터 여성, 어린이 같은 약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문화가 잔존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을 납치해 강간하고 강제노동을 시키는 데도 국가는 관심이 없었다. 수 백명의 아이들이 학대당했고 살해당했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특별법을 제정해달라고 노숙투쟁을 이어감에도 보수정당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언론과 검찰, 법원에서도 이와 같은 성범죄나 아동 대상 범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라면 종신형을 받을 게 분명한 손정우가 받은 형량은 고작 1년 6개월이었다. 다행히 그는 형기를 마쳤음에도 미국으로 송환이 결정되어 다시 재판을 받게 된다. 아마 그는 살아 생전 한국땅을 다시 밟기가 어려울 것이다. 성범죄, 특히 아동 대상 성범죄를 막기 위해 시급한 것은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의제강간 연령을 높이고 랜덤채팅앱을 규제해야 한다. 그리고 성범죄자의 경우 치료감호제도를 신설하여 치료가 되지 않은 자는 사회에 나올 수 없도록 막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 전반적으로 아동 대상 범죄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는 게 분명하다. 구조적으로 더 이상 가부장적 남성의 기득권은 존립되기 어렵다. 오로지 남자이기 때문에 누렸던 권력이 사라지면서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젊은 세대의 남성들일 것이다. 이제는 취업에서도 결혼 생활에서도 특권을 기대하기 어렵다. 변화된 현실을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면 억울함과 분노심이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빼앗겼다고 여길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숨겨져온 것뿐이다. 차라리 죄책감을 갖는 게 건강한 감정이 아닐까?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혐오의 문화는 시대착오적인 권력 추구라고밖에 부를 수 없겠다.
혐오 문화를 제어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교육과 사법일 것이다. 회복적 사법뿐 아니라 회복적 교육은 앞으로도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것이다. 이것은 문화 자체, 패러다임 자체가 변화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회복적 정의가 범죄자들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반대하는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은 죄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회복적 정의 역시 정의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상조사와 재발방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범죄자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느냐이다. 물론 대가의 내용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문제이다. 왜냐면 범죄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피해자와 공동체의 피해를 회복하는 데 보탬이 될 만한 것일수록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범죄는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 전체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드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피해자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다. 민식이의 부모가 그렇듯 세월호 유가족 역시 비슷한 아픔을 다시는 누구도 겪지 않도록 제도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이러한 피해자들의 아픔을 귀 담아 들어야 하며,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범죄자뿐 아니라 국가 역시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범죄자가 져야 할 책임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범죄자의 자서전을 써줄 게 아니라 이런 범죄가 벌어지게 된 사회구조적 원인을 밝혀야 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힘은 약자와 피해자들의 공포에 가득찬 절규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약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만연한 사회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은 그 부조리를 끄집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간, 특히 여성과 아동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존중과 연대가 최우선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피해자의 눈,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진정으로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과연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성인지 감수성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그 교사 역시 자의식 과잉으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살았지, 단 한번도 아이들 입장에서 느끼고 생각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2020.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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