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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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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영국 회복적 정의 연수 후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4. 3. 13:09

영국 회복적 정의 연수 후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그리운 P 선생님에게

 

 

영국에 다녀오면 한번 뵙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요.

요즘 인사법이 바뀌어서 “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한번 보자”가 인사말이라면서요?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거짓말처럼 이 사태가 지나가고 소소한 일상의 기쁨과 지루함을 다시 맛볼 수 있기를요.

제가 사는 서산은 다행히 별 탈이 없습니다.

선생님 사시는 그곳도 확진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진정 국면으로 들어가길 빌어요.

 

‘흐린 하늘 아래

온종일 가랑비가 내리고,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파고드는 잿빛 거리에서

조심스레 길을 물어보면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한 악센트의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겠지.’

 

선생님이 시처럼 써주신 저 구절 덕분에 제가 상상한 영국의 겨울은 무채색이었어요.

우중충한 날씨에 비만 맞다가 오겠구나, 생각했지요.

막상 우산도 우비도 챙겨오지 않았다는 걸 비행기에 탑승한 뒤에야 깨닫고 제 머리를 쥐어박았답니다.

11시간이었는지, 13시간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네요.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영국에 도착해서는 여행 내내 날씨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놀라웠어요.

햇빛이 얼마나 쨍하게 밝은지, 시차적응이 안 돼 몽롱한 머리까지 깨우는 느낌이었습니다.

가끔 선생님 말씀처럼 비가 오기도 했지만 저에게 영국은 맑은 날씨들로 기억됩니다.

사람들도 생각보다 친절하고요.

이상하지요?

 

저희가 방문한 도시들은 런던, 브리스톨, 코벤트리, 노팅엄, 웨이크필드, 리버풀, 벨파스트 그리고 다시 런던이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벨파스트를 꼽고 싶네요.

영화 <타이타닉> 기억하시죠?

그곳이 타이타닉의 생산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작가인 C. S. 루이스의 고향이기도 하더군요.

선생님이 권해주셨던 <나니아 연대기>의 등장 동물들이 있는 공원에 가서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답니다.

자연경관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그곳 북아일랜드의 역사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는 몇몇 기관에 방문해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마음이 무척 아팠어요.

북아일랜드 신구교 간의 뿌리 깊은 갈등과 분쟁, 테러의 역사가 거리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더라구요.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와 분노, 증오, 체념의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북아일랜드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R-시티, 그레이트 샨킬 얼터너티브처럼 회복적 정의를 기반으로 지역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고 청소년을 교육하는 단체들을 보면서 묵직한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20년, 30년을 묵묵히 화해와 평화를 위해 애쓰는 분들을 보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아오게 되었어요.

제가 그동안 회복적 정의를 너무 느슨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는지, 사회적 실천에 대한 절박함이 무뎌지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고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은 노팅엄대학에서 만난 벨린다 홉킨스 박사님이었어요.

머리가 하얀 할머니신데, 중학교 선생님 출신답게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제스처와 목소리가 아주 설득력 있었어요.

<Restorative Theory in Practice>, <Just School>, <Just Care> 같은 책의 저자이시기도 하고, 영국에서 교사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만든 분이시라고 하네요.

이 분의 워크숍을 경험하면서 제가 갖고 있던 회복적 정의에 대한 생각이 좀더 분명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회복적 정의가 추구하는 다섯 가지 가치로 제가 배웠던 것은 피해자의 피해 회복, 자발적 책임, 관계, 공동체, 정의의 회복인데, 벨린다 박사님이 제시한 실천법은 자발적 책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어요.

그분이 제시한 회복적 접근의 5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아요.

 

1. 모든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2.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3.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4.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전에 그 사람의 니즈(필요,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5.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기만의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자아에게 깨어날 기회를 주는 것 같아요.

이것은 나의 일이고,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갖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표현은 다른 사람의 표현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나의 표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잘 의식하지 못하니까요.

더 섬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만사에 더욱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그 사람의 욕구를 먼저 살피라는 말은 존중의 핵심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니까 바라는 것과 필요한 게 다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도우려 하다가 오히려 무례를 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욕구에 대한 이해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마지막 원칙으로 이어지지요.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고, 주변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 부분에 대한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게 우리 사회의 과제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이에 대한 부모의 자세이기도 하고, 구성원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에티켓이기도 하겠구요.

관계에서 무게중심을 잘 잡는 균형감각은 어떻게 해야 기를 수 있는지, 이건 과제로 남는 것 같아요.

이러한 5가지 원칙이 회복적 질문과 연결된다는 건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지요.

 

1. 무슨 일이 있었나요?

2.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그 동안 어떤 생각을 했나요? 그때 어떤 감정이 들었나요? 그 일에 대해 지금 어떤 기분인가요?

3. 그 일로 인해 누가 영향을 받았을까요?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을까요?

4. 영향을 받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건 뭘까요? 피해를 바로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5.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요?

 

재작년에 한국에 오셨던 크리스토퍼 스트레이커 선생님 아시죠?

그분이 <Restorative Thinking>이라는 단체를 만드셨던데, 위와 같은 회복적 질문이 담긴 카드 목걸이를 만들어서 선물로 주셨어요.

목에 차고 다니다가 일이 생기면 바로 사용할 수 있어서 아주 유용하겠던데요.

선생님 학교에서도 만들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려나 브리스톨과 웨이크필드, 리버풀 같은 곳은 도시 전체가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조직적으로 진행하고 있더라구요.
회복적 도시가 꿈에 머물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찾아간 곳이 있는데요, 바로 루돌프 슈타이너 하우스였습니다.

이번 영국 연수의 공식일정이 끝나고 개인시간이 주어졌을 때 이곳을 두 번 찾았어요.

괴테아눔과 비교되지는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인데 소원을 풀었네요.

지하에 넓은 공연장이 있고, 1층에는 카페와 서점, 2층에는 도서관, 3층은 강의실, 4층은 오이리트미실로 이루어져 있더라구요.

듣던 대로 아름다웠고 아늑한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또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잔뜩 사왔고요.

회복적 정의를 공부하시는 분들께 발도르프교육과 인지학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가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선생님께서 언젠가 영국에 가신다면 꼭 이곳에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근처에 강을 낀 공원이 있는데 그곳도 꼭 가보시길요.

런던에 그렇게 넓고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슈타이너 하우스도 슈타이너 하우스였지만 우연히 찾게된 그 공원이 제 마음에 아직도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희 집 마당에 있는 매실나무는 벌써 꽃을 피웠던데, 봄은 봄인가 봅니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는 걸 보면요.

조만간 가로수의 이파리들도 파릇파릇 돋아나고 벚꽃이 구름처럼 피어나겠지요.

그때쯤에는 꼭 찾아 뵙고 싶네요.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요.

또 편지 드리겠습니다.

 

 

서산에서 김훈태 올림

2020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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