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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SKY’ 향한 경쟁이 교육불평등에 대한 오해 키웠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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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SKY’ 향한 경쟁이 교육불평등에 대한 오해 키웠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3. 24. 09:48

‘SKY’ 향한 경쟁이 교육불평등에 대한 오해 키웠다


2024.03.05.
소셜코리아-HERI 공동기획 ⑥
교육 불평등 연구자 최성수 연세대 교수 인터뷰


최성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류이근 선임기자


어느새 ‘교육 세습’이란 말도 친숙해졌다. 부를 세습하듯 학벌도 세습되는 사회에 진입했다는 진단은 너른 지지를 받는다. 교육이 계층 이동성을 높이는 사다리가 아니라 공고화하는 수단이 됐다는 한탄도 들린다. 그런데 교육 불평등 연구자인 최성수 연세대 교수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결이 상당히 다르다. 데이터에 기반을 둔 그의 연구들이 우리의 ‘확신’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불편한 감정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교육 불평등을 둘러싼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인식의 지평을 확장해 줄 것이다. 지난달 23일 연세대 캠퍼스에 있는 연구실에서 그를 인터뷰하고 이후 두 차례 더 전화로 인터뷰를 보탰다. 최 교수의 도전적인 얘기를 한번 들어보자.

―총선이 코앞이다. 민주당의 이른바 ‘서울대 10개 만들기’ 공약을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비판적 입장이다. 다만 정책이 도출되는 과정에 대한 비판이지, 정책 자체에 비판적이지는 않다. 지방 거점 대학을 살려 고등교육 개혁과 수도권 편중 및 지방 소멸 문제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흔히 생각하는 교육 불평등 즉 사회경제적 지위나 자원의 취득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으로서는 큰 의미가 있지 않다.”

―교육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보는가?

“교육이 ‘교육’을 하지 않는 데 있다. 교육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몇 가지 본령(공평한 기회와 발달 환경 제공, 민주시민으로서 소양, 만족스러운 삶의 영위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불평등’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다른 부분에 문제가 훨씬 많다.

우리나라는 공부를 얼마나 잘 시키냐로 보면 굉장히 뛰어난 국가다. 국제적으로도 상위권에 있다. 불평등 측면에서도 좋은 편이다. 부모의 학력과 같은 가족 배경에 따른 성취도 편차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더 향상될 부분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라는 얘기다.

진짜 문제는 학생들이 불행하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민주시민으로서 소양을 잘 가르치고 있나? 아니면 노동시장에 준비된 상태로 나갈 수 있게 해주나? 이런 부분에서 문제가 많다. 줄 세우기 곧 서열, 다음 단계를 향한 경쟁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평등한 시스템은 경쟁을 완화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들은 일찌감치 교육의 트랙(경로)을 나눠놔서 경쟁이 덜하다. 독일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 트랙’과 ‘직업 트랙’으로 나뉜다. 그 안에서 경쟁은 덜하다. 반면에 불평등은 더 고착화할 수 있는 경로다.

우리나라는 불평등이 고착화할 수 있는 경로가 계속 뒤로 미뤄지면서 불평등은 완화하지만 무한경쟁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대학 진학률이 거의 80%에 이른다. 대학 가는 것조차 굉장히 평준화가 됐다. 예전과 다르게 4년제 대학 진학이 특별한 지위가 되지 못한다. 지금 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교육 불평등 인지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교육이 지위 세습 기제로 강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착각과 오해라고 보는가.

“교육 불평등은 최상위권 대학 진학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강남을 중심으로 한 고액 사교육을 통해 의대나 최상위 엘리트 대학에 가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교육 불평등 담론을 지배하는 주된 내러티브(서사)다. 상당 부분 실제 데이터로 검증되지 않았다. 강남의 사교육 관련 데이터라는 게 존재하기 어렵고, 흔히 떠도는 것도 사교육업계발이다.

물론, 서울대나 의대 진학에 계층 간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너무 그 얘기만 했다. 사실 서울대나 의대, 연고대에 가는 학생들이 전체 고등학교 졸업자 중 몇 프로(%)나 되겠나. 그런데 한국 교육의 모든 담론이 최상위권 학생들에 대한 내용을 과대표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엘리트 집단이 재생산되는데 불평등이 있다는 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대다수가 지방대나 전문대에 진학하는 하위 80%에는 관심 갖지 않는다. ‘인서울’(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머지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또 관심도 내러티브도 없다. 이 학생들이 언론에서 주목받을 때는 주로 사고가 났을 때나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뿐이다. 이들이 졸업 뒤 대부분 중소기업에 취직해 삶을 영위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내러티브가 거의 없다.

교육 불평등 문제도 이제는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하위 계층 학생들에게 얼마나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이후 삶을 어떻게 영위할 수 있게끔 할지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언론에서 다루는 사교육, 입시 관련 이야기는 대부분 상위권 쪽에 쏠려 있다. 사실 답이 나오지 않는 이슈다. 수십 년 경험했듯 사교육 관련 제도는 다 실패했고, 입시 관련한 제도들도 결국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돌고 도는 이슈다. 물론 입시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계속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 변화에 핵심적으로 영향받는 학생들은 최상위권 집단이다.

교육 불평등 문제가 중요하지만 그 부분으로 모든 걸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이게 무한경쟁 사회, 즉 모두가 위를 바라보면서 올라가고자 하는 사회 분위기와도 연결되어 있다. 요즘 가장 중요한 이슈인 저출생 관련한 문제도 이러한 사회 시스템과 연결된 것 아닌가.”

―저출생과 연결됐다는 건 뭘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인가.

“잘 사는 삶, 바람직한 삶, 번듯한 삶에 대한 내러티브와 개념들이 있다. 좋은 대학 나와서 안정적이고 괜찮은 소득이 보장되는 직장에 취업해 자신과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식이다. 굉장히 엘리트 집단 지향적이다. 표준 자체가 너무 높은 내러티브다. 그 출발이 교육 시스템에 있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하거나 좋은 대학에 못 가면 가족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건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내러티브와 연결된다. 여건이 안 되는 상태에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책임 못 지는 결정을 한다는 식으로 비판을 받게 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많은 청년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가족을 번듯하게 꾸려서 잘살고 있는데도 그런 내러티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게 저출생 현상을 고도로 밀어붙이는 압력을 제공하는 문화적인 저변으로서 작용한다. 그 바탕에 엘리트 집단 지향적 사고방식이 깔렸다.”

―교육이 불평등을 고착화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오해에서 비롯됐다면 기회균등 측면에서 교육을 통한 세습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명제 또한 기각해야 하나?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서 답이 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와 같은 직종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것 또한 데이터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원래 세습이 강한 직종이 있긴 하다.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주로 엘리트 직종이다. 그래서 (세습해도)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게 우리나라만의 현상인지, 한국사회가 정말 세습화한 사회로 가고 있다는 명제가 성립할 정도로 심각한지에 대해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사실 판단이 필요하다. 그 뒤 의사들이 세습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자본을 투입하는 게 효율적인가, 그게 현명한 선택인가, 그걸 사회의 주된 문제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해야 한다. 법조인과 의사와 같은 엘리트 집단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게 아니라 개천 용을 통해서 (충원)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어디까지 주된 의제로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최근 더 주목하는 건 사회의 다양성 약화다. 단순한 계층 세습뿐만 아니라 도시 재개발, 재건축으로 인해 아파트가 도심에서 더 늘어났다.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나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밀려나는 ‘분리’ 현상이 심해졌다. 학생들도 점점 자신과 비슷한 배경과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친구들하고만 지내게 된다. 주거 분리와 학교 분리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교육 및 사회 불평등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런 현상은 결국 학생들의 사회화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라지 체티 미 하버드대 교수(경제학)의 연구를 보면 저소득층 아이들이 고소득층 아이들과 친구 관계에 있을 때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사회 경제적으로 더 높은 성취를 이룰 확률이 높다. 또 다양한 배경과 특성을 지닌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는 동질성이 큰 집단보다 개인의 성공을 자신의 노력보다 외부 요인으로 돌릴 가능성이 크게 나타난다. 이런 결과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면 점점 동질적인 사람들로 구성되는 학교 혹은 주거 환경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는 배제나 배타적인 태도의 형성이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민주시민을 양성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다. 불평등 인식과 복지나 재분배 정책의 지지 여부와 사회적 해법을 도출하는데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말씀을 듣다 보니 미국에서는 이런 분리 현상이 극심해 거주지에 따라 직업, 소득, 정치적 성향까지 크게 다르다는 내용을 다룬 책(The Big Sort)이 떠오른다.

“한국은 덜한 편이다. 엘리트 집단이 아우라도 없고 뿌리도 약한 측면이 있다. 문화적으로도 존경받을 만한 유산이 없다. 반면에 경제, 사회, 문화적 중산층은 두껍다. 중산층과 엘리트층 간 격차가 아주 작다 보니 경쟁이 더 심한 측면이 있다. 유럽 같은 경우 엘리트층의 뿌리가 굉장히 깊다. 계급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다. 계급 상승은 언감생심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런 게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은 그런 게 굉장히 약하다 보니 오히려 더 스트레스받고 경쟁은 더 심해지는 측면이 있다.”

―한국도 이미 강남은 그런 공간적 분리가 굉장히 강한 지역이 된 거 같다. 화제를 좀 돌려서 기회의 평등과 관련한 착각과 오해가 어떤 방식으로 잘못된 진단과 정책 처방을 낳는다고 보는가?

“입시와 사교육 정책이다. 지난 정부에서 정시 비율을 40%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결국 논리가 ‘시험으로 공정하게’ 인데, 대단히 잘못된 정책이다. 수시 비중이 하루아침에 높아진 게 아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큰 틀의 방향성을 갖고서 추진해왔다. 그걸 일순간에 뒤집어버린 거다.

사교육도 마찬가지다. 과도한 사교육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부분도 있다. ‘과도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다른 사회(나라)에서는 사교육을 받지 않을 중하위권(계층) 학생들도 다 사교육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과도한 사교육 때문에 가계에 부담되는 것도 맞다. 그런데 사교육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계층은 상위권보다 중하위권 학생들이다. 실제로 성균관대 조민효, 최재성 교수가 한 연구를 보면 학원 야간 학습을 금지한 정책으로 고소득층 자녀는 학습 시간이 줄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저소득층 자녀는 학습 시간이 줄었다. 그렇다고 자정까지 아이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교육 하면 무조건 강남의 사교육을 떠올리고, 불평등하다고만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심화 수학을 수능에서 제외하는 것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나름 타당하다. 그런데 교육부에서 심화 수학 제외 정당화의 논리로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하더라. 대단히 잘못된 논리다. 그런다고 사교육이 줄지 않는다.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서 어떤 교육정책을 편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사교육 줄이기가 공교육의 목표가 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주객이 전도됐다.

이런 것들이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책 접근의 전형적인 예시다.”

―중상위 계층을 중심으로 교육 불평등이 커졌다는 인식이 강할수록 교육 불평등 악화를 막기 위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고 정책을 펴는 데 수월한 측면도 있는 게 아닌가.

“2010년대 중반 ‘수저론’, ‘개천용’ 등 불평등 관련된 의제가 크게 이슈가 되었다. 불평등이 이렇게까지 주요한 사회적 의제로 등장한 적이 별로 없다. 중상위 계층의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에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감수성이 사회적인 핵심 감정이자 논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서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라. 개방하고 포용하는 담론이 아니라 경쟁을 지향하고 그 과정에서 누구를 배제하기 위한 계급적 공정성 담론이 형성됐다. 예를 들어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정교사가 기간제 교사를 배제하기 위한 담론이 되었다. 계급을 탈피한 사회 통합적 담론은 되지 못했다.”

―교육의 영역에서 사회 통합적인 노력은 어떤 게 가능할까.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자꾸 교육을 문제 삼아서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교육을 문제 삼아서 뭘 했을 때 불평등을 완화할 효과를 만들어낼 지점이 제한적이다. 대학 교육도 넓힐 대로 넓혔다. 빈곤한 친구들이 대학을 많이 진학해서 양질의 능력을 갖춰 노동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게 주류경제학의 해법이다. 사실은 그런 면에서 더 할 여지가 아주 적다. 이미 교육 면에서는 한국은 선도 그룹이다.”

―과거보다 계층 이동성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실제 대학을 통한 기회의 불평등이 커졌다는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는 연구결과와 간극이 크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회의 평등과 관계없이 사회가 발전하면 계속 일자리가 생기고 기회가 창출된다. 나는 농민이었지만 내 자식은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나는 공장 노동자였지만 내 자식은 사무직 노동자가 되는 식이다. 이게 실제로 지위가 상승한다기보다 사회 자체가 그 방향으로 가면서 일자리가 새롭게 늘어나고 소득도 증가하니까 뭔가 상승 이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실제 상대적 지위가 향상된 건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저성장 시대가 되면 사회적 다이내믹(역동성)이 감소해서 더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과거보다 살기 어려워졌다거나, 삶이 팍팍해졌다고 느끼게 된다.

학술적으로 말하면 ‘절대적 이동’이 감소한 건데 우리는 ‘사회가 불공평해졌어’라는 ‘상대적 이동’의 언어로 말한다. 저성장 사회가 되면서 과거에 비해 (좋은) 일자리가 줄었는데 우리는 흔히 공정성 담론 즉 상대적 이동에 대한 감각으로 이야기한다. 둘을 분리해야 한다.

간극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하나는,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타격받는 계층이 나름 기존에 가진 게 많은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중상위 계층이 많은 도전을 받게 된다. 대학 진학률이 높아져 경쟁 상대가 많아진 상태에서 더 어려워졌다고 느끼는 쪽은 기존 중산층 집단이다. 문제는 그런 집단이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더 크다. 그 집단의 담론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주류 담론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배제하기 위한 계급적) ’공정성’ 담론의 형성도 그런 측면에서 볼 여지가 있다.”

―양질의 일자리나 좋은 대학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것 같다.

“80년대 초반에는 수도권 명문대 가려는 포션(부분)도 워낙 작았다. 그러다 보니 경쟁도 없을뿐더러 자녀가 3~4명이었던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 한 명이 좋은 대학을 못 갔을 때 안타깝기는 하겠지만 관심이 ⅓~¼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외둥이다. 내 딸도 외동딸이다. 우주에 온 기운을 다 애한테 쏟아붓는다. 원하는 성과를 못 냈을 때 만족감 내지는 상실감은 과거 부모들이 가졌던 것과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인구학적 변화는 계층 간 차이를 배가시키거나 공정에 대한 내러티브도 훨씬 더 강렬하게 만들 수 있다.”

―한국이 사회의 경직성은 낮고 유동성이 높은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측면이 있다. 다만 비교의 준거(교육, 직업 등)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한국이 전반적으로 높은 편에 속한다. 예를 들어 학력(학업 성취도와 최종 학력 등)은 비교적 측정하기 쉬운 지표인데 국가 간 비교를 보면 한국은 가족 배경에 따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나라다. 또한 직업과 관련해서도 질적으로 한국은 역동성 있는 나라다. 서구 특히 유럽에 비하면 역동성 있다. 직업 이동에 관한 데이터를 보면 한국은 (이동성이) 중간 정도 되는 나라다. 교육은 이동성이 상위에 가깝다.

한국은 사회변동 과정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평등 지향성이 강하고 경쟁 지향적이다. 발전 과정에서 지위 상승을 향한 경쟁이 극심한 방향으로 이동해왔다. 상대적으로 계급이나 지위가 전통적으로 공고하고 안정화한 서구 유럽이나 일본보다 엘리트 계층의 벽과 경계가 크지 않았다.”

―기회의 격차가 증가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할 때 자칫 오해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실제 교육 기회 격차가 어느 정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교육 격차가 없는 사회는 없다. 한국도 가족 배경이나 집단 간 기회의 격차가 없지 않다. 분명히 있다. 그동안 역사적 제도적 변화 속에서 거기에 맞는 교육격차의 다이내믹이 계속 존재해왔다. 다만 지난 30~40년 동안 한국의 교육 제도는 우리가 지금 느끼는 바와 달리 격차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해오지는 않았다. 당연히 사회, 정치적인 노력으로 격차를 더 좁힐 여지도 있다. ”

―한국에서 교육의 기회 격차가 최상위권에서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최상위권으로 올라갈수록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른 격차가 더 크게 나타난다. 최상위권 대학을 향한 경쟁도 심하다. 그에 맞춰 교육도 줄 세우기 위한 경쟁이다. 입시에 종속돼 있다. 학생을 잘 성장시키고 (사회가) 필요한 여러 역량을 잘 키워주기보다 어떻게 줄을 세울지에 쏠려 있다. 한 반에 30명이 있다고 치면 1등부터 30등까지 줄 세우기가 아닌 맨 위 몇 명을 줄세우는 교육이다. 대학 서열이 공고하다고 하지만 진짜 줄이 세워지는 부분은 맨 위 몇 개 대학이다. 상위권 줄 세우기를 위해 전체 교육 시스템이 종속된 방향으로 가는 게 진짜 문제다.

불평등이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한국 교육의 불평등 담론이 교육을 둘러싼 담론과 문제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문제다. 엘리트 계층의 진입로로서 좋은 명문대에 진학하는데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것 자체로 중요한 문제다. 개선을 위한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교육의 담론이나 정책의 핵심이 그 부분으로 환원하고 있다. 그간 교육 정책의 중심에 늘 입시 문제가 있었다. 소수 엘리트 대학, 의대, 수능의 필수 수학 과목, 수시 비중 등은 다 최상위권 엘리트 대학 진학에서 나타나는 어떤 불평등, 불공정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는 전체의 70%에 이르는 대부분의 학생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다.

고등학교나 대학 입시를 바꾸려는 정책을 수없이 시도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교육 불평등을 제대로 잡으려면 초등학교 이하 단계에 더 신경 써야 한다.”

―취학 전후 시기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사실 초등학교 이후 평가 지표에서 격차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이미 입학 전에 거의 다 벌어진다. 그러면 초, 중 교육이 기존에 유지된 격차를 왜 줄이지 못하느냐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더 벌어질 수 있는 격차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초등학교나 그 이전 단계에서 격차를 벌이는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춰 신경을 쓰는 게 교육 형평성을 촉진하는데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어떤 접근과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가.

“교육 개혁만으로는 안 된다. 보육도 이슈다. 부모들이 매여 있는 노동과도 아주 긴밀히 엮여 있다. 최근 돌봄 학교와 관련한 논쟁도 정부가 너무 단순하게 교육 문제로 치환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나온 무리수로 보인다.”

―대학 가운데 상대적으로 전문대에서 세대 간 지위 향상 이동률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전문대의 사회 이동성이 다른 대학 군들에 견줘 특별히 더 높은 건 아니지만 지방에 있는 4년제 사립대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다. 주목할만한 현상은 최근으로 올수록 이동성이 더 높아지는 추세다. 전문대 들어가는 학생 가운데 상대적으로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낮고 특히 여학생이 많다.

전문대의 역량을 높여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고등교육 개혁이 이뤄진다면 사회 이동성을 높이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또 젠더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전문대 가는 비율이 거의 30%에 이른다. 큰 비중이다. 하지만 국가 장학금 정책만 보더라도 4년제 대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학생 거의 절반 이상이 전문대와 지방 사립대에 다닌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대부분 구조조정의 대상으로만 묘사된다. 그런데 전문대는 산업정책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더 갖고서 봐야 한다.”


최성수 연세대 교수는 사회학자다. 4년 전 그는 다른 연구자들(정인관, 황선재, 최율)과 함께 ‘한국의 세대 간 사회이동과 교육 불평등: 2000년대 이후 경험적 연구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비롯해 교육 불평등을 고찰하는 논문을 여럿 썼다. 그는 앞서 한겨레의 불평등 데이터 관련 전문가 설문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세대 간이나 세대 내(한 개인의 생애 과정) 발생, 유지, 변화하는 과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육과 가족이라는 현대 사회 중추가 되는 제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연구한다. 주로 대규모 양적 데이터를 통계적 분석 방법으로 연구하는 인구학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녹취 김효진 노영준 보조연구원


https://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11309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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