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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Sympathie와 Antipathie의 번역에 대하여 본문

인지학

Sympathie와 Antipathie의 번역에 대하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17. 02:04

SympathieAntipathie의 번역에 대하여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신지학 Theosophie>, ‘세 가지 세계 – 1. 영혼세계’ 중에서

 

원문 :

Es gehört zu dem ersten, was man sich für die Orientierung in der seelischen Welt aneignen muss, dass man die verschiedenen Arten ihrer Gebilde in ähnlicher Weise unterscheidet, wie man in der physischen Welt feste, flüssige und luft- oder gasförmige Körper unterscheidet. Um dazu zu kommen, muss man die beiden Grundkräfte kennen, die hier vor allem wichtig sind. Man kann sie Sympathie und Antipathie nennen. Wie diese Grundkräfte in einem seelischen Gebilde wirken, danach bestimmt sich dessen Art. Als Sympathie muss die Kraft bezeichnet werden, mit der ein Seelengebilde andere anzieht, sich mit ihnen zu verschmelzen sucht, seine Verwandtschaft mit ihnen geltend macht. Antipathie ist dagegen die Kraft, mit der sich Seelengebilde abstoßen, ausschließen, mit der sie ihre Eigenheit behaupten. In welchem Maße diese Grundkräfte in einem Seelengebilde vorhanden sind, davon hängt es ab, welche Rolle dieses in der seelischen Welt spielt. Drei Arten von Seelengebilden hat man zunächst zu unterscheiden, je nach dem Wirken von Sympathie und Antipathie in ihnen. Und diese Arten sind dadurch voneinander verschieden, dass Sympathie und Antipathie in ihnen in ganz bestimmten gegenseitigen Verhältnissen stehen.

 

타카하시 이와오·양억관 번역 :

혼의 세계를 알려면 무엇보다 먼저 물질계에서 고체, 액체, 기체로 구별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 구성체를 구분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두 가지 힘을 알아야 한다. 즉, 공감과 반감이다. 혼적 구성체 속에서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는 그 구성체의 종류가 결정한다. 공감이란 혼적 구성체가 다른 것을 끌어당겨, 다른 것과 융합하려는 힘이다. 반감이란 그와는 반대로 다른 것을 물리치고 배제하며, 자신의 특성을 주장하려는 힘이다. 어떤 혼적 구성체가 혼의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는 이 두 가지 기본적인 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가에 따른다. 세 가지 종류의 혼적 구성체가 이러한 공감과 반감의 작용에 따라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상이성은 공감과 반감의 상호관계에 의지하고 있다.

 

최혜경 번역 :

영혼 세계에서 방향을 잡고 활동하기 위해서 습득해야 하는 첫 번째는, 물체 세계에서 고체, 액체, 공기, 가스 등을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게 영혼 세계 형상의 다양한 양식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두 가지 원동력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들을 공감과 반감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원동력이 하나의 영혼 형상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바로 그에 따라 그 형상의 양식이 결정된다. 하나의 영혼 형상이 다른 것을 끌어당기는 힘, 다른 것과 하나로 융합하려는 힘, 다른 것과의 유사성을 정당화시키는 힘을 공감이라 명명해야 한다. 그에 반해 하나의 영혼 형상이 밀어내고, 거부하고, 배제하는 힘, 자신의 특성을 정당화하는 힘은 반감이다. 이 두 가지 원동력이 하나의 영혼 형상 속에 어느 정도로 존재하는지에, 그 형상이 영혼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달려 있다. 공감과 반감의 작용에 따라 일단 세 가지 양식의 영혼 형상을 구분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양식은, 영혼 형상들 내면의 공감과 반감이 아주 특정한 상호 관계에 있기 때문에 구분된다.

 

 

<일반인간학 Allgemeine Menschenkunde>, 제5강 중에서

 

원문 :

Der Mensch hat in Wirklichkeit mehr Antipathie zu der Umwelt als das Tier, aber sie kommt im gewöhnlichen Leben nicht zum Bewußtsein. Sie kommt nur zum Bewußtsein, wenn sich das Anschauen der Umwelt steigert bis zu dem Eindruck, auf den wir mit dem Ekel reagieren. Das ist nur ein gesteigerter Eindruck alles sinnlichen Wahrnehmens: Sie reagieren mit dem Ekel auf den äußeren Eindruck. Wenn Sie an einen Ort gehen, der übel riecht, und Sie empfinden in der Sphäre dieses Ubelriechens Ekel, so ist dieses Ekelempfinden nichts anderes als eine Steigerung desjenigen, was bei jeder Sinnestätigkeit stattfindet, nur bleibt die Begleitung der Empfindung durch den Ekel in der gewöhnlichen Sinnesempfindung unter der Bewußtseinsschwelle liegend. Wenn wir Menschen aber nicht mehr Antipathie hätten zu unserer Umgebung als das Tier, so würden wir uns nicht so stark absondern von unserer Umgebung, als wir uns tatsächlich absondern. Das Tier hat viel mehr Sympathie mit der Umgebung, ist daher viel mehr mit der Umgebung zusammengewachsen, und es ist deshalb auch viel mehr angewiesen auf die Abhängigkeit vom Klima, von den Jahreszeiten und so weiter als der Mensch. Weil der Mensch viel mehr Antipathie gegen die Umgebung hat, deshalb ist er eine Persönlichkeit. Der Umstand, dass wir uns durch unsere unter der Schwelle des Bewußtseins liegende Antipathie absondern können von der Umgebung, bewirkt unser gesondertes Persönlichkeitsbewußtsein.

 

타카하시 이와오·김성숙 번역 :

인간은 동물보다도 환경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지만, 일상에서는 반감을 의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환경의 관찰이 구역질을 일으킬 정도로 인상이 강해진 때만이 그것은 의식됩니다. 감각적 지각은 그 인상이 강해질수록 구역질에 이르게 됩니다. 악취를 풍기는 장소에 가면 그 냄새에 토할 듯한 느낌을 받지만, 그 구역질은 감각활동을 동반하는 반감이 고조된 것입니다. 단지 일상의 감각생활에 있어서는 그 구역질이 의식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같은 정도로밖에 환경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주위의 환경에서 충분히 독립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동물은 환경에 대해서 강한 공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환경과 하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인간보다 더 풍토나 사계절의 변화에 의존한 생활방식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환경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갖고 있으므로 독립된 인격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식에 깔려 있는 반감에 의해 환경에서 떨어져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들의 개인적인 인격의식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최혜경 번역 :

인간은 실제로 동물에 비해서 주위 환경에 보다 더 반감을 지닙니다. 단지 일상생활에서 그것이 의식에 떠오르지 않을 뿐입니다. 반감은 주위 환경의 관찰이 우리에게 남기는 인상에 대해서 우리가 혐오감으로 반응을 할 정도로 고조될 경우에만 의식됩니다. 반감은 모든 감각적인 지각의 고조된 인상일 뿐이며, 여러분은 그 외적인 인상에 구토감으로 반응합니다. 불쾌한 냄새가 나는 곳에 가면, 그 악취가 나는 공간에 구역질을 느낍니다. 바로 이 구역질이 모든 감각 활동에서 발생하는 것의 고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일상적인 감각에서는 혐오감에 의한 감각의 동반이 의식의 경계 아래에 머무를 뿐입니다. 인간이 주변 환경에 대해서 동물에 비해서 더 많은 반감을 지니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우리를 주변 환경으로부터 이렇게 강하게 격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동물은 주변 환경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공감을 지니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 동화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서 기후나 계절에 대해서 인간보다 훨씬 더 의존적입니다. 인간이 주변 환경에 대해서 훨씬 더 반감을 지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개별적인 인격으로 존재합니다. 의식의 저변에 놓인 반감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분리해 낼 수 있다는 상황이, 바로 이 사실이 우리의 독립된 개인성 의식을 생기게 합니다.

 

 

*

 

영혼세계의 두 가지 근본적 힘은 Sympathie와 Antipathie이다. Sympathie가 다른 것을 끌어당기는 힘, 다른 것과 하나로 융합하려는 힘, 다른 것과의 유사성을 정당화시키는 힘이라면, Antipathie는 밀어내고 거부하고 배제하는 힘, 자신의 특성을 정당화하는 힘이다. 중국에서는 의역하여 Sympathie를 융합감(融合感)으로, Antipathie를 분리와 배척의 의미를 담아 이척감(離斥感)으로 번역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그 동안 Sympathie를 주로 공감으로 번역해 왔는데, 그 말은 오히려 Empathie에 적합하다. 국내에 번역 출간되는 대부분의 책들은 Empathie를 공감으로 옮기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Empathie라는 말은 20세기 들어서 만들어진 신조어로, 슈타이너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Antipathie를 반감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견이 없어 보인다. 우리말로 반감의 사전적 의미는 ‘반대하거나 반항하는 감정’이고, 독일어 Antipathie 역시 ‘혐오, 반감’을 뜻한다. 그러나 인지학에서는 ‘밀어내고 거부하고 배제하는 힘’을 의미하며, 혐오감이나 구토감, 구역질을 통해 의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지학에서는 이 낱말을 그 의미로 선택한 것이고, 그래서 인지학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영혼세계의 소재와 힘은 물질세계에서처럼 엄밀하게 구분할 수 없어서 어떤 충동을 힘이라 할 수도 있고 소재라 할 수도 있다. 영혼세계에서는 ‘감정’이 ‘힘’이고, ‘힘’이 곧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Antipathie를 혐오감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는 둥(혐오감을 지칭하는 말은 Ekel이다), 반감은 ‘우주적 힘’일 뿐이라는 둥 이상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반감이 곧 혐오감은 아니지만 혐오감을 포함하는 넓은 범주의 개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어느 분이 "...... 반감을 ‘싫어하는 감정’으로 해석해서 극복과 제거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세계에 대한 분별 의식이 없는 아기처럼 무한한 일체감 속에서 파묻혀 사는 것이 발도르프 교육의 지향점이 된다. 이는 보편적 개별자, ‘나는 나다’를 선언하는 개인(individual)을 강조했던 슈타이너의 뜻과 정면으로 상충한다"라는 반론을 제기했는데, 반감을 싫어하는 감정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도 없고 극복과 제거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없는데 대체 누구랑 싸우시는지 모르겠다. 이어서 "동감과 반감을 오해한다면 전체 발도르프 교육에 대한 이해가 오염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표현 자체와 실제 의미를 혼동하는 것은 때로는 사소한 문제지만, 이 사례에서 보듯이 심각한 오류를 낳는 때도 있다."라고 끝을 맺는다. 심각한 오류를 낳지 않기 위해 좀 더 엄밀하게 살펴보자.

 

이제 Sympathie가 문제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슈타이너는 Sympathie를 사전적 의미(동감, 공감, 교감, 호감, 동정 등)에서 나아가 ‘다른 것과 하나로 융합하려는 힘’이라고 정의내렸다. 자, 그렇다면 Sympathie를 공감으로 할지, 아니면 호감이나 동감, 또는 교감이라고 할지, 융합감으로 할지는 국내 번역자들이 논의해 결정할 일이다. 이미 본 뜻은 좋아한다거나 동의한다는 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물론 이것이 의식적으로 드러날 때는 감정적인 반응으로 나올 것이다) 어떤 말을 쓰든 분노하며 완전한 오류라는 둥, 사상 내용의 오역이라는 둥 흥분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번역을 했을 때 한국어 사용자들이 더 자연스럽게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Sympathie를 호감이라고 번역했다고 해서 번역자가 Sympathie를 단지 '좋아하는 감정'으로만 생각하겠는가? 그렇게 여겼다면 너무나 평면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수업방법론>의 1,2강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 중 어떤 게 더 자연스러운가?

 

“여러분이 각 어린이를 호감으로, 진정한 호감으로 감싸주고자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어린이의 의지 생활을 위해서 훌륭한 교사가 될 것입니다. ... 그저 그 어린이를 좋아하면 됩니다. 어린이와 행하는 것을 사랑을 다해서 함께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각 어린이를 동감으로, 진정한 동감으로 감싸주고자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어린이의 의지 생활을 위해서 훌륭한 교사가 될 것입니다. ... 그저 그 어린이를 좋아하면 됩니다. 어린이와 행하는 것을 사랑을 다해서 함께하면 됩니다.”

 

그런데 <인지학용어 해설집>이라는 책을 보면 Sympathie와 Antipathie 이해가 매우 혼란스럽다.

 

“내 신을 사랑하는 것이 동감이듯 그로 인해 다른 신을 혐오하는 것도 동감입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혐오’조차 그것이 감정 구속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동감입니다. 반면, 모든 종교에서 거리를 두고 종교가 가진 보편 속성과 가치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감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동감과 반감은 얼마나 감성적인지 이성적인지, 자의적인지 보편적인지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지 좋고 싫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부에서 이를 ‘호감’으로 번역하는 것은 완전한 잘못입니다. ‘교감’이라는 번역 역시 옳지 않습니다. 동감은 무엇보다 자신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지 상대와 교류 정도나 성격이 우선하는 것은 아닙니다.”(39쪽)

 

이런 해석은 슈타이너의 가르침과 무관해 보인다. '혐오'조차 감정 구속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Sympathie라는 말은 명백한 오류이다. 감정 구속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일까? 혐오라는 감정은 Antipathie의 표현이지, 결코 Sympathie일 수 없다.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내면의 양극적 힘이 감정으로 표현되면 호감과 반감이 되는 것이다. Sympathie와 Antipathie가 감성과 이성, 자의성과 보편성을 뜻한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해석이다. 해석은 자유지만 이것이 인지학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체 슈타이너가 어느 저술에서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일까? 혼란스러울 때는 원전을 보는 게 좋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을 때 '자의적 해석'을 하기 쉽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연구할 때 독단에 빠지기 쉽다. 슈타이너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거라면 '인지학'을 참칭하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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