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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영혼의 발달과 호감-반감의 작용 - 한스 요하임 젠녹 본문

인지학

영혼의 발달과 호감-반감의 작용 - 한스 요하임 젠녹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6. 9. 22:02

영혼의 발달과 호감-반감의 작용 

 

한스 요하임 젠녹

 

 

21세부터 28세까지의 시기에는 특히 감각혼의 질적인 특성이 발달합니다. 이것이 감각혼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호감하느냐 반감하느냐에 따라 사고가 굉장히 달라지고, 호감하면 내 것으로 삼고 반감하면 배척하는 호불호가 분명한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호감과 반감은 상당히 변화무쌍합니다. 이 시기의 영혼 특성과 맞물려 짧게 왔다갔다하는 시기입니다. 좋았던 게 싫어지고, 싫었던 게 좋아지는 게 자주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감각혼도 마찬가지로 그전부터 작업을 해왔지만 이 시기는 특히 젊은이가 직업을 선택하는 때이므로 자신의 호감과 반감이 직업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시기입니다. 교사로서는 어린 시기의 아이들을 만나기 때문에 호감과 반감이 내적 성장에 영향을 끼치지만 젊은이는 직업 선택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반감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용어라기보다 거리를 두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반감의 좋은 특성은 어느 정도 선을 갖고 분리를 하면서 나의 능력을 계발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예전에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를 돌아보자면, 전쟁 상황을 목도할 때는 상당히 반감이 작용합니다. 이 세상에 저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면서 반감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도 그 내면에서 또 다른 것이 형성됩니다. ‘이상적으로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내면에서 형성될 수 있습니다.

 

반감의 또 다른 긍정적 특성은 그간 살아온 삶의 동력을 우리 의식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 끝나는 게 아니라 비로소 본격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감각혼의 시기가 지나면 지성혼의 시기가 옵니다. 28세부터 35세까지의 시기입니다. 호감과 반감의 작용과 밀접한 감각혼과는 다릅니다. 지성혼의 시기에서는 그 이전처럼 내면을 바라보는 시기가 아니라 반대쪽에서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반감의 분리된 간격을 통해서 대상화하여 볼 수 있습니다. 사고의 힘으로 말입니다. 판단, 분석, 반추(반사). 바로 지금 이 강의 시간에 가장 필요한 힘이 지성혼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몸은 하나의 일체인데 이렇게 분석을 합니다. 대체로 감각혼과 지성혼이 섞여서 사고를 합니다. 여러분은 객관적인 사고를 하지만 어떤 사람은 감각혼의 반감의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호감이 있어서 뭔가를 조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지성혼의 시기까지가 이 시대 인류가 도달한 시기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시기는 지성혼까지 발달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각 민족과 나라를 살펴보면 감각혼의 시기에는 전쟁과 충돌이 자주 벌어집니다. 아직도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그 반면에 지성혼의 시대에서는 과학적인 방법론이 등장하며 분석과 판단의 힘을 통해 외형적인 것을 정확하게 바라봅니다. 법칙성을 찾아내고 발달하는 지성혼의 힘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28살 이전의 사람은 지성혼이 없는 걸까요? 물론 28살이 안 된 분이라 하더라도 지성혼이 없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여러분도 관찰을 잘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1세가 되면 영혼의 힘이 다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혼의 특성도 이미 21세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각 단계의 영혼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실현됩니다. 21세까지의 첫 단계에 비해서 생리학적으로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21세 시기, 즉 자아 완성의 시기란 비로소 자기 내면의 영혼이 작용을 하면서 이 세상에 펼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슈타이너는 인류의 발달과정이 모두가 함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또 다른 발달단계를 겪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성혼까지의 발달특성을 갖고는 모자란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특성의 발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개의 개념(감각혼, 지성혼)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두 단계의 영혼은 지금까지의 인류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감각혼의 시기를 이집트 시기와 연관시켰습니다. 지성혼의 시기는 그리스-로마 시기부터로 보았습니다. 사고와 판단, 학문의 시기입니다. 당연히 전세계의 문화권에도 각 단계에 따른 발달을 겪었습니다. 슈타이너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힘의 특징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발달에 따른 특징이 인류 발달의 밑거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발달해 나가게 된다면 각각의 고유한 문화권들이 스스로 발달해 나가게 됩니다.

 

우리 한 번 스스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감각혼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어떨까요? 호감을 갖고 작업할 때도 있고 반감을 갖고 작업할 때도 있지요. 교사회가 이러한 상태에 있다고 해봅시다. 어떨까요? 교사회에서 어느 사람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 아주 호감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주 반감을 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면서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보다시피 감각혼의 힘만으로는 힘듭니다. 한 번 그 다음 단계도 생각해 봅시다. 판단, 분석, 반추의 사고를 가진 사회 말입니다. 유전공학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유전자조작의 경우에도 기술적인 면은 이해할 수 있지만 생명작용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들에서 자라는 농작물을 보고 화학적으로 분석할 수는 있지만 필요한 생명적인 힘을 이해하고 풀어나가기도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과 법칙의 힘으로 농업 등에서 여러 가지를 조작해내지만 광범위하게 생명 질서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상황입니다. 분석과 법칙을 규명하는 힘으로 기아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환경문제나 유전자조작문제 등 새로운 문제에 우리는 직면하게 됩니다. 잘 살펴보면 이러한 힘의 특성은 이 사물과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외형적인 특성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꽃병에서 해바라기를 하나 가져오겠습니다. 이 해바라기를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개념과 작업이 필요합니다. 유전공학에서는 물질의 분자 구조를 아주 명확히 묘사해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과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해바라기를 창조주가 만든 것처럼 따라가 보려면 어떤 힘과 관점이 더 필요할까요? 외형적으로 보면 이렇게 위로 올라와 있습니다. 줄기가 올라와 있고 줄기 사이에 잎사귀가 돋았고 지금 보니까 이 잎사귀가 피곤해 보입니다. 아직 꽃은 깨어 있습니다. 잎사귀를 피곤한 우리의 몸이라 한다면 꽃은 깨어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꽃잎을 볼 수 있고 화분과 수술 등 다른 구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혼의 작업은 충분치 않아 보입니다. 좀더 잘하려면 자연 속의 해바라기를 봐야겠죠.

 

우리는 보통 자연 속의 식물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뚝 끊어서 식물도 동물도, 심지어는 인간도 그렇게 관찰합니다. 일단 우리는 자연으로부터의 연결을 끊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죽어 가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다 조각조각 내서 분석합니다. 현미경이 필요합니다. 우리 눈이 자세하게 볼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현미경이 우리의 눈을 강화시킨다면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좀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해바라기의 본성과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미경으로 더 깊이 자세히 관찰한다고 하지만 그건 항상 외형적으로만 관찰하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식물이나 동물을 본질적으로 어떻게 관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제안합니다. 사실 우리가 은연중에 알고 있거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바로 나와 다른 존재를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존재의 본질을 내 안으로 가져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낯선 사물이 여기 있지만 그것과 내가 일체가 되고 내가 그 존재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린이를 관찰하고 바라볼 때도 어린이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사랑의 경로를 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깊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대상을 정말로 알고 싶다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슈타이너는 그 사랑하는 힘을 의식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고통스러워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영혼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 내 아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 원인을 알 수 없더라도 고통 받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친구 중에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나도 유쾌함이 전염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지성혼과 조금 다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의식혼의 작용입니다. 지성혼은 항상 외형적이고 대상화된 시각입니다. 이와 달리 의식혼에서는, 내 안에 형성된 사고란 상대방의 내면에 일어난 것을 내 안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그래서 우리의 교육적 과제가 어린이가 가져온 어떤 동력을 펼쳐 나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의 발달은 거의 한 세기를 지나서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러한 힘을 발달시키는 것이 굉장히 고단하지만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새로운 능력을 계발시키지 못한다면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지학과 연관된 유전공학자도 있습니다. 그런 분이 저를 초대해서 가게 되었는데요, 거기는 당연히 생명공학을 하는 곳임에도 생명을 다 죽여서 가져와 죽음의 나라라고 할 만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의 실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일정과도 연관을 갖는 실험입니다. 의식혼을 이해하면서 사회삼원론에서 왜 이러한 의식혼의 시대가 필요한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연습을 하길 원했습니다. 우리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요.

 

여기 하나의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뭐든지 처음에 연습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이제 여러분들이 해봐야 하는데 외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관찰을 해보십시오. 개인적인 생각과 환상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고와 상상으로 씨앗이 자라나는 걸 떠올려 보십시오. 이 씨앗을 결코 다른 것과 분리하지 않고 주변의 흙과 햇빛, , 생명체와 연관을 지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이 물질적인 작용에 의해 싹이 트고 뿌리가 처음 자라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점점 줄기가 자라고 잎사귀가 생기고 점점 올라가면서 꽃봉오리가 형성되기 위한 단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봉오리는 점점 꽃으로 피어나고 그 속에는 씨앗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꽃이 시들면 식물이 죽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지 않고 여기서 나온 씨앗은 땅에 떨어져 살아서 올라옵니다.

 

의식혼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이 꽃의 본질을 쫓아가면서 우리의 사고를 형성한 것처럼, 이 식물의 본질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것입니다. 식물의 관찰을 내 내면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내 안의 정신적인 상을 하나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내면의 고유한, 또 다른 특성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형성되는 어떤 것은 상대방 안에 있는 것을 사랑을 통해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하는 작업은 이 해바라기의 모습을 정말로 잘 고찰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며 영혼 안으로 가져오면 상대방은 진실로 이해가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런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데, 이것은 사실 상당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본질적인 것을 우리 안으로 가져와 사고하고 그것을 펼쳐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를 유기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 반드시 해나가야 하는 작업입니다.

 

 

 

[출처 : 한국발도르프학교교사연합 제1회 연수강연록, <인간 발달과 의식혼 - 2010년 7월 20일 화요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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