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담론 이론 vs 비판적 실재론 본문
담론 이론 vs 비판적 실재론
대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x 로이 바스카
번역: 현우식(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수료)
1998년 3월 에섹스(Essex) 대학에서 열린 토론회의 편집본을 번역한 글입니다. 이 편집본은 「Journal of Critical Realism」Volume 2, Isssue 2(1998)에 수록되었습니다. 토론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로이 바스카(Roy Bhaskar)에게는 각 30분의 발언시간과 10분의 토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토론 후 이어진 긴 대화는 생략했습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담론 이론(discourse theory)과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 사이의 이론적 접근이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담론 이론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과학적’ - 그것이 어떤 의미든 간에 – 실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좁은 의미에서 담론 이론은 텍스트를 분석하기 위한 일련의 방법론적 규칙을 말합니다. 반면 비판적 실재론은 몇 가지 인식론적 결과들과 관련된 전체적인 존재론(whole ontology)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두 접근 사이의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영역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저와 많은 동료들은 여기 에섹스에서 담론 이론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담론 이론에는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몇 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비판적 실재론과의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영역을 식별하기 위해 우리의 작업에 약간의 수정(violence)을 가하고자 합니다.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담론 이론에는 4가지 핵심 원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담론 이론은 모든 가능한 대상을 구성하며 실재(reality)로의 접근을 매개하는 일반적인 문법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우리가 담론이라고 부르는 이 문법은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당신이 문법을 익히기 전에 모국어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문법학자의 일이 언어를 구성하는 내재적인 문법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라면, 담론 분석가의 일은 모든 종류의 의미 있는 개입(meaningful intervention)의 기저를 이루는 내재적인 문법을 탐색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담론을 말하기와 쓰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담론은 단지 언어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난 30년 동안 언어에 대한 통념(notion)은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그 결과 엄밀한 의미에서의 언어라고 불리는 대상의 특수성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반면에 언어는 모든 가능한 경험을 구성하는 차원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language game) 개념은 언어적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언어 게임은 언어와 행위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며, 거기에는 두 요소들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조합의 결과 만들어진 단어와 행위의 총체성(totality)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언어 게임을 우리는 담론이라고 부릅니다. 구조주의 언어학이 점점 더 공식화(formalization)되면서 우리는 담론에 대한 확장된 개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언어 구조는 물질성, 즉 말하기와 쓰기와 같은 ‘실체(substance)’에 점점 덜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점에서 담론은 모든 가능한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관계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셋째, 우리는 담론적 실천의 대상이 되는 대상이 복수로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를 순전히 진술적(constative)인 차원으로 다룰 수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모든 언어의 작동에는 수행적(performative) 차원이 내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는 담론에 전적으로 내재적입니다. 당신은 원한다면 담론 개념을 실천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담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하긴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실천을 담론이라고 부름으로써 다른 방법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언어의 파생(derivation)과 같은 실천적인 담론 구조의 몇 가지 양상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조금 장난스럽게(frivolously) 말하자면, 실천은 매우 중립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실천이라는 단어는 누구의 분노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는 개념은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자극과 재미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저는 실천보다 담론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합니다.
마지막으로, 담론 이론은 다양한 형태의 존재론과 인식론과 대립하지만, 주요한 철학적 접근은 무엇보다 관념론과 대립합니다. 관념론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관념론은 실재(the real)를 사유(thought)로 환원합니다. 낡은 실재론자(old realist)들은 사유와 대상(thing)이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양자 사이에는 기본적인 동일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관념론의 본질은 이런 식으로 물질적 요소들을 특정한 보편적인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담론 분석은 실재와 담론 사이의 환원불가능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관념론적 전통의 관점을 깨트리고자 합니다. 둘째, 관념론은 정신(mind)과 주체의 통일성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형태의 재현들(representations)과 관련된 ‘나(I)’라는 존재의 통각(apperception)의 통일성을 주장합니다. 담론 이론에 의해 통일된 주체라는 범주는 명확히 위협받게 됩니다. 담론 이론이 가정하는 주체 형성의 복수성은 단일한 단위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이런 식으로 저의 주장을 설명한다면, 비판적 실재론과 담론 이론이 만나는 지점과 갈라지는 지점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두 가지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경험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귀납(induction)의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변환(transduction)이라고 불리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1]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초월적(transcendental)인 방식의 설명에 관한 것입니다. 담론 이론과 비판적 실재론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추구하는 존재론적 실재론(ontological realism)이 아니라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입니다. 그러나 비판적 실재론이 초월적인 것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비판적 실재론의 몇몇 입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담론 이론가와 비판적 실재론자들이 핵심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대상의 타동성(transitivity)과 자동성(intransitivity)의 구분과 관련이 있습니다.[2] 저는 타동성 개념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비판적 실재론이 사유 속의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추구하는 소박한 이론(naive theory)과 구분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자동성 개념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로이(Roy)의 작업에서 대상의 자동성은 최종적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암시적으로만 제시됩니다. 그는 심지어 자동적 차원의 구조, 생성적 기제, 인과적 힘 등을 언급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들 각각은 동의어가 아니며,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구체적인 이론적 결과들입니다. 초월적인 접근은 대상의 자동성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요? 우선, 비판적 실재론에서 초월적이지 않은 접근은 배제됩니다.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재현은 가변적인 근사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비판적 실재론에는 적어도 선험적으로 그리고 기본적인 차원에서 결정할 수 없는 고유의 구조가 있는 대상의 자동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교조적(dogmatic)인 접근이 될 수 있습니다. 타동적인 변이로부터 배제된, 타동적 차원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동적 차원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로이가 제기하는 논증은 교조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월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주장입니다. 그는 만약 과학이 가능하려면 세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3] 말하자면, 그는 칸트를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지만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초월적 주장을 하기 위해 칸트적인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를 끌어들입니다.
여기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의 사실적 성격입니다. 칸트는 지식의 사실성(factum) 자체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지식의 사실성이 존재하면 문제는 그 존재의 가능성 조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물리학과 수학에서는 선험적 주장들을 종합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도덕의 사실성은 또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출발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첫째, 애초에 복수의 과학 담론이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담론이 서로 매우 차별화되는 가능성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로서의 과학은 어느 정도까지 하나의 총체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과학이라는 개념을 총체적이고 통일된 코드로 다룰 수 있습니까?
둘째, 여기서 아직 제기되지 않는 문제는 과학의 가능성 조건 그 자체에 대한 고유의 설명이 가능한가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만약 – 저의 관점과는 다르지만 - 실용주의자(pragmatist)나 협약주의자(conventionalist)의 관점을 받아들여 “우리의 담론, 즉 과학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대상 그 자체에 정박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한 가지 예로 후설은 과학 활동을 생활 세계와 초월적 주체의 경험 전체에 새겨넣음으로써 과학적 활동의 가능성 조건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과학의 가능성 조건은 이미 존재합니다. 누군가 역시 하나의 사실성을 갖는 점성술(astrology)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지에 대해 물어 본다고 가정해 봅시다. 저는 점성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련의 존재론적 고려에 따라 즉각적으로 점성술의 가능성 조건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그 자체로 비일관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경험이 이런 존재론적 가정과 양립할 수 없는 일련의 담론적 사건들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현대적 의미의 과학 담론이 점성술 담론보다 더 유효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더 넓은 경험의 영역을 헤게모니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효하게 받아들여지는 담론은 언제나 바뀌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논의를 위해 제가 사실적 관찰에 근거하여 과학적 예측을 수정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실적 사건들은 사실들이 구성되는 서로 다른 담론들의 집합입니다. 요점은 이런 담론들의 복수성이 통일되지 않으며, 일관성 있는 전체로 정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가 가정하는 통일된 과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판적 실재론이 인정하듯이 과학적 담론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를 담론적 변이의 세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에 정박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상대주의가 아닙니다. 나의 경험을 구성하거나 조직하는 담론이 복수로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 복수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신의 산물이 아닙니다. 담론들은 일련의 경험을 조직하는 제도들에 정박되어 있을 뿐입니다. 어떤 면에서 의미는 현실의 차원 중 가장 물질적입니다. 반면에 이런 방식으로 조직된 세계는 가능한 세계 중 하나에 불과하며, 과학의 세계는 대상의 다양한 차원을 제거하는 것을 토대로 구성됩니다. 경험 속의 모든 규칙성의 토대로서 모든 경험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대상의 자동성은 타동적으로 여겨지는 담론들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인정될 수 없는 또 하나의 담론일 뿐입니다. 저는 비판적 실재론의 가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상의 자동성이라는 개념을 또 하나의 담론적 요소로서 통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의 자동성은 그 자체로 타동적입니다.
사회 이론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담론 이론은 비판적 실재론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담론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로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제가 생각하기에 비판적 실재론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론보다 더 넓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세계와 비판적 실재론 논의에서 핵심적인 주제인 자연주의(naturalism)의 한계와 관련하여 담론 이론은 비판적 실재론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4] 자연주의는 대상을 담론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사회의 기본적인 문법을 구성하는 담론적 영역의 심층적인 가능성과 관련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방법론적 전체론(holism)과 개체론(individualism)의 문제에서 비판적 실재론과 담론 이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사회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저는 비판적 실재론과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사회적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구조적 전체를 정의상 불완전한 것으로 봅니다. 이런 불완전성은 사회가 구조적 수준에서 도달할 수 없는 통합을 상상적 수준에서 재구축하고자 하는 일련의 실천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 줍니다. 담론 이론의 기본 주장 중 하나는 담론적 총체성이 토대(ground)가 아니라 현상학적 의미에서의 지평(horizon)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구조와 행위의 문제를 전체 사회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을 통해 접근합니다. 이 문제는 두 범주의 보편화를 통해서 해결될 수 없으며, 두 범주를 개념적으로 양립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손쉬운 구조화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우리가 행위와 구조의 양립 불가능성의 문제가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 그 자체에 기입되어 있는 문제라는 점을 받아들일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담론 이론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용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부정성(negativity)와 적대(antagonism)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는 그 자체로 부정적 관계를 포함하며, 어떠한 형태의 실정성(positivity)으로 되돌릴 수 없는 적대 개념과 사회에 대한 자연주의적 개념들이 양립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저는 헤겔 변증법이 부정성의 파괴적 성격을 특정한 통일성의 원리로 환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변증법적 운동은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우연성도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적대는 제가 여러 곳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사회적인 것에 구성적입니다. 적대는 경험적 추론이 아닌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의 결과입니다. 사회적 총체성은 필연적이지만, 그 자체로 구성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의 기본적 주장은 적대가 사회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객관성이 그것의 궁극적 한계를 경험하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비판적 실재론에는 적대와 부정성에 관한 개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제가 제기한 많은 문제와 마찬가지로, 로이에게 답변을 듣고 싶은 부분입니다.
로이 바스카: 미리 토론을 준비해오긴 했지만, 에르네스토(Ernesto)의 논평이 제기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에르네스토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존재론과 관련하여 그는 몇 가지 멋진 구분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회 이론의 본질과 관련한 주제이고, 세 번째는 부정성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세 번째와 관련한 지적은 –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신다면 –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변증법(Dialetic)』과 『플라톤 외(Plato Etc)』라는 두 개의 거대한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이 책들은 제가 서양 철학에 근본적인 실패라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해 오직 실증적인 설명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향을 존재론적 일가성(ontological monovalence)이라고 불렀습니다.[5] 그리고 저는 부정성의 우위, 현전(presence)에 대한 부재의 우위를 강조했으며 변증법을 부재의 관점에서 정의했습니다 … 제 생각에 이것은 지난 몇 년간 비판적 실재론이 발전시킨 변증법적 비판적 실재론(dialectical critical realism)의 핵심 주장입니다. 여기에는 비판적 실재론의 이전 단계와의 단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주제에 관한 당신의 비판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답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총체성에 대해 당신이 말한 것에 동의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총체성이 반드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은 비판적 실재론의 주요 테마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현실을 폐쇄하고자 하는 어떠한 섣부른(premature) 시도에도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사회적 총체성을 포함한 모든 총체성들은 개방되어 있으며, 폐쇄된 총체성과 체계에 대한 신화는 경험주의자들의 관념론적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총체성이 토대가 아니라 지평이라는 당신의 설명을 좋아합니다. 제가 토대들(gounds) 또한 원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서로 다른 총체성들이 재귀적으로(recursively) 얽혀 있으며, 한 총체성이 다른 총체성들에 대한 토대로 기능할 수 있는 복수의 총체성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총체성들이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따라서 부재와 부정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총체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에르네스토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약 그가 부정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제 생각에 사회세계는 모순, 부재, 변증법 개념을 둘러싸고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헤겔이 그의 현실적 실천(actual practice) 속에서 변증법에 막대한 해를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철학은 존재론적으로 일가적(monovalent)입니다. 이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통찰이었으며 헤겔주의 좌파 역시 그렇습니다. 누구도 실재에 대해 그런 식의 마술적 조작(conjuring trick)을 할 수 없습니다. 비판적 실재론의 변증법에는 네 가지 용어가 있습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헤겔 변증법에는 동일성, 부정성, 그리고 총체성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비판적 실재론은 여기에다 비동일성(non-identity)이라는 용어를 추가합니다(여기서 저는 당신이 말한 타동성과 자동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비동일성은 존재와 사물, 인과적 법칙과 사건들의 끝임없는 결합, 구조와 사건, 실재와 현상, 현상과 경험, 실정성과 부정성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비판적 실재론이 계속해서 강조해온 부분입니다. 우리는 부정성의 두 번째 계기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중요한 문제이며, 현전을 넘어서는 부재의 존재론적 힘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성의 본질로 인해 발생합니다. 세 번째 계기는 우리가 이미 개방되어 있다고 말한 총체성입니다. 네 번째 계기는 헤겔 변증법에서 완전히 빠져 있거나 결국에는 빠져 있는 것으로서 변형적(transformative)인 실천입니다. 변형적 실천은 역사가 종결하지 않도록 보증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이 행성을 폭파하는(blowing up) 데 성공하더라도, 결국에는 어떤 종류의 과정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총체성과 부정성이라는 두 가지 논점 사이에서 우리 사이에 논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존재론과의 관련한 실체(substance)의 문제가 있습니다. 존재론이란 무엇입니까? 존재론은 존재에 대한 이론입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은 존재를 지식으로, 인식론으로 환원하고자 했습니다. 에르네스토의 발언을 고려할 때, 그는 그런 전통에 반대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서양 철학의 기초이기도 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c)입니다. 제가 담론외적인(extra-discursive) 실재의 성격을 주제화(thematize)하려는 동기 중 하나는 이런 인간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초월적 주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인간 존재가 없는, 그러므로 담론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믿습니다. 비판적 실재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의 일반적 본질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구조화되고, 분화되고, 개방되고,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들은 초사실적(transfactual)이며, 고유의 모순과 적대에 의해 구성되며, 이성, 지성 또는 담론적 실천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초월적 논증을 통해 가능합니다. 에르네스토는 초담론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동의합니다. 비판적 실재론은 초담론적 실재가 특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그 형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형태를 잘못 이해하면, 그것은 당신의 지식 이론에 암묵적으로 반영될 것입니다. 그 예로 하버마스를 들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존재론을 전혀 신뢰하지 않으며 인간과학에 관해서는 실증주의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구적 이성을 설명할 때는 자연 세계가 끊임없는 사건들의 결합(conjunction)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과적 법칙은 경험적 규칙성으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에서의 설명은 연역적인 논리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과학뿐만 아니라 세계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잘못된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에르네스토는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초월적 주장을 할 때 특정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데, 그러한 전제들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 사이의 논점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저는 실험 활동을 기본적인 전제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에서 실험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사회과학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경험주의자의 이데올로기, 과학의 이데올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 몇몇 실험이 가능한 자연과학이 실험에서 발견된 것들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실험이 가능하려면 세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경험주의의 분석에 대해 논쟁적이고 비판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이것에 대해 제가 여기서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실험적인 자연과학에서 과학자들은 인위적으로 폐쇄된 시스템을 설정합니다. 이 인위적 활동은 경험적 규칙성이라는 변치 않는 결합을 얻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폐쇄된 시스템 바깥에서는 그러한 규칙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실험 안에서 수행되는 이런 활동이 중요한 이유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시스템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실험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 지에 대한 인식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중력 법칙은 우리를 이 건물의 6층에서 1층으로 끌어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법칙은 그 법칙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반대 힘이 있다는 사실과 독립적으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특정한 상황에 대한 올바른 과학적 설명의 사례입니다. 우리는 실험물리학과 화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정한 형태의 존재론, 특정한 형태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개입하고 있고, 자연은 고유의 구조와 초사실적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 그렇게 낯선 입장과 전제입니까?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차 한잔을 끓이고 거기에다 설탕을 넣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녹아 사라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설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차 안에는 설탕을 녹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자의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물리학과 화학에서의 실험과는 다른 방식의 일반적인 실험으로도 세계에 대한 동일한 일반적 가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세계는 구조화되어 있으며, 초사실적 법칙들에 의해 경향적으로 지배되고, 거기에는 복수의 기제와 구조가 작동하며 세계는 서로 내적으로 관계를 맺는 여러 시스템들의 개방적인 시스템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담론은 세계에 대해 작동하는 효과적인 기제의 한 가지 사례이며 이 역시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담론에 영향을 줍니다 – 아마 이것은 우리가 이후에 보다 정교하게 토론할 주제일 것입니다. 저는 실험적 활동에 대한 초월적 실재론의 기본적 전제가 실로 경험주의의 강력한 토대와 관련한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비판이 강력(invincible)하며, 실험이 가능한 자연과학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 지점에서,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이 제공하는 세계에 대한 가정은 실험이 불가능한 사회과학, 지질학, 생물학의 가정과는 다르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제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주장이 초월적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믿는 무엇인가에 대해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모든 초월적 주장들은 전제 수준에서 상대화될 수 있으며, 저는 원칙적으로 무한한 전제와 실천이 있다는 점에서 에르네스토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양자역학과 같은) 아주 작은 영역과 아주 큰 영역에서는 고전적인 실험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 활동의 다른 측면에 대해 논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어떤 형태의 활동으로 상대화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세계 안에서 당신의 실천은 암묵적으로 특정한 존재론을 가정하게 될 것입니다. 흄(Hume)의 사례를 들어 봅시다. 흄은 우리가 2층의 창문이 아닌 문으로 나가야 할 더 나은 토대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실천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일종의 약속을 하고, 또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뉴턴의 중력법칙이 옳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약속을 할 수 있고 또는 다른 알려지지 않은 어떤 믿음에 근거하여 약속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실제로 행동하는 방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반박입니다. 당신은 실험이 가능한 자연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험 및 응용 과학 활동으로부터 세계의 일반적 형태에 대한 초월적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담론적 실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실험적 자연과학과는 다르지만 유사한 방식으로 전제를 내려야 합니다. 저의 두 번째 주장은 실험적 자연과학이 가정하는 존재론의 형태는 다른 과학, 예술, 일상생활에서의 매우 단순하고 일상적인 활동으로부터 초월적 논증으로 확립할 수 있는 형태와 완전히 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담론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초담론적 실재의 존재에 대한 초월적 실재론의 주장은 무엇일까요? 물론 세계의 일반적인 형태, 존재론의 일반적 유형, 존재론의 성격, 존재론의 내용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저는 다른 누구 못지 않게 칸트에 반대합니다. 당신은 칸트가 우리가 현상적인 세계를 구성할 수 있지만 그 배후에는 물자체(noumenal)의 세계가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에르네스토는 우리는 현상적인 세계를 담론 속에서 구성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 이러한 담론 밖에 그것이 궁극적으로 참조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세계의 성격을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 실천의 가능성 조건에 의해 상대화되는 초월적 주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담론적 실천 없이 우리는 철학을 할 수 없지만, 철학은 우리가 담론적 실천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담론적 실천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철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철학에서 매우 익숙한 이원론, 즉 정신과 육체, 이유와 원인,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순전히 자연적인 것이라는 일련의 이원론에 직면하게 됩니다. 저는 – 제가 틀릴 수도 있지만 – 담론 분석의 주장 중 일부는 이런 이원론에 갇혀 있다고 느낍니다. 만약 제가 틀렸더라도, 담론 분석은 담론, 담론적 실천이 물질적 세계와 끊임없는 인과적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관념은 인과적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실천 역시 인과적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세계 그 자체 역시 실천에 대해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지구 온난화가 우리의 사회적 실천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런던의 교통 시스템을 수년간 방치했던 것이 런던에서의 사회적 실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는 반동(recoil)이 있으며, 저는 그것의 물질적 효과와 무관하게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한 분을 모시겠습니다. 빌(Bill),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저는 지금 빌에게 무엇인가를 할 이유를 제공했고, 세계에 대한 저의 물질적 효과 덕분에 저는 일련의 소리를 내면서 그것을 했고, 빌은 나를 해석학적으로 이해하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세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신이 이유와 원인 그리고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 그리고 사회와 담론적 실천이 자연과 생물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 우리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철학적 이원론과 결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에르네스토가 이런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의 작업이 이러한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우리는 저녁 시간이 끝나기 전에 몇 가지 합의점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비판적 실재론과 담론 분석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에르네스토의 요점에 대해 간단히 답변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첫째, 우리는 세계의 일반적 성격에 관한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에게는 철학적 존재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론의 성격은 사회 이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에르네스토의 담론 분석은 담론적 실천 또는 추론과 초담론적 실재와의 인과적 상호작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저는 물론 모든 초담론적 실재가 그것의 이해가능성의 관점에서 담론적 실천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담론적 실재가 인과적 영향의 관점에서 담론적 실천에 의해 구성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구 온난화가 지구 온난화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존재해왔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질병이 인과적 영향을 발휘한 뒤 한참 후에야 질병에 대한 개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담론 분석은 담론적 실천과 현재 담론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것, 명백히 담론 외적인 것, 물질 세계의 일부이거나 우주와 같이 우리가 물질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사이의 인과적 상호작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두 가지 지점에서 우리는 멋진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우리에게는 철학적 존재론이 필요하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요점은, 철학적 존재론이란 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에게 철학적 존재론은 담론 안에서 구성되는 모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 그것은 모든 객관성의 구성과 관련한 수준입니다. 제가 담론이라고 부르는 더 기본적인 차원의 존재론으로 돌아가서 정교한 가능성의 조건을 갖는 자연과학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과학 담론(과학자들은 아마도 과학적 실천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이 규칙성을 토대로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침전된(sedimented) 사회적 실천과 다양한 담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구성은 그것에 앞서는 담론적 가능성의 조건을 갖습니다.
당신의 두 번째 요점과 관련하여, 저는 담론적인 것과 초담론적인 것의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담론이 그것에 외재적인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에게는 외재적인 세계 또한 역시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실천이 언어적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저쪽에 가서 문을 열 때 한편으로 저는 문을 열고 싶어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사실이 저에게 문을 연다는 물질적 행위를 하도록 강제합니다. 이런 행위의 수행성을 저는 담론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담론이 특정한 형태의 물질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질적 효과를 생산하는 물질적 행위가 바로 담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부터 담론적 작동에는 수행적 차원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 이유입니다. 수행적 차원은 단순히 거기에 더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최종적으로 담론과 실천이 동일한 범주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명백하게 모든 실천은 그것이 과학적이든 아니든 세계에 대한 몇 가지 가정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들은 완벽하게 모순적입니다. 예를 들어, 법적 실천에서 처벌(punishmnet)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떤 행위를 저지르거나 저지르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유로운 법적 주체를 가정합니다. 반면에 과학 담론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결정론을 믿습니다. 이 두 가지 답변은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인간에 대한 가정을 바탕으로 작동하며 여기에는 이 모든 실천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통일성이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모든 종류의 실천이 그것이 과학적이든 아니든 다른 복수의 실천들과 마주하여 스스로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아주 쉽게 세계에 대한 가정과 암묵적인 존재론 등을 포함하는 완벽하게 일관된 담론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담론은 그것이 저의 설명 안에서만 일관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세계를 조직하는 많은 여타의 담론적 사건들과 충돌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모든 종류의 과학적 실천은 헤게모니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과학적 실천이 다양한 다른 실천에 의해 구성된 법정(tribunal) 앞에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가 자동성 개념에 이의(objection)를 제기한 이유는 이 개념이 우리의 실천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점은, 당신이 대상의 자동성과 타동성에 대해 말할 때 그 자체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가정들에 입각해서 말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자동성과 타동성의 구분은 그 자체로 타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로이 바스카: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적 존재론과 과학적 존재론, 그리고 존재론과 존재 사이에 대한 몇 가지 구분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존재론의 주제는 현전뿐만 아니라 부재, 총체성, 내적 관계성, 이유, 원인 등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포함하여 더 넓게 확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존재이고, 그리고 어떤 것들은 과학이나 철학 담론에서의 구성과 독립적으로 존재(being)하거나 실존(exist)하며,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세계의 일반적 성격이 어떤지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리고 당신은 초월적 주장을 토대로 당신이 유효하다고 믿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명백히 점성술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편적 결정론과 자유 의지에 대한 당신의 설명을 고려하면, 저는 이 둘이 실제로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곳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존재론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존재론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은 그 참조점(referent)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참조하고, 세계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조하고자 하는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행위와 욕망(desire)이 작동하는 방식이니다. 제가 물을 마시길 원하다면, 저는 반드시 욕망하는 주체로부터 물을 분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욕망하는 행위의 참조점입니다. 당신은 담론적 구성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참조점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는 당신에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1,500만년 전의 세계나 1,500만년 전의 지구는 그것의 담론적 구성과 독립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거기에는 전혀 이견이 없습니다(No quarrel).
로이 바스카: 이견이 없습니까? 알겠습니다. 이 점에서 당신은 이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구 온난화는 그것의 담론적 구성에 선행하여 존재했습니까? 암(cancer)은 특정 형태의 질병으로 식별되거나 발견되기 이전에 존재했습니까?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저는 지구 온난화가 그것을 지구 온난화라고 부르는 담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구 온난화’가 무엇인가를 분류하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 [첫 번째 테이프 종료]
로이 바스카: 당신은 지구 온난화와 관련하여 담론 독립적인 실존적이고 자동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기의와 기표의 수준으로 되돌리고, 대상은 오직 담론적 구축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여기, 인간 존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참조점에 대한 충분히 엄격한 개념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집니다. 당신은 참조점을 다시 담론적 구성의 수준인 타동적 차원으로 끌어 내립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이 바스카: 이제 저는 참조점의 범주를 인과 법칙, 인과성의 일반적 구조, 제가 초사실적 영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여 확장하고자 합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이 지점에서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로이 바스카: 알겠습니다. 당신은 사물을 [역자주: 담론으로, 타동적 차원으로] 둘러싸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참조점의 범주를 개방된 총체성, 부재, 그리고 제가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를 향한 열망을 포함하도록 확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자동적 차원에 대한 과감한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는 모든 것은 물론 담론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기표와 기의의 차원에서 그럴 뿐이지 참조점의 차원에서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쪽에 특정한 인식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지구는 그것이 담론에 의해 포착되었는지와 무관하게 1,500만년 전에도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제가 만들어낸 개념은 아닙니다만) 기호학적 삼각형(semiotic triangle)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많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은 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설명은 참조점과 단어, 기표 또는 문장들, 그리고 그것의 의미 또는 기의를 명확히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참조점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이것은 기표와 기의의 수준, 과학의 타동적 차원의 구성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끝)
각주
1. [역자주] 귀납법은 한정된 수의 사례들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하여 일반적인 규칙을 추론하는 방법을 말한다. 반면 전환법은 한정된 수의 사례들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하지만 이로부터 특정한 테스트 데이터를 얻는 방법이다. 경험주의의 문제는 한정된 수의 사례에 대한 관찰로부터 언제나 그런 규칙성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편적 주장으로의 비약이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라클라우는 이를 경험주의가 존재론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그것을 인식론으로 환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 [역자주] 이 논쟁이 비판적 실재론을 둘러싼 논쟁임을 고려하여, 비판적 실재론의 용어를 차용하여 transitivity를 타동성, intransitivity를 자동성으로 번역하였다. 바스카는 우리의 지식과 독립적인 현실 대상이 존재하지만 인지적 개념화 없이는 현실 대상이 인식될 수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타동적/자동적 차원의 개념을 활용한다. 자동적 차원은 우리의 지식/담론과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의 차원을 지칭하며 타동적 차원은 그것에 대한 지식의 차원을 말한다.
3. [역자주] 초월적 논증은 어떤 현상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서술로부터 출발하여 그다음 그 현상이 가능하려면 사정이 어떠해야 하는가의 질문을 제시하는 방식의 논증이다. 바스카는 과학적 실험이 가능하려면 사정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과학적 실천의 가능성 조건을 밝히고자 한다.
4. [역자주] 자연주의란 사회과학에도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다는 과학철학적 입장을 말한다. 자연주의의 한계는 그 범위가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와 관련된다.
5. [역자주] 존재론적 일가성이란 존재를 현전 또는 순수한 실정성(positivity)으로 가정하는 인식론적 태도를 일컫는 용어이다. 바스카는 존재론적 일가성으로 인해 지식의 긍정적 성격이 지나치게 강화됨으로써 지식을 독단에 흐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고 존재가 지식에 관한 진술로 환원되는 인식적 오류가 동반될 수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출처 : https://en-movement.net/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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