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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의사소통 행위이론과 생활세계 식민화 테제 - 김원식 본문
하버마스, 의사소통 행위이론과 생활세계 식민화 테제
김원식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1. 의사소통 행위이론
하버마스는 상호 주관성의 측면에 착안하여 포괄적인 이성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근대적 이성의 협소화를 비판하고, 나아가서 복합적인 근대의 차원들을 포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김원식, 2012: 203-204). 이러한 그의 작업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의사소통적 행위(Kommunikatives Handeln)라는 개념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통해 고립된 주체관에 기초한 근대적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을 상호 주관성에 기초한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베버를 비롯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로 하여금 근대화 과정을 단지 도구적 이성의 지배나 그로 인한 총체적 물화(物化)로 진단하게 만든 근본 원인 중의 하나는 그들이 사회적 행위를 협소하게 규정한 데 있다. 베버는 사회적 근대화에 대한 해석에서 목적합리적 행위 유형의 확산에만 주목하였으며,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근대화 과정뿐 아니라 문명화 과정 전체를 자기 보존을 위한 도구적 행위와 도구적 이성의 확대 과정으로 해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도구적 행위로 환원하는 이러한 해석의 근저에는 근대적 의식철학 모델이 존재한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데카르트 이후 자기의식의 확실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근대 의식철학은 주체와 객체라는 근본 구도 속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그리고 주체-객체 구도를 전제하게 되면 타인을 포함한 세계 전체,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 역시 주체의 대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행위의 근본 모델로 삼는 의사소통 패러다임을 도입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이제 하버마스는 사회적 행위의 유형을 도구적 행위, 전략적 행위, 의사소통 행위라는 유형들로 분화시켜 나간다. 초기에 ‘노동과 상호작용’의 구분을 시도한 이래, 그는 도구적 행위로 환원될 수 없는 의사소통 행위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하버마스의 분류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크게 비사회적 행위인 도구적 행위와 사회적 행위로, 사회적 행위는 다시 성공을 지향하는 전략적 행위와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 행위로 구별된다.
도구적 행위나 전략적 행위는 비판이론 1세대들이 주목했던 인간의 행위 유형이다. 도구적 행위 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객체(대상)나 타자를 도구로 규정하고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개념적 사유는 이미 타자에 대한 동일화, 차이의 배제와 억압의 기제를 내장하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인간의 모든 인식과 행위는 자기 보존을 위한 타자에 대한 지배와 억압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계몽의 변증법』은 문명화 과정 전체를 인간의 자연 지배, 타자 지배, 자기 지배가 총체화되어 도구적 질서로 전면화되어가는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돛에 묶었던 오디세우스의 예를 통해서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자연 지배와 타자 지배가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언어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에게는 타자를 단지 도구화하지 않고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의사소통 행위의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의사소통 행위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상호 이해를 목적으로 서로의 행위 계획을 조정하는 데서 성립한다. 여기서 행위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츼 행위 계획에 대한 합의를 성취하고 이를 통해 서로의 행위를 조정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화용론적인 언어 분석을 통해 이러한 의사소통 행위 유형의 특징을 밝혀내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언어에는 상호 이해하는 본래적 목적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의사소통 행위 속에서 화자는 자신의 주장을 제기하며, 청자는 그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거나 그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다. 이러한 상호 주관적인 관계 속에서 주체는 타자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한다. 만일 이러한 상호 인정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합리적 대화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버마스의 분석에 따르면 화자의 주장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타당성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 진리(Wahrheit), 규범적 올바름(Richtigkeit), 진실성(Wahrhaftigkeit) 요구가 그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에서 이러한 타당성 요구의 복합적 차원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포괄적 이성으로서의 ‘의사소통 이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적 진리, 규범적 올바름, 의도의 진실성 여부 모두에 대해 비판과 논거를 통한 토론 및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영역들 전체는 이제 합리적 논의가 가능한 영역으로 인정된다. 그의 분석에서는 특히 사실적 진리에 대한 논의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규범적 논의들 역시 보편적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규범적 차원의 합리성을 회복해내는 것은 하버마스에게, 나아가서는 비판적 사회 이론 일반의 수립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성의 도구화는 모든 규범의 정당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철저히 도구적인 이성의 기준에서 본다면,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 그 어떤 이성적인 당위적 논거도 제시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사회 비판의 성립 자체도 불가능하게 만들 수밖에 없게 된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러한 비판이 전제하는 척도에 대한 보편적인 규범적 정당화를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사소통 행위와 이성이라는 개념에 기초해서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과 질서의 전면화라는 획일화된 일면적 사회관을 극복하고, 나아가서 포괄적 이성 개념을 기초로 이성의 일면화를 비판할 수 있는 기점을 확보하게 된다. 이제 본래적인 근대의 기획은 포괄적 이성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었지만, 자본주의적인 일면적 근대화로 인해 의사소통 이성의 파괴와 도구적 이성의 지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방식의 진단이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2. 생활세계의 식민화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의 전회에 기초하여 1세대 비판이론이 봉착한 난관들을 돌파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이층위적 사회 개념에 입각한 ‘생활세계의 식민화’(Kolonialisierung der Lebenswelt) 테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기존의 사회 이론들이 가지는 일면성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베버와 루카치, 그리고 그들의 작업을 수용하고 있는 1세대 비판 이론가들은 사회적 합리화의 과정을 단지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행위 및 질서의 확대 과정으로만 해석해왔다. 베버는 경제 체계나 행정 체계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행위 체계의 합리화만을 파악했을 뿐, 생활세계 내의 일상적 실천에서 나타나는 다차원적인 합리화 과정을 올바로 해명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베버는 결국 근대적 합리화 과정을 단지 목적합리성의 증대 과정으로만 해석하게 된다.
하버마스의 평가에 따르면 베버가 가지는 이러한 한계는 그의 행위 개념이 가지고 있는 편협성 때문에 나타난다. 베버는 그의 행위 이론적 전제를 통해서 사회적 합리화의 진행이 단지 목적합리성의 관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베버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와 성공만을 지향하는 행위를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사회적 합리화 전체를 목적합리적 행위와 그에 기초한 사회 질서의 확대 과정으로만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결함은 1세대 비판 이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해 루카치가 가지고 있었던 역사철학적 희망을 거부한 채 그의 사물화 이론을 수용했다. 그 결과, 그들 역시 근대적 합리화를 도구적 이성의 확대 과정에 지나지 않는 총체적 물화의 과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버마스는 이층위적 사회관을 통해서 근대적 합리화 과정에 대한 이러한 일면적 이해와 그에 따른 비관주의적 시대 진단에 저항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근대적 합리화 과정에 대한 새로운 진단과 해석의 개념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의사소통 행위와 합리성에 대한 하버마스의 탐구는 이를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에 기초해서 이제 그는 사회적 합리화 과정을 좀 더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두 차원에서, 즉 사회 통합과 체계 통합이라는 차원에서 스스로의 통합성을 유지하며, 따라서 사회 진화 과정 역시 구별되는 두 차원에서 진행된다. 모든 사회는 그것의 존속을 위해 물질적 차원과 상징적 차원에서의 재생산을 필요로 한다. 하버마스는 상징적 차원의 재생산을 생활세계에, 물질적 차원의 재생산을 체계에 할당하고 있다. 상징적 차원의 통합과 재생산, 물질적 차원의 통합과 재생산이 각각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 행위를 구별했듯이, 하버마스는 사회 질서의 차원에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개념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와 생활세계의 개념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개념 쌍은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 행위라는 행위 이론적 구별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행위 유형과 사회 질서 사이에 명확한 귀속 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생활세계는 단지 의사소통 행위만이 귀속되는 영역이 아니며, 체계 내에서 의사소통 행위가 성립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행위 유형들이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을 통해 구별되는 두 가지 유형으로 설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체계와 생활세계도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분석적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측면으로서 도입된다.
한 사회가 생활세계의 상징적인 통합과 재생산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차원에서의 통합과 연속성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원칙적으로 볼 때, 생활세계의 질서는 오직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화적 의미나 규범의 정당성은 화폐로 구매되거나 권력에 의해 강요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회는 문화적 지속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유된 문화적 해석의 틀과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한 사회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 도덕이나 법과 같은 규범적 질서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한 사회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 새로운 세대들에 대한 사회화 과정을 지속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문화, 사회, 인격을 생활세계의 세 가지 구성 요소들로 제시하게 된다. 이를 통해서 그는 후설 이래로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는 선(先) 이해의 지평으로만 다루어지던 생활세계 개념을 사회학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다.
나아가서 모든 사회는 그 물질적 재생산을 위해 경제적 질서와 정치적 질서의 수립을 필요로 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생활세계가 주로 참여자 관점에서 포착되는 상징적 차원과 관련되는 데 반해서, 체계적 통합은 관찰자 관점에서 드러나는 행위 결과들의 기능적 안정화의 차원과 관련된다. 교환과 관련된 경제적 질서, 권력과 관련된 정치적 질서는 참여자 관점에서 포착되는 행위 동기들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행위 결과들 사이의 객체화된 조정과 통합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진화의 과정 속에서는 이러한 구별되는 두 차원에서 발전이 동시에 진행된다. 생활세계는 점차 합리화되어가며, 이와 더불어 체계의 복잡성도 증대되어 간다. 사회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체계와 생활세계는 밀접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다. 미분화된 사회에서 체계를 구성하는 경제적 질서나 정치적 질서는 생활세계의 규범적 질서에 의존하며 그것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회적 근대화 과정을 통해 체계와 생활세계의 영역은 분화되며, 나아가 체계는 자립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경제 체계와 행정 체계에서 복잡성이 증대하면서 유발되는 의사소통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화폐와 권력과 같은 매체들이 등장하며, 이를 통해 체계는 점차로 생활세계의 명령으로부터 분리되어 자립화되어 나간다.
이미 베버가 지적하였듯이 사회적 근대화의 주된 특징은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체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근대 국가의 성립은 권력을 매체로 하는 공공 행정 영역이 자립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국가 체제는 법적으로 정의된 위계적 권력 질서를 통해 국민들에게 명령권을 행사한다. 이러한 명령의 정당성 근거는 이미 제정된 법적 절차에 의해서 주어지며, 명령에 대한 거부는 곧 제재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일반 시민들은 명령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단순한 선택지만을 가지게 되며, 그러한 명령의 정당성은 법적으로 정의된 형식적 절차를 준수했는지 여부일 뿐이다. 화폐를 매체로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 역시 규범적 질서로부터 자립화된다. 화폐는 거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를 표준화하고 단순화함으로써 상품 교환을 확대시킨다. 권력이나 화폐 매체들은 당사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우회하여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주며, 이를 통해 체계의 질서들은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재생산되는 생활세계의 질서로부터 자립화되어 나간다.
물론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가 양자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체계를 성립 가능하게 하는 제도들이나 법 체계는 궁극적으로 생활세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제도나 법 체계가 화폐나 권력과 같은 매체들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이기는 하지만, 매체들이 이러한 제도들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법 제도는 매체들이 기능하기 위한 전제일 뿐이며, 화폐나 권력과 같은 매체들은 제도와는 구별되는 자율적인 자기 확장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사실을 각별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경제와 행정 체계의 자율성 자체가 가지는 진화적 성과를 인정하고자 하며 복잡화된 체계를 생활세계의 논리를 통해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체계 복잡성의 증대 및 자립화와 더불어 법과 도덕규범의 차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생활세계의 합리화 역시 진척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세계의 합리화 과정은 근대에 이르러 전통적 세계관의 탈주술화와 문화적 가치 영역들의 분화를 요구하게 된다. 진선미의 세계관적 통일성을 보장하던 종교적,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해체되고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내재하는 타당성 요구들은 과학과 기술, 도덕과 법, 예술과 예술비평이라는 제도적 영역으로 분화되어 나간다. 가치 영역들 사이의 제도적 분화와 민주주의적 사회 제도의 확립은 근대에 이루어진 생활세계의 합리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체계와 생활세계 사이의 이러한 분화 과정이 순조롭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진화는 체계의 자립화를 넘어서 체계의 명령이 생활세계에 침투하는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부분은 하버마스가 문제 삼는 것은 체계의 매체들이 생활세계를 식민화하는 문제일 뿐이지, 체계의 복잡화나 자립화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인 경제 자체를 소외로, 계급 착취의 한 양식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물화된 질서 자체를 생활세계 질서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기초한 중앙 집권적 계획 경제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시도가 첫째, 자본주의 경제 체계의 발전이 가지는 생산에서의 효율성이라는 장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째, 화폐라는 매체를 단지 권력이라는 매체로 대체할 뿐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화폐와 권력을 매체로 하는 체계의 자립화가 가지는 일차적인 의의를 인정하는 조건에서 그러한 매체들이 자신들이 기능하기에 적합한 영역을 넘어서서 생활세계 질서를 파괴하는 경우만을 문제삼게 된다.
하버마스의 진단에 따르면 효율성만 지향하는 체계의 명령이 상호 이해의 메커니즘을 요구하는 생활세계에 침투하면서 여러 가지 부정적 효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생활세계는 이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가족, 학교, 문화 영역 등 상호 이해에 기초한 의사소통적 질서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영역들에 화폐나 권력과 같은 매체들이 침투하는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들이 발생한다고 말하며, 특히 법제화 경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러한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가족법이나 학교법 등의 제정은 그것이 아동이나 여성 혹은 학생이나 학부모들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목적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가족이나 학교를 그와는 이질적인 화폐나 권력과 같은 매체들을 통해 재정의하게 되면서 다양한 저항들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영역들에 대한 체계 논리의 침투는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한 생활세계의 질서 유지를 교란하고, 생활세계를 물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문화 영역이 시장에서의 이윤 추구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교육이 경제 성장을 위한 노동력 재생산 과정으로만 정의되는 곳에서 자율적인 문화적 가치의 추구나 전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식민화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화폐나 권력을 통한 체계의 보상책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는 사회복지국가가 베풀어주는 보상이 우선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위협받고 있는 생활 방식을 방어하고 회복하는 일, 또는 변혁된 생활 방식을 관철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형태의 문법이 중요하다.” 체계 논리에 의한 식민화 효과에 대해 이러한 저항들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저항은 의식의 파편화로 인해 억압되고 있다. 문화적 영역들이 전문화되고 그것들이 일상적 의식과 소통하는 계기를 상실하게 되면서 일상적 의식은 사회 전체에 대한 조망을 상실한 채 파편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이제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파편화된 의식이 저항의 잠재력의 실현을 방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하버마스는 새로운 사회 운동의 활성화를 생활세계의 식민화에 대한 저항의 표출로 해석하고, 이러한 갈등을 ‘신정치’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舊)정치는 경제적, 사회적, 국가 내적 그리고 군사적 안전 문제와 관련되며, 신(新)정치는 새로운 삶의 질과 평등권, 개인적 자기실현, 참여와 인권의 문제 등과 관련된다.” 이러한 저항의 시도는 그 성격상 특정한 계급에 국한된 저항이 아니다. 이러한 저항은 현대 사회의 자기 파괴적 경험에 당면하거나 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에 의해 나타난다. 그리고 ‘성장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는 이들을 결합하는 끈이다.
하버마스는 본래적인 근대의 기획이 의사소통 합리성에 담겨 있는 풍부한 합리성의 차원을 포괄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체험하는 근대성의 역설, 합리화의 역설은 단지 자본주의적 근대화 속에서 포괄적 합리성이 제한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징표일 뿐이다. 그는 사회 진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 논리’와 ‘발전 역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사회적 진화의 과정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발전 역학과 보편적 발전 논리의 수전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적 구별에 따르면 생활세계 식민화로 인한 현대적 병리 현상의 출현은 발전 역학에 해당하는 문제일 뿐, 발전 논리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통해 나타나는 현대적 병리 현상들, 즉 계몽의 한계는 이제 더 이상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발전 논리의 측면에서 보자면, 근대라는 기획은 과학 기술의 발달, 보편주의적 윤리의 가능성, 예술의 자립화라는 세 측면을 포괄하며, 그것들 사이의 조화를 모색하는 종합적 기획으로 파악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탈근대적인 시대 비판들에 맞서서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규정하면서 근대성의 이념을 옹호하고자 했다. 물론 이러한 근대의 기획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실제로 실현될지 여부는 미리 결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잠재성의 실현은 결국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 및 비판적 실천과 결부된 발전 역학의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토의 민주주의
지금까지 우리는 ‘생활세계의 식민화’ 개념을 중심으로 하버마스의 시대 진단을 검토하였다. 이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들은 체계 논리에 의한 생활세계 논리의 침식으로 진단된다. 그렇다면 이제 지본 정치의 실천적 과제는 체계 논리의 침식을 제어할 수 있도록 생활세계의 저항을 강화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버마스는 그의 토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론을 통해서 이러한 과제를 민주주의 정치 이론 차원에서 해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하버마스의 시대 진단이 복지국가의 등장과 갖는 관계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의 시대 진단 방식은 개입주의 국가의 등장과 복지국가의 타협이라는 후기 자본주의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개입주의 국가의 등장과 복지국가의 타협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혁명 이론은 현실적합성을 상실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개입주의적 국가의 출현을 통해서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하는 위기 경향은 통제되며, 복지국가의 타협은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제도화하고 복지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계급 갈등을 완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국가가 경제 행위의 한 주체가 되고 복지 제공자가 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이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갈등으로 전화되게 된다. 자유주의 국가는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공정한 경제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개입 국가가 출현함으로써 이제 국가는 더 이상 중립성이라는 가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국가는 시민사회의 요구에 직접적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한에서 사회적 갈등의 축은 이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관계로 전환된다. 시민사회 공론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토의 민주주의 모델에 관심이 집중되는 근본적 동기 역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사회 개혁의 주체는 더 이상 특정한 계급이 아니라 경제적인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시민들이 되었다는 인식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복지국가의 등장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먼저 복지국가의 출현이 계급 불평등의 완화에 기여하고, 나아가서 사회권 보장을 통해 자유권 및 참정권의 실질화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그는 복지국가의 출현에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복지국가의 등장과 확대는 생활세계의 영역에 대한 침해를 가져오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다. 복지국가의 확대가 수혜자들의 자율성에 손상을 가져오고,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유지되는 생활 영역들의 고유 논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복지국가의 출현을 통해 계급 갈등이 제도화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질서가 가지는 효율성을 부정하고 권력이라는 매체의 성격을 올바로 포착하지 못함으로써 비민주주의적 독재로 귀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는 사회주의적 계급 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대안으로 제시하게 된다. 문제는 체계 논리가 생활세계를 침식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병리 현상들을 해소하는 것이며, 이는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론은 민주주의 심화를 통해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제어하고 생활세계와 체계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기획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론은 법에 대한 그의 탐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의 정치 이론에서 법의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생활세계가 체계의 간섭, 침투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언어가 바로 법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게 법은 체계를 제어하는 특수한 기능 체계인 동시에 규범적 정당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법은 민주적 입법 과정을 통해서 정당화 과정과의 연관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경제 체계나 행정 체계와의 기능적 소통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법은 체계와 생활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사회 통합의 중심 매체로 등장한다.
이러한 법의 이중성에 기초하여 올바른 의사소통의 절차에 기초한 의사소통적 권력이 행정 권력으로 전환될 수 있을 때에만 체계의 논리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화폐나 권력과 같은 매체들은 법적 제도화를 그것이 기능하기 위한 기초로 삼고 있으며, 오직 법적 언어를 통해서만 제어될 수 있다. 생활세계의 요구는 법적 언어로 번역될 때 비로소 체계의 질서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토의 민주주의는 시민사회 공론장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토의들을 기초로 하는 입법부의 심의 및 그 결과인 입법 행위를 통해 국민 주권의 이념을 실현하고, 이를 통해 체계 논리에 의한 생활세계의 침식을 제어하고자 하는 기획이라고 간략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공론장의 요구와 소통하는 입법 행위를 통해 출현하는 의사소통 권력이 체계가 산출하는 부작용을 제어할 뿐, 결코 체계 질서 자체를 대체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앞에서도 강조하였듯이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논리에 의해 체계 논리를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입법부를 중심으로 사회를 하나의 단일한 통일체로 파악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반대한다.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전체를 총괄하고 지배하는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입법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가 그 기능에서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관여한다고 하더라도, 복잡한 기능 체계들의 분화를 통해 성립하는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입법부나 정치가 전체를 지휘하는 중심으로 표상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토의 민주주의는 이중적인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이중성이란 토의 공간의 이중성,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장소의 이중성을 말한다. 공론장과 의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우리는 이 이중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론장과 의회는 상이한 토의 공간이며, 동시에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장소이다. 물론 이 양자는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토의 민주주의는 시민사회의 요구가 집약되어 입법 과정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론장은 시민사회 내부에서 작동하는 의사소통의 망(네트워크)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시민사회는 자본주의적 경제 체계나 국가 영역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지는 사회 공간을 의미한다. 시민사회 공론의 형태는 언론, 텔레비전의 공론, 문학적 공론, 정치적 공론, 학술적 공론 등 매우 다양하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공론들은 생활세계의 문제와 훼손들에 대해 민감하고도 신속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제기들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망 속에서 하나의 주제나 문제 제기로 집중되어 나가고, 이를 통해 사회적 이슈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론장은 그것이 무질서하며 또 외부적 조작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단점 역시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론장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공론장이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그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확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분산된 공론장이 생활세계의 문제들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 요구를 입법부에 집약적으로 전달할 수는 있지만, 분산된 공론장의 요구가 입법의 최종적 정당화의 공간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론장은 그것을 보완하는 제도로서 국민 주권을 대변하는 입법부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경제나 행정 체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의회의 적법한 절차에 따른 입법 활동이 행정 권력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행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결국 하버마스가 말하는 토의 민주주의는 활성화되고 성숙된 시민사회의 공론과 제도화된 의회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전되는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민주주의가 선거 기간 중에 단 한 번만 주권을 행사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시민들의 생동하는 요구가 정치적 이슈가 되고, 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그러한 요구를 제기하기 위해서 토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활성화될 때 체계 논리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의 제어도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출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 엮음, 사월의책, 203-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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